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너는 용이 되어-52화 (52/102)

3권 2장. 흔적들, 그리고 앞으로도-(4)

산더미같이 쌓인 일을 끝내자마자 우리는 훈장 수여식 준비를 해야 했다. 본부에서 조촐한 행사로 치르거나 아니면 그냥 상관을 통해 전달해주기만 했던 이전과는 달리, 베르논 황태자가 끼어들면서 규모가 세 배는 불어나 버렸다. 일개 친위대 장교가 친위대 장성에게 훈장을 받는 것과 황태자에게 받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이미 알현의 범주에 들어선다.

황궁에 들어가는 건 처음이었다.

친위대씩이나 되어서, 공주와 친한 사이인 주제에 무슨 소리냐 싶지만, 정말로 처음이었다. 우리는 황궁과 수도를 수호하는 친위대 병력이 아니라 경찰이자 첩보원이었다. 카이저에게 보고하거나 회의에 참석하는 장성급 인사가 아닌 이상 게슈타포가 황궁을 얼쩡거릴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우리는 이텔을 ‘알현’한 적도 없었다. 이텔과 마주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이텔이 자진해서 사관학교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딱히 황궁을 보고 싶다는 욕심은 없었기 때문에 아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혹시나 황족을 알현하게 된다면 그 대상은 이텔이었으면 하고 바랐기 때문에 우리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에리히는 완전히 저기압이었다. 지금 황궁에 가봤자 이텔은 없기 때문이다. 이텔은 전쟁의 한복판에 머무르고 있겠지.

시시콜콜한 구닥다리 예절을 열심히 되뇌면서 광장으로 향한다. 고위 공직자들, 이를테면 클로리스 슈타인의 아버지 같은 사람들과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대장

한 명, 어제 귀항한 해군 제독 한 명, 육군은 지금 동부전선을 신경 쓰느라 중장급 인사만 한 명, 그리고 열심히 셔터를 눌러댈 기자들.

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훈장을 받는 것이다.

대부분 도이체스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몇몇을 제외하고는 우리의 가장 훌륭한 업적—프랑크의 암호체계를 입수한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2계급이나 특진한 대외적인 이유론 이 훈장을 받기에는 살짝 부족할 텐데, 다행히 내가 하늘에서 사람을 너무 많이 죽인 탓에 그럭저럭 납득할 수준이 되었다. 나는 하늘에서의 공적만으로도 저 훈장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용을 폭파시킨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다다르자 이 자리에 없는 히데가 생각났다. 하늘만의 공적으로 이 훈장을 받을 수 있다면 히데는, 정말로, 당연히 내 옆에 함께 있어야 했다. 이미 보통의 기준치를 나정도 수준으로 아득하게 넘긴 사람은 전 세계에 두 명밖에 없었다. 히데, 그리고 프랑크의 초 에이스 용기사 소피 라리보. 그런 히데라면 받아야 했다. 히데라면.

그러나 !파라를 위한 훈장은 없다. 내가 중령까지 진급하는 동안 히데는 여전히 중위. 특히 베르논이라면, 절대 !파라 따위에게는 훈장을 주고 싶지 않을 것이다.

“왜 그렇게 넋을 놓고 있어.”

우리 사관학교 동기 폰조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우리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영예를 얻게 되어서 아직 믿기지가 않았어.”

폰조는 나와 같은 게슈타포 친위대지만 전쟁이 진행되고 난 뒤 보니 황궁 및 수도방위사령군 친위대 소속이 되어 있었다. 그쪽 소속의 인원이 한 명은 나와 동행해야 했는데 폰조가 자원했다. 내가 루프트바페로 끌려간 이후부터 죽 만나지 못했으니까. 폰조가 말했다.

“엄청난 영광이긴 하지. 하지만 놀랍지는 않아. 넌 학생 시절부터 진짜 난 놈이었어.”

“내 학생 시절은 그렇게 튀지는 않았지. 프레드 쪽이 진짜 천재였지 않아? 걔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한데.”

“프레드는 전역했어. 걔 같은 천재를 담아두기엔 군대가 너무 좁았나보지. 난 그런 종류의 것을 말한 게 아니야. 그냥 느꼈다. 너 말하는 거랑 행동하는 거 보면, 적어도 암투에 휘말리는 게 아니라 휘어잡겠구나, 하는 걸. 벌써 연대지도자까지 올라갈 줄은 몰랐지만.”

“낯간지럽게 그런 말은 그만 해. 그런데 그러게. 이 나이에 연대지도자라니. 육군에는 좀 흔한 거 같지만.”

“육군은 잊어버려. 그 동네는 실시간으로 사람이 죽어나가는 데잖아. 최후방의 게슈타포가 이렇게 단숨에 올라오긴 힘들어. 찾아보니까 넌 역대 두 번째로 젊은 연대지도자야.”

“그럼 나보다 더 빨리 연대지도자를 단 사람은 대체 누구야?”

“아마 죽고 나서 올라갔을걸. 그나저나 친위대 쪽 사람은 누가 올까? 내 생각엔 지금 좀 한가한 수도방위사령군 사령관님이 올 거 같은데.”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훈장을 받을 준비를 했다.

“왕족이 직접 훈장을 수여하는 건 이번 세기 들어서는 네가 처음이야. 뭔가 역사의 한 장면에 있는 기분인데.”

“이 전쟁의 모든 순간이 역사가 될 거야. 폰조, 너도 지금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사람이고.”

폰조는 뜻밖이라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곧 씨익 웃었다. 그 말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이후 나는 예법대로 경례를 올리며 베르논 황태자를 처음 마주한다.

이텔은 카이저를 많이 닮았다고 했고 베르논은 오래 전에 서거한 황후와 많이 닮았다고 했다. 그렇게 두 남매는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이텔은 냉랭한 기운이 물씬 풍기는, 싸늘한 인상의 미녀다. 사람들이 쉽사리 다가갈 수 없고, 주눅이 드는 모습이다. 하지만 베르논은 달랐다. 신문 등에서 사진을 봤지만 실제로 보니 더 따뜻한 인상의 남자였다. 유약해 보이진 않는 단단한 부드러움. 이런 자가 황위를 물려받는다면, 누구나 납득할 만한 분위기. 아마 국민에게 크나큰 지지를 받는 카이저가 될 것이고, 지금도 이미 선동과 웅변술로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럼에도 둘은 남매라고 부를 수 있었다.

베르논이 짤막하게 연설을 했다. 핵심만 간단하게, 그러나 강렬한 연설. 군중이 이 고위직들이 아닌 대중이었다면 더더욱 광적인 열광으로 몰아넣었을 그런 연설. 그 뒤 베르논이 훈장을 수여하고, 기자들이 그걸 찍고, 대외용 미소를 계속 유지한 채 행사를 마쳤다.

경례를 다시 하고 폰조를 따라 나가려는 순간, 베르논이 우리를 불러세웠다. 약식 경례를 올리자 베르논이 말했다. 나와 식사를 하고 싶다고. 호위도 물리고 단 둘이. 그러자 경호대장 쪽이 이의를 제기했다.

“어차피 방 밖에서 지키고 창문 너머에서 지켜볼 텐데 무엇을 그리 걱정하는지? 그리고 도이체스를 수호한 영웅이 허튼 짓을 할 것 같나?”

결국 베르논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우리는 그와 단 둘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 체할 것 같았다. 황족과 독대했다는 긴장감이 아니라, 적의를 잘 갈무리해 가면을 쓰는 게 힘들었다.

“전부터 꼭 만나보고 싶었네.”

베르논이 우아하게 요리를 포크로 찌르며 말했다. 우리가 머뭇거리는 걸 보고 베르논이 말했다.

“편하게 들게나. 예법을 익힐 시간이 없었다는 건 알고 있어. 그걸로 흠 잡지 않을 테니.”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우리도 비로소 식사를 시작했다. 이 식사가 끝날 때까지 과연 무슨 말들이 오갈까? 서로가 속에 비수를 숨긴 채 작고 세련된 전쟁을 벌이지 않을까?

“편하게 불러도 괜찮은가?”

“송구합니다, 전하.”

“그럼, 사양 않지. 헤르만, 자네도 편안하게 불러도 좋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내 누이와 꽤 막역한 사이라 들었지. 이텔에게도 그리 격식을 갖춰 부르는가?”

“알겠습니다, 베르논 전하. 영광으로 삼겠습니다.”

“무얼. 세계 최강의 에이스가 이번 세기에 나온 걸 우리가 영광 삼아야겠지. 나는 하늘을 좋아했어. 설령 내가 갈 수 없다고 해도 말이지. 자네는 그런 모든 소년들의 꿈을 이뤄준 거라네.”

그 말을 하는 베르논의 벽안이 순간 이상야릇하게 번득였다.

그 뒤로 베르논은 정치 이야기, 전쟁 이야기, 경제 이야기 등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는 도이체스 제국의 제일가는 선동가이자 정치인이었다. 그의 식견은 무척 넓었고 우리는 겨우겨우 그의 수준에 맞춰서 대화할 수 있었다. 사실 거기다 더해서 베르논, 파시즘의 수장을 거스르지 않을 대답을 신중히 골라야 했다.

요리를 다 먹었지만 베르논은 우리를 놓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결국 정원을 함께 걷자고 제안했다. 거절할 수는 없었다.

“이종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파라의 테러행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나온 주제였다. 우리는 대답했다.

“기묘한 것들이지요. 돌고래는 딱 한 번만 봐서, 그리고 격리구역에서 나오지를 않으니 잘 모르겠습니다.”

“아랑은?”

“불결한 족속들이지요.”

좋아, 정답을 말했다. 베르논이 웃으며 물었다.

“그런가? 자네 편대에도 아랑이 있지 않나. 그리고 슈퍼 에이스이기도 하지.”

우리는 이종족 등록법을 제정하고 결혼금지령을 입법한 장본인이 저렇게 말하는 것이 너무 가증스러웠다. 그러나 절대 내색은 하지 않고 말했다.

“그녀는 혼혈입니다. 고귀한 게르만인의 피가 섞였기에, 그나마 참아낼 수 있는 거지요.”

“그럼 파라는 어떻게 생각하나?”

“아름답고 강한 종족이죠. 전사가 될 운명을 타고난 이들 같습니다. 저는 주로 전장이 전장이다보니 그 시력에 감탄하게 되지요. 다만 생각하는 게 좀 이상합니다.”

“헤르만.”

여전히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 호의 말고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다.

“진짜로,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아마 베르논 정도 되면 우리의 언행은 낱낱이 조사했겠지. 굳이 아인자츠그루펜을 예로 들지 않아도 이종족 혐오의 선두에 서 있는 게 친위대다. 그 중에서도 게슈타포는 심한 편. 그리고 우리는 ‘완벽한’ 게슈타포로서 행동해왔다. 좀 더 신중히 말을 고른다. 그러다가 끄집어 낸 어느 하나의 기억.

우리는 말했다.

“그들은 노예의 도덕에 사로잡힌 족속들입니다.”

순간 처음으로 베르논의 평정이 깨졌다. 베르논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그 말을 어디서 들었나?”

“이미 답을 알고 계신 것 같지만, 공주님에게서입니다.”

“하,”

베르논은 잠시 헛웃음을 내뱉더니, 이윽고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정말 유쾌하다는 듯이.

“하, 하하! 그 말을, 지금 자네에게서 들을 줄은! 그때의 흔적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한참을 웃던 베르논이 웃음을 뚝 멈추고 우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자는 감당할 수 없는 광기를 지녔다고.

계속 우리 눈을 바라보던 베르논은 딱 한 마디만 덧붙였다.

“헤르만, 내 누이와 정말 친한가 보군.”

그리고 절묘하게 정원 산책이 끝났다. 그러나 우리가 갈 곳은 집이 아니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방금 우리는 시험 하나를 통과했다고.

베르논도 더 이상 말을 빙빙 돌리지 않았다.

“자네, 아인자츠그루펜은 알고 있지?”

우리가 긍정하자 베르논이 말했다.

“드라헨킨더라고, 들어 봤나?”

그 순간, 에리히는 평생에 걸쳐 가장 혼신을 다해 표정연기를 했고, 우리는 전혀 못 알아들은 듯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었다.

“용의 아이 말입니까? 하지만 새끼용이라는 의미로 말씀하시지 않은 것 같군요.”

“그렇지. 새끼용 따위가 아니지. 드라헨킨더는 앞으로 창조해 낼 신인류니까.”

그 뒤 베르논은 드라헨킨더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마법을 부릴 수 있는 인류. 모든 지적 생명체의 정점에 서서 지배할 인류를 만들기 위한 실험. 마치 고대의 용처럼, 신과 가까운 그 존재처럼. 실험 장소는 여럿 있으나 가장 큰 게 크라쿠프에 세워 둔 실험실이다.

크라쿠프는 도이체스에 딱 붙어 있는 작은 나라로, 나라 전체의 크기가 도이체스의 주 하나 정도의 크기가 된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가장 먼저 점령되었으며 위치상 후방이라서 다른 나라에게 뺏길 일도 없는 나라. 현재 도이체스가 원래 수상을 쫓아내고 새로 임명한 수상이 나라를 통치 중이다. 한마디로 괴뢰정권. 그들은 게르만족, 그것도 순혈주의를 부르짖는 게르만족 국가에게 점령당한 슬라브족이라 온갖 고초를 겪고 있다.

“‘실험재료’를 조달하기 쉬워서 말이지.”

베르논이 덧붙였다.

당연하지만 실험재료는 인간 여자, 그것도 여자아이가 주일 것이다.

아인자츠그루펜 중 극히 일부가 바로 이 실험에 관여하고 있다. 하지만 도중에 문제가 생겼다.

“실험체 하나가 폭발했어. 거의 완성 단계에 있는 실험체였는데 결국 터져버렸지. 문제는 신체에 마력을 주입하고 있을 때 사고가 나는 바람에 거의 용 두 마리 분의 마력이 크라쿠프 전역을 휩쓸었어. 딱 범위도 크라쿠프까지.”

“마병···”

“그렇지. 크라쿠프의 전 국민이 마병에 걸릴 위험이 높아졌다.”

마력에 대량으로 노출되면 신체에 이상이 온다. 사실 보통은 흔적도 없이 소멸하거나 죽어버리지만 일부 생존자가 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원인불명의, ‘마병’에 신음하다 죽는다.

“곤란하게 되었지. 그게 마병인 게 밝혀지는 순간 끝이야. 결국 마력의 출처에 대해 해명해야 하겠지. 게다가 그 틈을 타 실험체가 하나 더 탈출했다. 마찬가지로 거의 완성 단계에 있었던 실험체였지. 일단 국경봉쇄로 탈출은 막았다. 아직 크라쿠프 안에 있어.”

베르논이 말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루프트바페가 필요해. 그리고 게슈타포가 필요해. 아인자츠그루펜만으로는 무리다. 그들은 살육 혹은 연구에 특화되어 있지 추리와 수색에 능하지 않아. 난 이 나라에서 가장 수사를 지독하게 하는 게슈타포가 필요해. 그리고 그 게슈타포는 아인자츠그루펜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그 인재가 저라고 생각하시는군요. 탈출한 실험체, 완성 직전의 귀중한 실험체를 회수하는.”

분명히 그 전에 나에 대해 뒷조사를 했겠지. 나는 친위대 안에선 특별히 언행에 신경을 썼다. 도이체스가 그려내는 이상적인 사상을 가진 게르만인의 표본이 되도록. 더 정확히는, 현 카이저와 노선을 함께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루프트바페에서는 조금 달랐다. 나는 히데와 알비에게 평소처럼 대했다. 하지만 우리 비행전대에서 이종족은 그들 둘 뿐이었고, 내 행동은 전우를 향한 특별한 예외 정도로 취급될 수 있었다.

베르논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지. 게슈타포 무리를 투입하면 간단하게 해결되겠지만, 더 이상 친위대 내부에서 아인자츠그루펜을 더 알아서는 안 돼. 특히 친위대는 절대. 그 점에서 게슈타포이면서 우연히 아인자츠그루펜을 도왔던 자네가 적격이지.”

『공백』은 내가 열 살 때 내가 살았던 지역에서 도이체스가 실행했을 드라헨킨더 실험과 관련 있다. 모종의 이유로 그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을 제거해 입막음을 했고, 우나 브라운의 변덕으로 오직 나만이 살아남았다. 따라서 분명 우나 브라운은 『공백』에 관여했다.

베르논은 현재 들어서 드라헨킨더 실험을 진행하려 한다. 하지만 친위대에 알리는 걸 극도로 꺼리고 있다. 우릴 납치하려 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에 대해 그 어떤 간섭도 안 하는 브라운이지만 우릴 실험체로 쓰는 것까지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했던 맹세가 있으니까.

우나는 황태자를 방해할 순 있어도 거스를 순 없다. 따라서, 이건 열 살 때의 『공백』과는 완전히 양상이 다르다. 그 땐 우나가 총책임자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총책임자라면 그녀 몰래 나를 실험체로 쓰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니까.

따라서 이 두 가지의 실험은 단절되어 있다. 베르논의 주도 아래, 황권으로 획득했을 일부 세력만 가지고 진행하는 것. 친위대에 베르논만의 사조직이 있겠지.

우리가 상대해야 할 악이 둘이나 있다는 뜻이다.

“친위대만 특별히 안 된다면, 타군의 일부가 아는 건 괜찮습니까?”

“그건 어쩔 수 없어. 일단 친위대가 아는 것보다는 낫고, 무엇보다도 그 ‘일부’는 알 수밖에 없어. 알아야만 임무를 수행할 수 있으니까.”

“루프트바페로서의 저도 원하십니까?”

“루프트바페에서 한 대대를 운용하고 있는 대대장으로서의 자네 또한 원하지.”

수수께끼 문답 같은 말에 우리는 생각에 잠겼다.

우선 명백한 임무는 탈출한 실험체를 잡아 오는 것. 동시에 크라쿠프인들이 마병에 노출되었다는 걸 절대 국제사회에 알리지 말 것. 그리고 루프트바페가 필요함.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전력 한 대대가 필요함.

그리고 베르논 같은 자가 낼만한 해결책이라면.

“크라쿠프의 총 인구수는 2천만 명.”

그렇게 중얼거린 뒤, 우리는 심호흡을 한다. 어제 의사에게 하소연했던 것들이 우스워질 정도였다. 신념이 있으면 인간은 저렇게까지 변할 수 있는가. 우리는 도대체 무슨 괴물을 앞에 두고 있는가. 우리는 조용히 베르논 황태자의 눈을 바라보다가, 묻는다.

“2천만 명만 죽이면 되는 겁니까?”

군인, 일반 시민, 아이들 같은 민간인을 전부 포함한 모든 인원을.

베르논이 웃었다.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