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너는 용이 되어-68화 (68/102)

3권 5장. 배신자의 길-(1)

어느 날, 헤르만 예거가 라인스 윈터를 자기 사무실로 따로 불러내었다.

헤르만이 무슨 짓을 했든, 결국 그는 라인스의 상관이었고 그가 명령하면 나가서 얼굴을 맞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며칠 만에 본 헤르만 예거는 많이 피곤한 표정이었다. 헤르만은 이제 라인스의 소속이 잠시 변경되었다며, 아인자츠그루펜과 앞으로 할 임무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전부 다 들은 라인스가 물었다.

“왜 저를 따로 불러내어서 말씀하신 거죠?”

지금부터 헤르만의 대대는 아인자츠그루펜이라는, 친위대 내의 비밀조직 소속으로 잠시 변경된다. 임무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사람을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람을 찾아낸 뒤 크라쿠프 전역을 폭격해 섬멸하는 것.

무척 비밀스럽고 뒤가 구린 임무임은 틀림없으나 편대장도 아닌 라인스를 그가 따로 불러내 설명할 이유가 없었다. 한 명 한 명에게 직접 이렇게 전달해준다고 보기에는, 헤르만 예거가 지금 너무 바빴다.

헤르만이 말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 2천만 명이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 나는 폭격 직전에 그들을 전부 탈출시킬 거야. 그러려면···”

헤르만이 수척한 눈으로 말했다.

“네 도움이 꼭 필요해.”

라인스는 정신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종족 돌고래를 위해, 그들 1만 5천명을 살리기 위해 뛰어다녔던 사람이라면 한 국가의 모든 인구를 구하기 위해 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짜로 그렇게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 자는 또 다시 남을 위해 자기 목숨을 걸고 있다.

그리고 지금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라인스는 헤르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스 윈터를 매 순간 괴롭히는 ‘프란츠’라는 환영이었다. 그는 잔인한 사람이었고, 그녀의 소중한 사람을 또 다시 망가뜨렸다. 그리고 사람을 구하려 한다.

라인스는 헤르만의 샛노란 눈동자에서 숨길 수 없는 의지가 불타오르는 것을 보았다. 진심이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도 진심이었다.

“왜 제가 도와줄 거라 생각하죠?”

“부탁해, 라인스. 네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어. 제발. 네 오빠 일로 나를 평생 미워해도 좋아. 원한다면 나중에 날 죽여도 좋아. 하지만 제발 지금은, 지금만은, 도와줘.”

“제가 ‘진짜로’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군요, 헤르만 예거.”

라인스가 차갑게 말했다.

“저는 당신 못지않게, 원하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그 무엇이든.”

라인스가 조소를 날리며 말했다.

“당신에게 그 수많은 목숨의 업을 짊어지게 해서 살아 있는 동안 계속 괴로워하도록, 절망하도록 하는 데 2천만이면, 오히려 싸지 않을까요?”

라인스는 처음으로 헤르만이 그토록 놀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라인스는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가 말한 그대로의 사람이었다. 그럴 만한 상황이 없어서 아직 그에게 드러나지 않았을 뿐, 라인스 윈터는 정말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심지어, 헤르만 예거보다도 더하게.

헤르만은 그런 그녀에게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가 그를 얼마나 미워하게 되었는지도 피부에 와 닿은 것 같았다.

헤르만이 벌떡 일어나더니,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제발, 부탁합니다. 도와주세요. 그들을 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완전히 애원조인 헤르만을 보며, 이번에는 라인스가 놀랄 차례였다.

그동안 라인스가 지켜봐 온 헤르만이 있었다. 헤르만도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종류의 사람이었지만, 무척 자존심이 강했다. 그리고 언제나 강자의 위치에 서서 남을 압도하고 지배하고자 했다. 그는 언제나 통제권을 쥐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서슴없이 라인스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약자가 되어 애원하는 것이다.

진심을 담아서.

단지 남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이 얼마나 모순적인 인간이란 말인가!

“왜···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

어느새 라인스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헤르만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고한 사람들이, 2천만이나 희생되는 걸 막을 수 있다면 몇 번이고 고개 숙일 수 있어. 무릎을 꿇을 수도 있어. 그러니 제발 도와줘. 너 없으면 힘들어. 무척 힘들어. 그리고 나는 사람 목숨으로 도박을 하고 싶지는 않아.”

라인스는 또다시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 자신은 헤르만의 바로 이런 점에 반했었다. 헤르만이 그저 야심가였다면, 아니면 맹목적인 복수자였다면 라인스는 그를 경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더러운 악행 가운데에서도 고결한 마음 한 조각을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 그는 그 점에서 특별했다.

그토록 지기 싫어하는 헤르만이 또 다시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굽히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라인스는 혼란스러워졌다.

미워한다고 생각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워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이 남자에게 아직도 사로잡혀 있었다.

이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대로 이 아찔한 권력을 잠시 즐긴 뒤, 그를 매몰차게 거절해 절망에 빠뜨릴 것인가? 아니면 이 증오를 품에 안은 채 협력할 것인가?

결국 라인스는 하나를 선택했다.

“어디서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죠?”

“네 해박한 마법학 지식과, 배신자 역할이 필요해.”

헤르만은 비로소 모든 설명을 시작했다. 드라헨킨더에 대해서, 베르논에 대해서, 실험체에 대해서, 계획에 대해서.

“베르논은 반드시 날 어딘가에서 잡아가거나 납치하려고 할 거야. 크라쿠프의 국토를 폭격하는 어수선한 때는 절호의 기회지. 아마 죄 몇 개를 분명 덮어씌우고 끌고 갈 거야. 그리고 실험체를 잡으러 가는 인원에 네가 섞여 있으면, 반드시 널 포섭하려 할 거야. 어차피 한스 윈터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을 게 틀림없어. 날 증오하는 너를, 그들은 분명 이용하려고 할 거야. 그때 그쪽에게 협력해. 날 배신하고 궁지에 몰아넣는 척 해. 네가 인원에 없다면 나는 누가 배신자일지 알 수 없지만 네가 있다면 반드시 너에게 접근할 거야.”

“첩자가 되라는 말씀이군요.”

헤르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인스가 말했다.

“정리하자면, 실험체를 수색하는 시간 동안 크라쿠프에 초인플레이션을 일으켜서 빈랜드가 크라쿠프에 접근하는 걸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한 뒤, 크라쿠프인들을 배로 빈랜드로 탈출시키고 그동안 아인자츠그루펜이 내린 지령을 성실히 따르며 당신을 방해하는 척 하면서 나중에 뒤통수를 치라는 뜻이군요.”

“그렇게 하면 계획의 반이 완성돼.”

“반이라고요?”

“배로는 부족해. 물론 가장 많은 인원이 배로 탈출할 거야. 하지만 폭격일까지 내내 실어 날라도 전부 탈출시키는 건 불가능해. 그리고 그 시점에서는 아인자츠그루펜에게 안 들키기도 불가능하고. 과반수를 그쪽으로 탈출시키고, 나머지는 다른 방법으로 탈출시켜야 해.”

나중에 그 나머지 방법을 들은 라인스는 놀라서 사레가 들려버릴 정도였다.

그렇게 라인스는 실험체를 잡으러 가는 인원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가 자폭 캡슐을 먹였을 때는 조금 씁쓸한 감정마저 들었다. 그는 이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 라인스가 헤르만을 아직도 놓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헤르만의 예상대로 디터는 라인스를 포섭하려 했다. 라인스는 일단 자폭캡슐 이야기를 꺼내며 디터를 밀어냈다. 저쪽을 애타게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아직은 시간을 끌어야 했다.

헤르만은 일부러 다른 두 사람에게는 라인스의 역할을 알리지 않았다. 디터를 속이려면, 라인스가 진짜로 겉돌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 했다.

그러는 동안 크라쿠프의 물가는 폭등했고, 사람들은 순조롭게 마유브를 통해 탈출하고 있었다.

실험체를 처음 봤을 때는 약간의 연민의 감정이 들었으나, 그뿐이었다. 헤르만도 라인스도 안토니나는 계획에 넣지 않았다. 그들은 2천만명을 구할 것이지만 저 소녀까지 구해낼 여력은 도저히 없었다.

그런 생각은 어느 날 밤 그녀를 급하게 P로 불러낸 헤르만에 의해 깨졌다. 그들이 예상치 못한 게 있었다. 바로 헤르만과 안토니나의 신비로운 관계였다.

자초지종을 들은 라인스가 말했다.

「그래도 잡아갈 거죠?」

헤르만이 서글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인스가 물었다.

「그런데 왜 아직도 그렇게 고민하고 있나요?」

라인스는 헤르만에게 찰싹 달라붙으려 하는 소녀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왜 아직도 망설이고 있어요?」

「그건···」

「나 그거 알아. 아저씨, 나한테 바라는 거 있지?」 안토니나가 끼어들었다.

「···응.」

「말해봐! 내가 할 수 있는 거면 들어줄게!」

「싫어. 이 이상 추락하고 싶지는 않아. 도저히 너한텐 할 수 없어.」

그러자 안토니나가 말했다.

「난 아저씨가 좋지만 아저씨의 꼭두각시는 아니야. 나 알아서 생각할 수 있어. 아저씨 부탁이 무리하면 거절할 수 있어. 그러니까 말해봐. 뭐가 고민이길래 그렇게 괴로워하는 거야?」

마약에 취해 늘 흐리멍덩했던 안토니나의 눈동자가 굳은 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헤르만이 꼭 목이 졸린 사람처럼 억눌린 목소리를 냈다.

「어떻게—」

「응?」

「어떻게 할 수 있겠냐고.」

헤르만이 괴로운 어조로 말했다.

「어떻게 13살짜리 애한테, 날 위해 죽어달라고 해줄 수 있겠냐고.」

안토니나가 몸을 숨기고 있는 크라쿠프의 한 가정집에서 침묵이 감돌았다.

안토니나가 슬픈 눈으로 헤르만을 올려다보았다.

「아저씨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어?」

「그런 건 아니야.」

헤르만이 입술을 깨물더니 말했다.

「아저씨가 하고 싶은 일이 있어. 아마 거기에 네가 가담한다면 정말 완벽한 계획이 될 거야. 하지만 네 몸으로 그걸 했다간 죽을 거야. 죽을 게 뻔해.」

「무슨 계획인데?」

헤르만은 대답하지 않았다. 라인스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헤르만의 제안은 무척이나 도덕적으로 매력적이었다. 이 소녀가 헤르만에게 자기 의지대로 결정할 힘이 있다고 아무리 말해봤자, 어른에게 휘둘리기 쉬운 나이인데다 맹목적인 호감을 쌓아둔 상태다. 너무 현혹되기 쉬웠고, 거의 강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라인스는 헤르만 대신 그 계획이 무엇인지 말해버렸다. 헤르만이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라인스는 어설픈 크라쿠프어 말하기 실력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았다. 이왕 가담했으니 이 일은 반드시 성공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일의 성공확률을 이 소녀의 목숨, 어차피 실험실에서 고통 받다 갈 목숨이 엄청나게 높여 준다면, 언제든지 써야 마땅했다. 라인스가 하는 건 그저 헤르만의 죄책감을 조금 덜어주는 것뿐이었다.

결국 계획을 전부 들은 안토니나가 깔깔 웃었다.

「뭐야! 걱정했잖아? 그런 이유였어? 우리나라 사람을 살리기 위해 그렇게 뛰어다니고 있는 거였어? 그런 거라면 죽어줄 수 있어!」

「안토니나! 그런 말 하지 말고, 방금 들은 건 못 들은 걸로 해. 어차피 너 없이도 진행할 수 있는 계획이었어.」

헤르만이 화를 내자 안토니나가 서글프게 웃었다.

「하지만 나 어차피 올해 안에 죽는걸.」

그 말에 헤르만의 얼굴이 굳었다.

「뭐···?」

「실험하는 아저씨들이 하는 이야기 들었어. 내 몸은 너무 약해져서, 이제 올해도 못 넘기고 죽을 거래. 그래서 그 뒤부턴 진통제 많이 줘서 아주 좋았어.」

헤르만도, 이 사태를 부추긴 라인스도 할 말을 잃고 이 담담한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안토니나가 활짝 웃었다.

「그리고 그 계획 정말 재미있어 보여! 정말 ‘용이 되는’ 기분일 거 같아!」

넌 이미 ‘용’이나 다름없어, 라인스는 이 말을 꿀꺽 삼켰다.

결국 헤르만은 승낙하고 말았다. 그도 말했다시피, 그는 사람 목숨으로 도박을 걸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토니나만 있다면 계획을 거의 100퍼센트 성공시킬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헤르만은 라인스에게 안토니나의 일에 대해 화를 낸 뒤, 마지막에 중얼거렸다.

“이런 뜻이었구나, 너.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게.”

라인스는 입술을 뗐다가,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어서 그냥 뒤돌아서 버렸다. 오늘 길에 마주쳤던 검은 이빨의 피가, 용병기에 묻었던 검은 피가 바닥에 조금 흩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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