3권 에필로그
“···그렇게 된 거였어.”
나는 히데에게 말했다.
여기는 오랜만에 햇살이 따뜻하게 내려쬐는 우리 집. 나와 히데는 테라스에 앉아 주말의 홍차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히데에게 드라헨킨더 실험에 대한 건 아주 일부만 말한 채 사건의 내용을 말해 주었다.
홍차를 한 모금 마신 히데가 말했다.
“잠시나마 ‘용’이 되셨군요.”
불덩이를 막고 바다를 갈라 건너편 땅까지 사람을 인도한다. 그것은 말 그대로 잠시 동안 신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완전히 내가 한 건 아니지만.”
“캐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일단 2천만 명이 바다를 건너 무사히 탈출했다는 게 중요하니까요. 협약을 했다고 하니 빈랜드 쪽도 잠시 조용할 거고, 소문은 한참 뒤에나 나겠지요. 크라쿠프는 그 이전부터 도이체스가 고립시키고 있었으니 다른 나라도 눈치 채기 힘들 거고.”
이 계획은 처음부터 히데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술에서 깬 다음 날, 나는 히데가 토라를 암송하는 것을, 출호텐기를 낭송하는 것을 듣고 이번 작전의 영감이 퍼뜩 떠올랐다. 바다를 건너 사람들을 탈출시킨다는, 신이나 할 법한 무모한 계획을.
그 출호텐기에서, 핍박받던 !파라들이 바다를 걸어서 건너 호텐을 탈출한다는 그 신화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라인스와 다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건 잘 해결되셨습니까?”
“글쎄. 잘 모르겠어. 괜찮아진 거 같아. 설령 괜찮아지지 않았더라도, 이번 일을 도와줬으니 그것만으로도 정말 충분해.”
그 뒤 우리는 과자와 홍차의 맛을 음미했다.
물에서 찻잎을 꺼내던 히데가 말했다.
“어쩌다 홍차를 좋아하게 되었습니까?”
“글쎄?”
히데야 계기가 명확하다. 내가 디저트 카페에 데려가서 먹였던 홍차를 마시고 반했으니까. 나는 뭐였더라?
곧이어, 내 얼굴에는 그리움이 번진다.
“아버지가 홍차를 좋아하셨거든. 도이체스에선 흔치 않은 취미셨지. 아버지는 점심 햇살을 맞으며 홍차를 드시곤 했어. 나에게도 다도를 가르쳐 주시고, 그때 함께 먹었던 과자들···. 그 추억 때문인가 봐. 홍차 그 자체가 맛있기도 하지만.”
나는 아릿한 그리움이 번져서 살짝 고통스러워졌다.
“조금만 더 오래 살아 계셨더라면 내가 직접 우려 드렸을 텐데···”
“미안해요.”
“아니야. 오랜만에 아버지 생각을 해서 좋았어. 잠시 잊고 살았는걸.”
복수만 생각하고 살았지, 이런 따뜻한 추억으로 떠오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상념에 젖으려는 찰나, 초인종 소리가 났다. 나는 양해를 구하고 일어섰다.
나는 대문 앞에 있는, 새까만 머리를 히데처럼 짧게 자르고 에메랄드빛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는 작은 여인을 보았다. 눈앞의 사람은 지금 내 정원에서 홍차를 마시는 사람과 정말, 정말로 닮아 있었다. 그래서 내가 처음에 히데를 이유 없이 싫어할 뻔했던 거겠지. 나는 그녀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어머니. 무슨 일이에요?”
우나 브라운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큰일을 겪었다는 걸 듣고 와 봤다. 아직은 네가 죽을 운명이 아닌 것 같더구나.”
“당연하죠. 저는 해야 할 일이 있는 걸요. 들어오실래요?”
“아니, 나는 괜찮다. 이미 손님이 있기도 하고, 홍차는 내 취향이 아니거든.”
우나는 !파라와 인간의 혼혈이다. 당연히 홍차 냄새 정도는 맡을 수 있을 것이다. 우나가 까치발을 들어 나를 한 번 포옹하더니, 귀에 대고 말했다.
“잘 살아남으렴, 아이야.”
“잘 있어요, 우나.”
우리는 잠시 그렇게 서로를 안았다. 우나가 이렇게 해줄 때마다 나는 언제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마 긴장해서 그런 거겠지. 나는 ‘어머니’에게 언제나 날선 경계심을 품지 않아도 되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 정말 궁금해졌다. 잠시 후 우리는 떨어졌다. 우나는 미소를 짓더니 휙 돌아서서 가 버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는 그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히데가 멀리 창문 너머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가 빛에 반사되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정원으로 가며 말했다.
“미안해. 지금 끝났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려던 나는 충격 받은 히데의 얼굴을 보고 멈췄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히데?”
“아.”
히데가 무슨 상념에서 깨어난 듯이 말했다.
“저분은 누굽니까?”
“내 어머니야.”
무심코 대답하던 나는, 그제야 아차 했다. 난 대외적인 대답을 내놓았지만, 히데 앞에서는 그게 ‘거짓말’로 들릴 테니까.
그 말을 들은 히데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저,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급한 일이 생각나서요.”
히데는 그렇게 말하더니, 무척 혼란스러운 얼굴로 돌아서서 황급히 나갔다.
히데가 나간 자리에는 홍차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남은 홍차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여전히 거짓말을 못하네. 당연한 얘기겠지만.”
나는 히데의 찻잔을 바라보며 말했다.
“누구와는 한참 다르게 말야.”
나는 그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생각하면서, 과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나는 문득, 이 과자를 안토니나가 무척 좋아했을 거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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