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3장. 탈출 계획-(3)
그 말을 들은 용기사들은 한층 더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그러나 농담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고 있겠지. 이렇게까지 섬뜩하고 비열한 수단을 쓴 사람이 농담을 할 리가 없다.
이 말을 한 뒤, 바로 세부 작전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걸 오래 논의하고 있으면 수상해 보일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다만 이렇게 말해두었다.
“우리가 지금부터 하려는 것들은 단순한 명령불복 정도가 아냐. 타국과, 그것도 다른 민족의 국가와 내통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아니, 그렇게 될 거야. 충분히 반역죄가 성립돼. 들키면 교수형이야.
나는 크라쿠프인 자체에겐 아무 감정이 없어. 하지만 우리 쪽 실수 때문에 죽어야 하는 건 불합리해. 단지 그것뿐이고, 이제 너희도 공범이고 협력해야 해.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
현재 도이체스에서 파시즘은 우익이 아닌 극우로 분류된다.
파시즘의 광풍은 친위대가 도이체스에서 가장 파쇼화된 집단이라 과장되어 보이는 측면이 있었다. 육군은 반반, 해군은 거의 없다. 일반 대중에서는 소수의 열성 지지자들과 미적지근하게 파시즘이 괜찮아 보이는 사람들을 합쳐서 삼분의 일 정도. 다른 삼분의 일은 무관심, 나머지 삼분의 일은 파시즘에 대한 확실한 우려를 펼치고 있다.
반대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약 2세기 동안 도이체스의 귀족들이 한 삽질이 뇌리에 남아 있는 터라 엘리트주의 그 자체를 불신하는 게 클 것이다. 그 외에는 게르만족이 우수한 민족이라고는 여기지만 다른 민족을 죽이거나 완전히 배제하는 데 거부감을 가진 사람 등. 초대 카이저가 확립한 차별금지의 정신은 그렇게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루프트바페는 나머지 세 군대에 비해 국가로부터 가장 혹독한 교육을 받지만, 그것은 거의 전부 공중 기동과 마법학에 치우쳐 있다. 사상교육은 형식적이다. 마법학을 할 시간도 모자라기 때문이다. 찬반비율은 일반대중과 비슷하다고 봐도 좋을 것이며, 지금 나와 있는 대원은 파시즘에 반대하거나 찬성해도 그다지 열렬하지 않을 확률이 대부분이었다. 라인스는 확실히 파쇼와 정반대의 인물이다. 게랄드와 라헬은 파시즘적 발언을 대놓고 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사람을 망가뜨리거나 고통을 주라는 것도 아니다. 설령 파시즘에 살짝 호의를 가지고 있다 해도 2천만 명을 학살하는 것은 선뜻 받아들일 수 없다. 내가 건 것은 사람을 살리겠다는 대의명분이었다. 그러면 걸어 볼 만 했다. 그럼에도 나는 안전장치까지 더해버렸지만.
우선은 크라쿠프의 수상을 빨리 만나야 했기 때문에, 우리들은 흩어졌다. 해산하기 직전, 나는 말했다.
“너희들끼리 혼자 있을 때도, 서로 단 둘만 남았더라도 절대 이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마. 내 방에 도청기가 있다는 건 너희들의 방에도 있다는 증거다. 방뿐만 아니야. 어디 있을지 몰라. 일단 지금은 내가 상쇄장을 켜서 무효화시켰지만 벗어나면 다시 작동할 거야. 작전에 대한 논의는 반드시 나와 같이 있을 때 해야 한다.”
게랄드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 너무 큰 규모의 이야기에 게랄드가 겁에 질릴 줄 알았다. 게랄드는 주차 위반 딱지조차 받은 적 없는, 법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반역에 준하는 사기극을 벌인다는데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게랄드는 오히려 셋 중 누구보다도 의지를 다진 얼굴이었다. 반드시 크라쿠프인들을 살려내겠다는 의지.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발목을 잡을 줄 알았던 사람이 더 적극적이면 괜찮으니까.
이렇게 서로간의 대화조차도 차단하면, 셋은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게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선택적으로 정보를 알려줄 수 있다. 같은 바구니에 달걀을 전부 담는 건 어리석은 짓이니까.
내가 수상을 만나러 가는 동안 셋은 내가 지정한 지점들에서 과량의 마력이 검출되는지 확인하러 갔다. 범위를 좁히기 위한 작업이었다. 단순 탐문이니 이상을 발견하면 돌입하지 말고 즉시 보고하라고만 했다.
아인자츠그루펜 대원이 차를 태워주겠다는 걸 거절하고 국회로 걸어갔다. 크라쿠프까지 계속 차를 타고 와서 뒷좌석에 구겨져 앉기 싫었다. 결국 대원도 나와 함께 걸어야 했다. 내가 사복 차림이었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재미없게 생긴 국회의사당에 들어서서 수상을 만나고 싶다고 하기까지 나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다. 옆에 대원이 경호하듯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디터가 미리 전화를 해 두었던지 나는 그 어떤 지체도 겪지 않고 우스코 수상을 만날 수 있었다. 대원은 계속 남아있겠다는 걸 억지로 돌려보냈다.
수상에게 국민들을 마유브로 피난시키라고 통보했다. 일부러 피난이라는 말을 썼다. 상대가 무슨 군사작전이라도 벌어져서 민간인을 소거시킨다, 정도로 착각하도록.
우스코 수상은 곤란하다는 말조차 못 꺼내며 끙끙 앓았다. 불쌍했다. 한 나라의 수상이나 되어서 연대지도자에게 쩔쩔매야 한다니. 아니, 크라쿠프에 괴뢰정권을 수립하면서 이 자리에 오른 인물이니 동정할 필요가 없나. 그저 도이체스의 충실한 꼭두각시일 뿐이다.
복도로 나서면서 사람들의 분위기를 살폈다. 조금 번잡한 곳으로 내려오자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대원을 떼어버린 덕이다. 나는 이질적으로 튀지 않기 위해 크라쿠프인들처럼 얼굴에 약간의 미소를 머금으며 걷기 시작했다. 처음 여기 들어오면서 눈여겨봤던 층 안내도를 되새기며, 나는 어느 복도로 걸어갔다.
특색 없는 문 앞에 멈춰 선 뒤, 생명계 마법 ‘레타’를 오른쪽 눈에만 발동한다. 시야변화로 인한 공감각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왼쪽 눈은 감아버린다. 그렇게 적외선 스펙트럼까지 확장된 나의 시야에는 문과, 그 너머의 열원 하나가 보인다.
회의하러 자리를 비우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마법을 해제하고 문을 노크한 뒤 열고 들어갔다. 열자마자 보인 건 넓은 사무실. 비대칭적인 앞머리를 귀 뒤로 넘긴 여성. 흰색이 대부분인 머리카락은 회색을 지닌다. 노회한 얼굴에는 세월이 남긴 카리스마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다가 나의 등장으로 멈췄다. 통화하고 있는 것까지는 예상 못했다. 나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검지를 세로로 추켜올려 입술을 누르며, 쉿, 이라는 제스쳐를 취한다.
이윽고 그녀가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아니, 아니네. 잠시 다른 생각을 해 버려서. 그 건은 보류하고, 5시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그녀가 전화를 끊었다. 그녀의 녹색 눈이 나를 쏘아보자 나는 가볍게 목례를 하며 말했다.
「도이체스 친위대 연대지도자 헤르만 예거입니다. 크라쿠프의 재무장관 마제나 반코비츠가 맞나요?」
「앉게.」
마제나가 턱짓으로 그녀와 마주보는 위치의 의자를 가리켰다. 여기 앉으면 마제나가 날 내려다보는 구도가 된다. 무의식적으로 권력을 부여해주는 위치. 설계에 신경을 많이 썼다.
나는 앉은 뒤 말했다.
「우선 소란을 피우지 않은 점, 감사드립니다.」
「이 국회의사당을 날려 버릴 만큼의 용병기로 중무장한 무뢰한이 갑자기 방에 쳐들어오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자네가 진짜 무뢰한이었으면 나는 비명을 질렀을 거야.」
느꼈단 말인가? 내가 지금 몸에 지닌 마력물질 중 마탄을 지닌 용병기 형태로 있는 건 딱 하나뿐이었다. 마제나가 말했다.
「이 나라가 용을 사육할 수 있었더라면 나도 용기사가 될 수 있었겠지.」
나는 수긍했다. 보통 여자들은 용병기를 만져야 그 안의 마력을 느끼고 감응할 수 있는 반면, 용기사들은 매우 넓은 범위에서 감응할 수 있었다. 내가 집에서 원격으로 용병기를 발동시킬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
나는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빠른 시일 내에 도이체스는 크라쿠프를 폭격합니다. 목적은 크라쿠프인의 멸절입니다.」
나는 마제나의 반응을 기다렸다. 마제나는 그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마제나가 말했다.
「뭘 뜸을 들이고 있나? 계속해보게.」
보통 사람이 아니다. 하긴, 겁에 질려 안절부절 못하는 것보단 훨씬 낫다. 나는 말했다.
「현재 정부에서 피난령을 내렸고, 크라쿠프의 전국민은 마유브로 집결하게 됩니다. 이것은 함정입니다. 마유브에 모두 모이면 용을 동원해 그들을 전부 죽일 겁니다. 물론 수상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저 피난령을 내릴 뿐이지요.」
마제나가 신음했다.
「우스코··· 그래, 도이체스의 충실한 꼭두각시이니. 그래서 설마 나에게만 절망을 안겨주기 위해서 찾아오진 않았을 테고,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우선 당신을 찾아온 이유는 이 괴뢰정권 측 인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후임자들이 죄다 멍청이들뿐이라 어쩔 수 없었어.」
마제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말했다.
「그리고 비-괴뢰정권 인사 중에서 가장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정치색이 옅어 도이체스에서 경계하지 않고요. 저는 마유브를 폭격하기 전 크라쿠프인을 전부 탈출시키고 싶습니다.」
「난민으로 보내버리는 건가. 이런 계획까지 나올 정도면 육로는 이미 봉쇄했겠지. 나머지 산맥은 넘기 너무 힘들다. 가장 가능한 경로는 해상이겠군.」
「예. 사실 ‘모이는 장소’를 마유브로 하자는 건 제 계획으로, 마유브의 국제항을 통해 외국으로 도피시킵니다.」
「하지만 그냥 배에 태워 보냈다가는 도이체스에게 들킬 거야. 어떻게 할 셈이지?」
「외국의 무역선에, 화물 일부를 덜어내고 그 안에 사람을 태웁니다. 조금씩, 조금씩. 지금 도이체스가 갑자기 검문을 강화했지만, 그건 ‘기준치’를 초과한 마력이 빠져나가는 것만을 따집니다. 기준치 이하라면 그다지 신경 쓰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거기 따른 보상을 해야겠지요. 상대가 무리한 걸 요구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전 국민의 목숨보다는 싸겠지요. 점찍어 둔 나라는 빈랜드입니다. 빈랜드는 비참전국으로 중립을 지키고 있으며 베네딕툼의 생산지인 아르텐 대륙이 전쟁터가 되어버려서 부르구드에서만 수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빈랜드는 아르텐 대륙과 대양을 사이에 두고 떨어진, 한마디로 엄청나게 먼 대륙 메이아의 북쪽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초강대국이다. 원래는 브리타니아의 식민지였으나, 점점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해 버렸고, 브리타니아와 전쟁을 벌여 이긴 후 독립했다. 그 이후로 이 신생 국가는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정서상 연합국에 훨씬 더 가깝지만, 아직까지는 전황을 지켜보며 중립을 유지하고 있다. 도이체스를 적으로 돌리면 너무 위험이 크기 때문에.
거의 황금과 꿀이 흐른다고 말할 정도로 모든 것이 풍요로운 메이아 대륙에 딱 하나 없는 게 있는데 바로 베네딕툼이었다.
「부르구드는 지금 연합국의 수요도 충족시키지 못하니, 빈랜드는 만성적인 베네딕툼 부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땅에도 마탄의 원료들이 엄청나게 잠재되어 있지만, 베네딕툼만은 없습니다. 그들을 크라쿠프에 몰리게 한다면, 그들의 선박으로 국민들을 탈출시킬 수 있습니다. 물론 정부와 밀약을 맺어야겠지요.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제나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빈랜드로 망명이라··· 그게 자네 입장에서 최선이겠지. 추축국으로 망명해봤자 다들 도이체스 눈치를 보며 받아주지 않을 것이고, 연합국으로 망명하라 권유하는 건 너무 명백한 반역죄이고, 그러니 중립국으로 가라.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크라쿠프로 오는 빈랜드 선박은 그렇게 많지 않다.」
마제나가 말했다.
「도이체스는 크라쿠프를 점령하면서 생산되는 베네딕툼 및 가공물에 대한 권리 70퍼센트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걸 제외하면 실제로 수출할 수 있는 물량은 남은 30퍼센트이지. 연합국에 팔지만 않으면 도이체스는 건드리지 않겠지만, 여기서 베네딕툼을 구매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의도로 읽힐 수 있어. 그랬다간 그들도 골치 아파지겠지. 그 결과 여기 오는 빈랜드 선박은 수가 적다. 화물을 하나도 안 싣고 사람으로 전부 채워서 계속 보내더라도 그 정도로는 터무니없어.」
「만약 그 30퍼센트 중에서 3분의 2 정도만 빈랜드여도 전부 탈출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 정도라면 가능할 거다.」
「빈랜드가 그 정치적 위험성을 무릅쓰고까지 베네딕툼을 사게 만들면 됩니다. 가장 쉬운 건 크라쿠프산 베네딕툼 가격의 폭락이겠지요. 돈은 엄청나게 강력하니까요. 어차피 베네딕툼을 필요로 할 정도로 강대국이면서 중립인 국가는 빈랜드밖에 없습니다.」
「베네딕툼 가격을 의도적으로 내리는 건 불가능해. 바로 도이체스에게서 제재가 올 거다.」
「도이체스도 손쓸 수 없게 만들면 됩니다. 크라쿠프의 화폐가치가 폭락한다면 베네딕툼 가격도 저절로 내려가겠지요.」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 마제나의 눈동자가 내 눈을 쏘아보았다.
느낄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전문가이고, 유능하다. 그리고 자부심이 있다.
「지금,」
마제나가 말했다.
「내 손으로, 크라쿠프의 경제를 끝장내라는 말인가?」
마제나의 손이 의자 팔걸이를 파고들 듯 움켜쥐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그리고 마제나가 결코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해준다.
「최고 등급 ‘위조지폐’를 대량 제작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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