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너는 용이 되어-53화 (53/102)

3권 2장. 흔적들, 그리고 앞으로도-(5)

히데 프롬은 새벽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약간 잠긴 목소리에 짜증이 담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전화기 너머에는 낯선 남자였다.

“H. 프롬 씨가 맞으십니까?”

“네, 본인입니다.”

상대는 여자 목소리가 나온 것에 살짝 당황하며 말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여긴 파란 잎사귀라는 주점입니다. 손님 품속에서 프롬 씨의 연락처가 나와서요. 남자분이고, 까만 머리에—”

히데는 잠시 이마를 짚은 뒤 말했다.

“눈은 노랗고, 혹시나 얼굴에 이상한 무늬가 있습니까?”

“무늬는 없지만 눈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아는 분이면 빨리 데려가 주시지 않겠습니까? 저희도 문을 닫아야 해서.”

히데는 파란 잎사귀의 주소를 듣고 전화를 끊었다. 살짝 두통이 오려 해서 눈살을 찌푸린다.

헤르만이 아직 관사에서 나가기 전, 그들은 어쩌다 ‘돌아갈 곳’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 있었다. 그렇게 긴 대화는 되지 못했다. 둘 다 돌아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헤르만은 조금 애매모호했지만, 결론은 그랬다.

헤르만은 이렇게 말했었다.

“내 안부를 전해줘야 할 가족은 없어.”

히데처럼 그냥 고아인 사람은 저렇게 애매하게 말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거나, 그냥 없다고 대답한다. 히데는 더 묻지 않았다. 히데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가족에 대해 동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세상엔 상종하기도 싫은 종류의 인간이 하필 가족인 경우도 많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가족과 의절한 사람쯤이야, 흔하진 않지만 있을 법 했다.

이때 비상연락처 이야기가 나왔다. 사실, 히데가 어느 정도 유도한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헤르만이 말했다.

“생각은 좋은데··· 좀 대상이 부적절하지 않아? 우리 둘 다 너무 쉽게 죽을 수 있는 사람들이잖아.”

실로 그랬다. 하늘에서 스러진 에이스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결국, 그들은 연락처를 교환하기로 했다. 헤르만은 이사 가서 전화선을 까는 대로 바로 연락처를 주겠다고 약속했고, 그 말을 지켰다.

이제 헤르만은 히데와 같은 공간에 없었다.

조금만 형편이 나아지면 관사보다는 개인 소유의 집이 훨씬 편한 건 당연했다. 중위 월급으로는 몇 년을 꼬박 더 저축해야 겨우 작은 집을 마련할 수 있겠지만, 승진가도를 달리는데다가 루프트바페와 친위대 양쪽에서 월급을 받는 헤르만이 빨리 집을 얻어 나가는 건 무척 당연했다. 게다가 밤에는 전화 등으로 업무를 보는데, 계속 히데의 눈치를 보는 것도 번거롭다.

당연한 건 알고 있었다. 가지 말라고 붙들 수 있는 이유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집을 부렸다. 연락처만이라도. 낯선 곳에서 발견될 때 가장 먼저 전화가 갈, 그런 사람으로.

그게 술이 떡이 된 헤르만 좀 데려가라고 쓰일 줄은 몰랐지만.

청소년은 출입금지라고 제재를 받는 걸,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사실 청소년이 맞았지만 히데에게 요구되는 역할은 모두 어른의 것이었다. !파라에게는 소년병에 대해 유달리 관대한 기준을 들이댄다.

헤르만은 구석에 처박혀 탁자에 엎드려 있었다. 옆에는 빈 술잔과 병들이 널려 있었다. 얼마나 퍼마신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기가 막혀 바라보는 동안 시야에 포착되는 하얀 종이가 있었다. 다행히 술값은 전부 제대로 낸 모양이었다. 그 중 몇 개를 집어 들자마자 히데는 경악했다. 이만한 돈을 술에 날려버리다니. 자동적으로, 이 돈이면 책을 몇 권 살 수 있을지 계산이 되어 버린다.

“차는 가지고 오셨습니까? 이 새벽에 여자분 혼자는···”

지배인이 더 곤란해진 느낌으로 말했다. 실제로 히데는 청소년이라 동원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교통수단은 자전거밖에 없었고, 히데가 워낙 동안이라 더욱 걱정스러운 것이다. 최근엔 어떤 군인이 새벽에 자길 습격한 8명을 전부 죽여 버렸다는 흉흉한 소문도 돌았고. 히데가 중얼거렸다.

“차는 없지만, 정 안 되면 들고 가면 되니까.”

지배인은 터무니없는 농담을 들은 표정으로 히데를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히데의 눈이 지배인을 똑바로 응시한다.

“저는 !파라입니다. 성인 남자 한 명 정도는, 들고 걸어갈 수 있습니다.”

무거워봤자 완전군장 두 배 정도이다. !파라에게는 그쯤은 가뿐했다.

지배인은 그제야 어두운 조명 때문에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히데 프롬의 자수정 같은 보라색 눈동자를 보았다. 순식간에 표정이 전환. 그 이후도 뻔히 예상되는 일이라 히데는 돌아섰다.

그래, 이게 당연한 거였다. 이게 히데를 바라보는 도이체스의 시선이었다. 히데를 같은 사람으로 봐주는 사람은 제1비행대대의 전우들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사람.

히데는 인사불성이 된 헤르만을 들쳐 업을 준비를 했다. 이토록 조그만 소녀가 남자 중에서도 상당히 큰 헤르만을 업으니 조금 꼴사나웠다. 하지만 히데는 신경 쓰지 않고 파란 잎사귀를 나섰다.

새벽이라 가로등마저 음산하다. 그러나 사람이 무섭지는 않았다. 히데는 괴담이나 미신 같은 걸 반쯤은 믿는 편이라, 오히려 그 쪽이 더 무서웠다. 그러나 자기 등에 업혀서 술냄새 가득한 숨을 내뱉는 사람 때문에, 무서워할 겨를이 없었다.

히데는 헤르만의 집으로 향했다. 당연히 관사로 데려갈 수는 없었다. 뒷말이 나올 테니까. 용기사는 강제로 관사 거주를 해야 했던 시절 같은 숙소에 들어가는 것과 그렇지 않을 때 그러는 건 정말 큰 차이가 있었다.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이 도이체스에서 꽤나 희귀한 홍차 애호가들이었다. 주말에 둘 다 한가하면 만나서 홍차를 마시곤 했다. 헤르만의 집으로 가는 길은 외우고 있었다.

이제 거의 다 도착해가고 있었다. 여기서 800미터만 더 걸으면 된다. 히데가 변함없는 보폭으로 걷고 있을 때, 업힌 헤르만이 작게 기침을 했다. 곧이어 히데의 어깨 앞으로 힘없이 늘어져 있던 팔에 힘이 들어왔다. 그 팔은 한동안 허우적대더니, 손 하나가 히데의 얼굴에 척 하고 붙었다.

“헤르만.”

반쯤 가려진 시야 너머를 보면서 약간 짜증스럽게 말한다. 그 손은 히데의 뺨과 입술을 스쳐 지나가더니,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손이 히데의 턱을, 목을 쓰다듬었다.

순간 그 손이 히데의 목을 세게 움켜쥐어서, 히데는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헤르만의 손이 히데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히데는 헤르만의 발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한 번 숙였다가, 뒤로 확 젖히면서 헤르만의 턱에 박치기를 했다. 손이 즉시 풀려난다.

동시에 돌아서서 헤르만이 뒤로 넘어가지는 않는지 확인. 그러나 놀랍게도 헤르만은 멀쩡하게 서 있었다. 일어설 정도로는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히데의 박치기로 정신이 혼미한 것과 공존. 히데는 팔짱을 낀 채 딱딱거렸다.

“주사가 정말, 말 그대로 개같군요. 다음부턴 절대 이따위로 술 처마시지 마십시오. 잘못하다간 사람 잡겠네.”

헤르만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히데를 바라보고 있었다. 히데를 응시하던 그가 곧 혀 꼬부라진 소리로 내뱉었다.

“죽어.”

“뭐라고요?”

“죽어, 죽어버리라고. 네가 나 때문에 잠도 못 자고 불안에 떨었으면 좋겠어. 모든 잠이 악몽이 되고,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으면 좋겠어. 네가 절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내 손에, 그렇게 죽어버려.”

비록 술에 취해 있다지만 너무나 명확하고 날카로운 증오였다.

지금 저게 나에게 하는 말인가?

순간 정말로 그런 것이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히데는 곧 눈앞의 사람이 주정뱅이인 걸 상기해 냈다.

저 정도의 감정을 평소에 히데에게 숨기는 건 불가능하다. 히데는 인간의 미세표정을 전부 포착할 수 있는 동체시력을 가졌다. 그런 히데의 눈에 포착된 헤르만은, 그녀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전우.

따라서 저 말은 헛소리.

그러나 대뜸 폭언을 들은 건 화가 났기에, 히데는 약간의 사심을 담아 헤르만의 뺨을 쳤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중위가 중령의 뺨을 때려보겠는가.

지금 정신이 제대로 들었는 지나 확인할 차례.

히데는 말했다.

“기초부터 시작해보죠. 소속이 어딥니까? 직책은?”

“제국보안본부 비밀국가경찰 방첩과 국가형사이사관.”

헤르만은 친위대의 소속명을 대더니, 멈췄다. 히데는 곧 루프트바페의 소속을 말하길 기다렸지만, 헤르만은 침묵했다.

그나저나 국가형사이사관이라, 까마득하게 높다. 히데는 이어서 질문했다.

“자, 이름이 뭐죠?”

“에리히 아벨.”

“잠깐만, 뭐라고요?”

“에리히 프란츠 지에르페트로프크람-아벨.”

헤르만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술 취한 표정인 건 확실했지만 그러했다.

아직 술이 덜 깼구나.

“이제 혼자 걸을 수 있겠습니까?”

“불행히도, 네 도움을 끝까지 받아야겠군.”

헤르만이 냉랭하게 말했다.

“···어쩌다 그렇게 마신 겁니까.”

“글쎄. 걘 덥석 가르쳐 줬겠지만, 난 아냐.”

순간 히데는 눈앞의 사람에게서 무척이나 낯선 느낌을 받았다.

하는 말의 내용과 태도 자체에 어딘가 불쾌한 위화감이 있었다.

그러나 진실에 닿으려면 너무나 터무니없는 논리적 비약을 몇 번 건너뛰어야 했기 때문에, 히데는 그 불쾌함만 안은 채 헤르만에게 다가갔다.

혼자서 걸을 수 없다는 말은 사실이었는지 헤르만은 걷는 내내 위태롭게 비틀거렸다. 히데의 키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헤르만이 히데에게 기대며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조금만 더 컸더라면.

히데는 이 작은 키가 싫었다.

이 키 때문에 모두가 자기를 어리게 본다. 그것은 헤르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이 싫었다.

그런 위태로운 행진 끝에, 그들은 헤르만의 집 대문에 도착했다. 헤르만이 손이 떨려서 열쇠를 못 꽂는 바람에 히데가 대신 열쇠를 넣어 돌렸다.

히데는 헤르만과 함께 집에 들어갔다. 이 상태라면 혼자서 침대까지 걸어갈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히데는 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새 페인트 냄새와 피 냄새를 동시에 맡을 수 있었다.

집 안은 반만 청소되어 있어서, 한쪽 벽은 새로 시공한 것처럼 말끔했고 다른 쪽 벽은 공포영화처럼 피가 튀어 있었다. 헤르만이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지려는 것을 잡아주고, 겨우겨우 침실에 밀어 넣었다.

침대에 무사히 앉은 걸 확인하고 나가려는 히데의 손을 헤르만이 붙잡았다.

“뭡니까?”

헤르만은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잡고 있었다. 보통 여성이라도 언제든지 뿌리칠 수 있을 정도로. 헤르만이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로 히데를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가지 마.”

순간, 히데가 가지고 있던 위화감이 완전히 사라졌다.

눈앞의 사람은 그 헤르만 예거가 맞았다. 그 다정한 사람이 맞았다. 아마 방금은 조금 착각을 했거나, 술에 취해 사람이 맛이 가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무척이나 연약하다.

그는 좋은 전우였다. 유능한 대대장이었다. 좋은 홍차 친구였다. 그리고 남에게 절대로 기대지 않는다. 부탁 정도는 잘 하는 편이지만, 스스로에 대해선 절대로.

히데는 그가 이렇게까지 약해진 모습을 처음 보았다. 히데는 헤르만 옆에 앉았다.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다가, 아까와 똑같은 질문을 한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마셨습니까.”

헤르만은 술을 좋아했지만, 사리분별을 못할 정도로 마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와 함께 관사에서 살았던 기간이 긴 편이니 이것만은 확실했다. 저번엔 술 너무 마시면 할 말 못할 말 다 할지도 모르니 안 할 거라고 말했던 것도 스쳐 지나간다.

“그러게.”

헤르만이 말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모르겠어.”

아까의 냉랭한 대답과는 사뭇 다르다. 헤르만이 한참을 침묵하자 히데가 물었다.

“슬픈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일?”

역시 반응이 없었고, 조금 기다린 뒤 히데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헤···르만?”

히데는 방금 자신이 본 걸 믿을 수가 없었다. 헤르만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헤르만은 이미 울고 있으면서도 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닫았다. 심호흡을 세 번이나 하고 나서야, 겨우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낸다.

“나더러 2천만을 죽이래.”

“무슨 의미입니까···?”

“일반 시민, 여자들, 어린아이들을 전부 포함한 2천만 명. 그들을 내 손으로 죽이래.”

“잠깐만.”

히데는 혼란스러워하며 말했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민간인 학살은 중대범죄 아닙니까···? 그런데 2천만이면, 누구를?”

“크라쿠프.”

한 번 말문이 터진 헤르만은 이제 멈출 수 없는 것 같았다.

“중대범죄야. 하지만 그렇게 해서까지 숨겨야 할 게 있어. 그 비밀 때문에 2천만 명을 죽여야 해. 죽이는 게 문제가 아냐. 난 많이 죽였어. 며칠 전에도 8명이나 쳐죽였다고. 하지만 그건 전부 나의 적이었어. 내가 하늘에서 폭파시킨 사람들은 전부 군인이었어. 군인은 죽여도 돼. 적은 죽여도 돼! 그게 2천만이든 몇천만이든! 죽을 각오를 했으니 죽일 수 있는 거고 죽였으니 죽을 각오를 해야 하는 거야. 그런데 민간인은 아니잖아, 시민들이 무슨 죄가 있어?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

헤르만은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별종인가? 천한 슬라브인 따위의 목숨을 걱정하는 내가? 나 또한 이종족을 돼지로 여기고 이민족을 개처럼 여겨야 하는 건가? 2천만짜리 도살이면 죄책감이 없을 테니까!”

헤르만이 울면서 히데의 팔을 붙잡았다.

“가르쳐줘. 나는 그럼 ‘평범해져야’ 해? 지나가는 아랑에게 린치를 가하고, !파라를 잠재적 폭탄인 하등생물로, 돌고래를 바다의 쓰레기로, 다른 민족을 더러운 피로 여겨야 하는 거야?”

당연히 헤르만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헤르만은 요한나 중령이 종족차별 발언을 하며 모욕을 줄 때 맞서는 사람이었다. 히데를, 알비를 이종족이 아니라 전우로 대하는 사람이었다. 최근 십 년간 급속도로 나빠진 이종족에 대한 인식을 감안하면 그는 꽤 튀는 사람이었고, 그럼에도 그렇게 살았다.

그는 아이들을 싫어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아이를 존중하고 소중히 대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시민의 싸인 요청은 거절해도 아이들이 찾아오면 해 주었다.

한 사람이 2천만의 목숨을 감당할 수 있는가? 군인이라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선에서 지휘 중인 육군 장성들의 작전에 따라 수만에서 수백만 단위의 목숨이 사라진다. 어차피 전쟁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러면 2천만의 민간인 목숨은 감당할 수 있는가?

무고한 아이들이 포함된 2천만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헤르만이 말했다.

“그런데 그런 얄팍한 명분마저 없어. 오, 물론 다른 의미에서 조국을 지키기는 하겠지. 그런데 결국 우리 잘못이었단 말야.”

헤르만이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1만 5천명은 지킬 수 있었어. 나 따위는 아주 작은 몸부림이었겠지만, 1만 5천을 지킬 수는 있었다고. 그런데 이젠 날보고 2천만을 죽이라 하네. 똑같이 무고한 사람들이야.

이 제안 자체가 함정이겠지. 아마 그럴 거야. 그런데 해도 내가 함정에 빠져 죽을지도 모르겠지만 거부하면 내가 확실히 죽어. 난 죽고 싶지 않아. 어차피 내가 죽어도 다른 사람이 해야 해. 그러니 나는 하겠지. 2천만을. 진짜 역겹네.”

히데는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이런 이야기일 줄은 몰랐다. 이렇게 엄청난 이야기일 줄은 몰랐다.

“1만 5천은 무슨 일이죠···?”

폭포수같이 쏟아진 정보 속에서 사소한 것을 하나 집어낸다. 헤르만은 허공을 바라본 채로 순순히 대답했다.

“인구 1만 5천의 도시에서 대량학살이 벌어질 뻔한 걸 막았어. 그들을 속였지. 그들을···”

갑자기 헤르만의 목소리가 선명해졌다.

“아인자츠그루펜을.”

히데는 그 단어가 엄청난 기밀 중 하나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히데는 점점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너무 많이 알아버릴 것 같아서.

그러나 도망쳐 버린다면 헤르만에겐 누가 남아 있는단 말인가? 헤르만은 아무도 없었다. 비상연락처를 줄 사람조차 없어서 히데에게 주었던 사람이다.

헤르만이 자조적인 웃음을 내뱉었다.

“걱정 마. 어차피 너희가 알아야 할 말이었어. 어차피 알게 될 말이었어. 너흰 지금부터 아인자츠그루펜 직속 루프트바페 독립대대거든. 물론 모든 사실을 가르쳐주진 않을 거야.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적어도 하나는.

나 때문에 너희들도 2천만을 짊어지게 된다는 걸.”

헤르만이 울음 섞인 웃음을 짓는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 때문에, 내 직속 대대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엮여 버렸어. 최종 폭격명령을 내리는 건 나지만 집행은 너희들이 한다. 물론 그럴듯한 명분이 있을 거야. 꺼림칙하지만 조국을 수호했으니 됐어, 정도로 넘어갈 수 있을 거야. 모든 걸 알려주진 않을 테니까.

미안해. 너에게도 말하지 말았어야 했어.”

헤르만은 그 뒤 미안하다는 말과 그 비슷한 말을 하고 또 했다. 주정뱅이의 술주정처럼. 그렇게 말하고 헤르만이 몸을 틀어 히데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눈물로 흐려진 시선이 히데에게 닿는다.

그때가 헤르만이 처음으로 히데를 바라본 것이었다. 헤르만이 냉소하며 말했다.

“이런,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죠. 술에 취하니 별게 다 보이는군요.”

“헤르만···?”

“만족해요? 나는 당신에게 도달하기 위해 어디까지 떨어질지도 모르겠어요. 너무 가혹하군요. 그래, 당신은 잔인해···”

그 말을 하고 헤르만의 몸이 기우뚱한다. 히데가 벌떡 일어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침대였으니까. 히데는 튀어나온 헤르만의 발을 올려 주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헤르만은 잠에 빠져들기 직전, 흐리멍덩한 눈으로 히데를, 그러면서 동시에 저 너머를 응시하며 무어라 속삭였다.

그것은 2천만보다 더 충격적인 것이었다.

히데는 한참 동안 헤르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갑자기 울컥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애써 삼킨 뒤 돌아섰다. 어둠 속에서 거실을 찾아가 소파에 웅크렸다.

히데가 잠이 든 것은 한참이나 뒤척인 뒤였다.

*

깨질 것 같은 두통이 나를 깨웠다.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전에 폰조가 내 주사가 사람 붙잡고 우는 거라고 했으니 또 울었나 보다. 그걸 알게 된 이후로 혹시나 남들 앞에서 울까봐 만취할 정도로 마신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제는···

아직 부연 시야로 이리저리 둘러보니 나는 신발도 안 벗은 바깥 옷차림 그대로다.

무슨 잎사귀 모양 간판으로 들어가서 술을 마셨고, 마셨고, 또 마셨고, 급성 알콜중독으로 병원으로 실려 가지 않은 게 용할 정도로 마셨고,

집에는 어떻게 온 거지?

집에 알아서 가 버리는 술버릇도 있었다. 나는 기억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흔들거리는 몸, 손에 남아있는 누군가의 손, 울음, 정말 많은 울음, 파편처럼 기억나는 횡설수설들···

그 단편을 떠올린 순간 나는 창백하게 질렸다.

“이런.”

진짜로, 정말로 술을 그렇게 마셔서는 안 됐다! 뭘 말했는지는 잘 기억나진 않지만 진짜로 나불나불 다 말했다는 건 확실하다! 그럼 그 2천만이 개죽음이라는 것까지 말했을 테고, 그러면···

난 히데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채로 비틀거리며 침실을 나섰다. 복도로 나오자 열려 있는 거실 문으로 낭랑한 목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그 ···는 악취가 나리니 ···사람들이 그 강 물 ···싫어하리라 하라.」

발을 질질 끌며 다가가니 거실의 목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티카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야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파라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호텐 사람들과 케토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들이 다 그들의 뒤를 추격하여 바다 가운데로 들어오는지라 새벽에 야와께서···」

금 간 곳에 테이프를 임시로 덕지덕지 붙여 놓은 거실 전면의 통유리벽에서 정오의 햇살이 내려쬐고 있었다. 검은 머리의 자그마한 소녀는 정원을 바라보고 있어 뒷모습만이 보인다.

몇 문장을 더 말한 뒤 암송을 끝낸 히데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말했다.

“좋은 아침. 아니, 낮인가? 그런데 여기, 토라도 없는데 어떻게 외운 거야?”

“!파라라면 창세기부터 출호텐기 정도는 외웁니다. 다행히 오늘 읽어야 할 부분은 저쪽이라서 무사히 암송을 할 수 있었지요.”

!파라들은 하루에 한 번 그들의 경전 토라를 암송한다. 그렇게 몇 달에 걸쳐 읽어나가고, 다시 창세기로 되돌아오고.

“헤르만.”

히데가 날 불러 상념에서 벗어났다.

“전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2천만을 죽이지 않을 마법 같은 방법이 있을 거라고?”

나도 모르게 빈정거렸지만 히데는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1만 5천, 무슨 일이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당신은 ‘아인자츠그루펜’을 한 번 속였습니다. 다시 한 번 더 속일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아는 헤르만 예거는 자신에게 함정을 파놓은 사람에게 그 무슨 비열한 수를 써서라도 10배 이상 잔인하게 복수합니다.”

“내 이미지가 왜 그래? 너무한 거 아냐?”

히데가 피식 웃고 말했다.

“당신은 시야가 좁아져 있습니다. 복종하고 죽이는가, 아니면 불복하고 보복당하든가.”

히데가 단호하게 말했다.

“선택지를 그렇게 한정하니 절망할 수밖에요. 하지만 선택할 수 있는 게 하나 더 있습니다. 그들을 속이는 거죠. 다시 한 번.”

“···속인다고?”

“그렇죠. 아직 백기를 들기엔 이릅니다. 최선을 다해야죠. 아직은.”

그 뒤로 히데와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본의 아니게 숙취해소를 홍차로 하면서, 다과로 점심을 때워버린 뒤 해가 뉘엿뉘엿할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히데가 일어서며 말했다.

“당분간 볼 일이 없겠군요. 조심하십시오.”

“너도.”

그렇게 담백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술을 마실 때만 해도 세상이 끝나는 것 같았는데, 하나의 희망을 더 찾았다. 히데가 아니면 불가능했겠지. 보답하는 길은 이걸 성공시키는 수밖에 없다.

월요일이 되자 나는 알프리다 소령을 불렀다. 주말 사이에 내 소속 변경은 은밀하게 완료되어 있었다. 명분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알프리다 소령에게 아인자츠그루펜이 정확히 뭐 하는 곳인지는 생략해 버리고 아주 단편적인 정보만 알려 주었다.

“검정급의 기밀임무다. 이걸 모든 대대원에게 숙지시켜야 해.”

알프리다 소령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소령은 살면서 만날 일 따위 없을 보안등급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대를 직접 통솔할 수 없는 상황이야. 그러니 네가 임시로 우리 대대를 이끌어라. 편대장들 중에선 네가 가장 유능하고 경력도 기니까.”

바짝 긴장한 알프리다 소령에게 말한다.

“알프리다 하브너 소령.”

“예.”

알프리다 하브너 소령은 유능하지만 딱 하나 결점이 있었다. 사실 그건 내 입장에서 결점이 아니었지만, 알프리다 소령은 현재 도이체스가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쪽으로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사실 경력과 실적만 봐선 중령이 될 법도 한데도 계속 소령으로 된 것도 그것 때문.

따라서 실질적으로 이번 임무에 가장 반발할 만한 인물이다.

나는 알프리다 소령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그날 명령을 딱 하나 내릴 건데, 그게 무엇이든지 딱 한 번만 내 명령에 따라줘.”

알프리다 소령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날 내릴 명령이랄 게 뻔하니까. 오직 알프리다만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날, 거행일이 되는 순간 나머지 편대장들과 대대원들은 비로소 알게 되겠지.

“정말, 부탁이야. 꼭 명령대로 따라줘. 나를 믿고, 나라는 인간을 믿고, 반드시.”

원래 상관이 명령하면 해야 하는 게 군대다.

그러나 알프리다 소령의 성격이라면 하극상을 일으키는 것도 가능하다. 그래선 안 돼. 그러니 진짜 간곡하게 부탁한다.

그렇게 다짐해두고, 나는 계획을 차근차근 준비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아인자츠그루펜을 속일 계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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