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2장. 흔적들, 그리고 앞으로도-(3)
나는 루프트바페의 일정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이 마무리하고 기지를 나섰다.
보통 나는 친위대 일과 용기사의 일을 병행하고 있다. 용기사로서 출전을 마치고 귀환하면, 혹은 출전을 안 하는 날엔 그날 저녁 친위대 일을 마무리한다. 이중보직을 지닌 군인은 더러 있었지만 나처럼 양쪽 일을 거의 다 해내는 사람은 드물었기에 나는 양쪽 다에게서 월급을 받았다. 루프트바페에서는 전액, 친위대에서는 80퍼센트. 내 건강을 지키는 선에서 멈추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마저도 충분히 과로하고 있는 셈이었지만 나는 친위대 쪽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정보에서 더 멀어질 테니까.
하지만 내 몸은 한 개니까 현장에서 뛸 수는 없었고, 통신으로 야간 교대조를 지휘하는 선에서 그치고 있었는데, 어느 날은 그래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 루프트바페에 양해를 구하고 출동을 했다. 그리고 거기서 엄청난 것을 건져버렸다.
프랑크 공화국의 암호체계.
도이체스가 에니그마를 털린 것과 같은 급의 일이다.
프랑크의 첩자로 추정한 인물들을 급습했고, 그들은 진짜로 프랑크의 첩자였다. 이후 나는, 아니 에리히는 오랜만에 직접 고문에 나서서 프랑크의 암호체계를 모두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전국 각지에 흩어진 첩자 여럿을 잡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그들의 진술을 전부 조합해 하나의 완성된 작품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루 만에 벌어진 일이어서 프랑크 쪽은 이상을 알아차릴 수도 없었고, 우리는 그 첩자들을 전부 자연스럽게 처리했다.
이렇게 도이체스는 프랑크의 암호체계를 쥐게 되었다.
현재 전세는 도이체스에게 유리하게 기울어 가고 있으며, 연합국은 도이체스에게 빼앗긴 아르텐 대륙의 영토를 탈환하려 시도했으나 모두 비참한 실패로 끝났다. 이제 대항세력은 프랑크 및 프랑크에 망명한 연합군 임시정부들과 동부의 키예프밖에 없었다. 실낱같은 등불이지만 그럼에도 엄연한 전선이었기에 지금은 약간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데, 실마리를 우리가 찾아낸 것이다.
물론 다른 핑계를 대주긴 했지만, 나는 그 공로로 연대지도자까지 승진했다. 소령급 인사가 바로 대령급으로, 장성 바로 아래의 직책까지 승진한 것이다. 사실 상부는 3계급 특진을 주고 싶어 했지만, 살아 있는 사람에게 2계급을 초과하는 특진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연대지도자에서 그쳤다.
거기에 덧붙여 루프트바페에서도, 우리 대대가 야간순찰을 돌다가 아르텐 대륙 탈환작전을 준비하는 연합군을 발견하고 선발대를 털어버린 뒤 귀환했기 때문에 이쪽 공로도 추가. 그동안 군복 상의가 무거울 정도로 훈장을 받아 왔지만 이번에는 나에게 최고 등급의 훈장을 주려고 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훈장.
이 훈장수여식 때문에 내 일정은 말 그대로 개판이 되었고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일주일가량은 루프트바페에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사실 일주일간의 정신과 상담 일정만 없었어도 어떻게 맞출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델 대장은 정말 완고했다. 어떻게 친위대에 손을 써서까지 나에게 그 처방을 강권하고 말았다.
옷을 갈아입을 새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긴 트렌치코트 하나를 위에 걸치고 병원으로 갔다. 처음부터 모자도 없는 불량한 차림이었기 때문에 친위대 옷인 게 티가 나지 않았다.
간호사에게 예약했음을 알리고 잠시 대기실에 앉았다.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가만히 앉게 되자 마음이 심란했다.
설마 라인스가 만난다고 한 사람이 한스 윈터일 줄은 몰랐다. 그리고 거기서 내 목소리를 기억해 낼 줄은, 아니, 그건 당연한 일인가. 그가 한스 윈터인 걸 알자마자 전속력으로 도망쳤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숱하게 고문한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일 뿐이었고, 거의 뒷모습에 가까운 옆모습만으로는 도저히 미리 알아볼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발작을 해 버렸고, 그 광경은 고스란히 라인스가 봐 버렸다.
어쩌면 이미 예정된 결말이 아니었을까.
라인스 윈터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한스 윈터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라인스가 한스에게 내 이야기를 안 했을 리가 없다.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쥐고 있으니 어느 한쪽이 다른 한 쪽을 국가에 넘겨버릴 일은 없겠지. 하지만 그 다음엔 무슨 행동을 할까.
생각이 뻗어나가는 동안 간호사가 나를 불렀다. 들어가라는 신호였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의사는 백발과 갈색머리가 반쯤 섞인 머리카락을 단발로 자른 노년 여성이었다. 테 없는 동그란 안경 때문에 눈이 커 보이는 걸로 보아 노안이다. 키는 히데 정도로 자그마했지만 허리가 굽은 건 아니었다. 인상은 부드러웠다. 그녀의 얼굴에 각인된 주름은 전체적으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 방은 특이하게도 간이침대와 의자 한 세트, 그리고 안락의자와 테이블이 같이 있었다. 태동한 지 얼마 안 된 정신의학은 분파가 여럿 나뉘었는데 환자를 눕혀 최대한 편하게 만든 뒤 이야기해야 한다는 파와 의자에 앉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대화해야 한다는 분파가 있었다. 이 방은 그 둘의 절충안인 것 같았다.
“어서 오세요, 예거 씨. 저는 뵐러입니다.”
의사의 목소리는 여자치고는 저음이었다. 나는 외투를 벗어 안락의자에 걸쳐놓은 뒤 그녀와 마주보며 앉았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미리 알고 계신 것 아니었나요?”
“경찰 직속 병원이었다면 알았겠지만, 예거 씨는 여러 개의 병원 후보 중 여기를 고르셨죠? 제 입장에선 국가가 정신상담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분을 할당해 준 것만 알 수밖에 없어요. 직접 말씀해주시는 수밖에요.”
납득한 나는 순순히 이야기했다.
“저를 암살하러 온 8명을 전부 죽였고, 그 일로 충격을 받았을 테니 일주일간 상담을 받으라고 상관이 보냈죠.”
뵐러는 내가 8명을 죽였다고 말해도 별로 놀라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으음, 하는 소리를 내고 끝이었다. 하긴, 정신과 의사란 작자들은 다 그랬다. 환자를 최대한 자극하지 않으려 한다.
“상관이 보내지 않았더라면 여기 오지 않았을 것 같나요?”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그럴 거예요. 충격을 안 받은 건 아니에요. 이런 식으로 암살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으니까요. 전부 훈련받은 사람들이었어요. 8명 전부가. 혼자서 그들 모두와 싸워 이긴 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죠. 누가 나의 목숨을 노린다, 그것만으로 충분해요. 충격은.”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뵐러는 정신과 의사 특유의, 전혀 시시비비를 가리려 하지 않는 건조한 말투로 질문했다.
“내가 살아야 하니까 죽였죠. 그뿐이에요.”
뵐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트에 무언가를 적었다. 다 휘갈겨 쓴 뵐러가 말했다.
“여기엔 친위대 분들도 많이 와요. 물론 남들에게 들키지 않게 매우 평범한 복장을 하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다른 구까지 와서 상담을 받죠. 혹시 이전에도 상담을 받아본 적 있나요?”
“있어요. 5살에서 10살까지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서. 저에겐 중요한 기억이거든요.”
그리고 죄다 실패했다.
“살인은 이번이 처음이신가요? 여기서 말한 내용은 절대 새어나가지 않습니다. 법률로 보장되어 있어요.”
무심코 네, 라고 대답하려다 멈췄다.
“아뇨. 나는 처음이에요.”
“‘나’에 유달리 강세를 두셨군요. 보통은 그러지 않죠. 그럼 다른 분은 처음이 아닌가요?”
내 말을 예리하게 집어낸 뵐러가 물었다. 저 무해해 보이는 외견에 방심했다. 저들은 게슈타포와는 다른 의미의 전문가이다.
“다른 분 이름이 뭐죠?”
“···에리히 아벨.”
“아벨 씨는 충격을 받았나요?”
“모르겠어요. 나는, 나는···”
나는 얼굴을 감쌌다.
“모르겠어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아. 뭔가를 느껴야 할 거 같은데, 그래야 할 것 같은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이 절 무서워하는 눈을 볼 때마다 내 안의 충격을 찾아내려 하지만, 없어요. 나는 누구보다도 괜찮아요. 그 사실이 더 거슬려요.”
“죽이면서 혹시 즐거웠나요?”
“아뇨!”
“혹시 한 명 한 명, 어떻게 죽었는지 말해줄 수 있나요?”
내가 8명 짜리 설명을 끝마치자 뵐러가 말했다.
“제 의견으로는, 예거 씨는 분명 충격을 받았어요. 7번째 남자 이야기를 보면요. 계속 입을 찌르셨다고 그랬죠? 계속, 계속. 그런 건 사람 죽이는 게 즐겁진 않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 사람이 할 만한 반응이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 죽이는 건 엄청난 감정이 집약된 거예요. 예거 씨의 감정은 억압되어 있어서 드러나지 않은 거예요.”
“의사들은 다 똑같은 소리를 하는군요. 억압된 무언가. 어린 시절의 기억도 다 내가 억압해서 그런 거라고 말했죠.”
내가 냉소적으로 대꾸하자 뵐러가 말했다.
“글쎄요, 그건 제가 그 주제에 대해 예거 씨와 이야기를 나눠봐야 알겠군요. 그건 다음에도 충분히 얘기할 수 있죠. 일단 이 주제를 볼까요? 억압된 감정은 사라진 게 아니에요. 그건 어느 날 전혀 다른 가면을 쓰고 뚫고 나와요. 그건 통제할 수 없어요. 미리 알아내어서 직시해야 그것을 다루고 받아들일 수 있죠.”
나는 지금까지 만났던 그 어떤 의사보다도 뵐러가 믿음직하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통제감을 유지하고 싶다면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은 지금 꺼내보는 게 나아요.”
뵐러는 나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통제감. 내 손에 닿는 것만은 전부 통제하고 싶어 하는 욕구.
그래서 나는 뵐러가 최면 치료를 요구했을 때 순순히 응했다. 아마 이번에도 실패로 끝날 거라 생각하면서.
내 삶은 억압일 수밖에 없다. 너무 많은 비밀을 숨기며 살았으니까. 그 비밀들 중 일부가 내 억압에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최면에 걸려도 그 사실은 절대로 말하지 않겠지. 결국 내가 보여주는 건 나라는 인간의 20퍼센트에 불과하고, 그것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뵐러는 조금 더 편안해서, 그 20퍼센트만으로도 무언가 해낼 것 같은 믿음을 주었다.
내가 간이침대에 눕기 전 뵐러가 물었다.
“혹시 최면에 걸릴 수 있는 체질인지 아나요?”
“제가 원하면 걸릴 수 있습니다.”
“그게 제일 중요하죠.”
뵐러는 나에게 최면을 걸었고, 그 뒤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한참 후 각성되어 최면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뵐러에게 물었다.
“왜 기억도 인식도 되지 않은 거죠?”
최면상태에서도 외부자극을 인식할 수 있고 그동안 일어난 일을 기억할 수 있다. 나는 뵐러와 몇 번 이야기를 나누고 갑자기 의식이 끊겼다. 그리고 최면에서 각성된 때가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 차려보니 침대 위가 아닌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런 현상은 처음이었다. 설마 그 사이에 중요한 걸 나불대지는 않았을까? 뵐러가 말했다.
“그건 예거 씨에게 다른 인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 해봤을 때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에리히가 나선 모양이군요.”
에리히가 뵐러와 무슨 말을 했을지 궁금하다. 그걸 질문하려는 찰나 뵐러가 말했다.
“아니요. 에리히라는 분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른 분들이었죠. 혹시 해리성 정체감 장애라고 들어 봤습니까?”
“···2개 이상의 인격을 가진 저 같은 사람을 일컫는 전문용어 아닙니까?”
“그래요. 학계에 보고된 사례가 적어 아직 모르는 게 많지만, 대체로 5개 언저리 혹은 그 이상의 인격이 몸에 있죠. 그 인격들은 다시 주인격과 부인격으로 나뉩니다. 부인격은 주인격의 기억을 받지만 주인격은 부인격의 기억을 몰라요. 그래서 갑자기 시간을 건너뛴 듯한 느낌을 받죠.”
“하지만 나는 에리히와 기억을 공유하는데···”
“그게 신기한 점이에요. 그런 사례는 아직 못 봤거든요. 연구가 많이 필요한 분야이긴 하지만요. 우선 에리히라는 분까지 포함시키면 당신 몸 안에 있는 인격은 헤르만 예거, 에리히 아벨, 프리다 아커만, 한스 슈마허, 프란츠로 총 다섯입니다.”
“···프리다?”
프리다 아커만? 왠지 귀에 익은 이름이라 반문한다.
“10살 소녀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렇게 에리히와 몸과 기억 모두를 공유하는데 자각조차 못한 것들이 나의 인격이라고 주장하다니. 내가 에리히와 어떻게 몸을 공유하는지 설명하자 뵐러가 말했다.
“그게 흥미로운 점이에요. 일단 에리히는 가장 강력한 부인격인데 ‘헤르만’과 완벽하게 한 몸을 공유하죠. 이건 마치 헤르만 예거와 에리히 아벨 이 두 인격이 공동 주인격으로 존재하고 나머지들은 부인격인 것으로 보여요. 그러면 지금까지 눈치 못 챘던 것이 설명되죠. 둘 다 주인격이었으니까.”
“고칠 수 있습니까? 에리히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에리히와 나는 친구보다도 훨씬 가까운 자기 자신이자 동맹이었다. 내가 이 몸을 강력하게 붙잡고 있으면 에리히가 나오는 건 거의 불가능한데도 기꺼이 몸을 내주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이 외로운 사투에서 미쳐버리지 않은 것은 아마 에리히와 이텔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은 필요 없다. 게다가 난 그 부인격들이 행동할 때 기억을 물려받지도 못한다. 이 몸을 10살짜리 어린애가 휘두르는 꼴은 싫다.
내 몸은 내가 통제하고 싶다.
뵐러가 대답했다.
“지금 당장은 힘들어요. 정신분석학 그 이상의 과학적 방법론이 성립된 지 60년도 되지 않았어요. 그 중에서도 해리성 정체감 장애 환자는 극히 적어요. 도이체스 전역에서 긁어모아야 겨우 통계 경향성이라도 내볼 만큼 모여요.
하지만 공통 원인은 밝혀졌죠. 유년기의 트라우마.”
내가 그동안 생각해오던 원인과 거의 흡사했다.
“보통의 정신으로는 견딜 수 없는 학대, 폭력, 특히 성폭력 등의 충격을 받고 일부 발병돼요. 그 트라우마를 치료하면 실마리가 보일 지도 모르죠.”
“···제 가족은,”
그 말을 한 순간 갑자기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엄마’는, 병으로 죽었던 게 아니었어. 날 데리고 같이 자살하려 했다. 지나가는 행인이 날 낚아채 목숨을 건졌지만 엄마는 자살에 성공했고, 그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날 데리고···”
갑자기 시야가 확 좁아지면서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호흡이 틀어막혔다. 누군가가 심장을 쥐어짜내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마다 옛날 기억들이 플래시를 터뜨리는 것처럼 번쩍, 번쩍 뇌를 찢어내며 관통.
뵐러가 벌떡 일어서더니 종이봉투 하나를 꺼내 내 입과 코를 막았다. 이 상태로 숨을 쉬라고 해서 쉰다. 점차 원래대로 돌아올 무렵 뵐러가 봉투를 뗐다.
봉투를 치우고 앉은 뵐러는 또 다시 차트에 뭔가를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거슬렸지만 할 수 없다. 그게 그들의 일인 걸.
“아무튼, 원래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니고, 제가 가족으로 여기던 사람은 무참하게 죽었습니다. 그 뒤 지금의 어머니가 절 입양했어요. 이것 때문일까요? 모르겠어, 사실 가족들이 죽는 순간을 보기는 한 건지 모르겠어···”
“영향이 클 거예요.”
뵐러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단정 짓지 못하는 건 사람마다 재앙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서, 어린 나이에 성폭행을 당한 모든 사람이 인격이 분열되지는 않아요. 예거 씨의 억압기제나 감정은 그 트라우마가 지배하는 것 같군요.”
당연한 얘기지. 그런 일을 겪고 누가 그 일 이전처럼 살아갈 수 있겠나.
뵐러가 차트를 내려놓았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항불안제 일주일치를 드리죠. 방금 공황발작이 오셨으니까요. 아침에 한 알, 자기 전 한 알을 드세요. 그리고 추가로 빨간색 알약 하나를 더 드리는데 그건 밖에서 예기치 않게 발작이 오면 응급으로 드세요.”
똥 씹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나에게 뵐러가 말했다.
“그 발작은 평생 갈 수도 있지만, 일시적인 것일 수도 있어요. 기억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서 그런 거니까요. 나머지는 내일. 또 보죠, 예거 씨.”
나는 뵐러에게 인사를 하고 외투를 대충 걸친 뒤 나왔다. 간호사가 봉지에 넣어 준 약을 가방 안에 넣고 병원을 나섰다.
의무감에서, 대충 시간이나 때우려고 간 정신과에서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내 인격이 세 개나 더 있다는 반갑지 않은 소식만 덤으로 얻었다. 지워진 5살에서 10살까지의 기억 일부를 되찾았지만, 쓸모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친모와 지내던 일상, 아버지의 저택 문을 처음 보며 신기해하는 광경, 길을 가다가 아랑의 뾰족한 귀를 보며 놀란 기억, 어린 시절 거울로 본 자기 자신의 모습···
“필요 없다고. 그 날의 기억을 달란 말야, 그 날의 기억을.”
그러고 보니, 기억 속의 자신은 얼굴의 자국이 없었다. 그동안은 항상 얼굴에 있었으니 피부가 특정 부분만 이상하게 짙어진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왜 기억 속에는 매끈했을까? 정말 문신이라도 한 걸까?
그렇게, 한층 더 혼란스러워진 채로 우리는 프로이센으로 출발했다. 제국 무장경찰 본부로 가기 위해서였다.
오랜만에 만난 아달베르토 프리드리히 집단지도자는 살이 조금 빠져 있었다. 나는 경례를 올리며 말했다.
“집단지도자, 필요한 작업은 전부 완료했습니다. 보고 드립니다.”
루프트바페의 동기들은 이러는 우리를 보며 흠칫 놀라겠지. ‘님’을 붙이지 않고 스스럼없이 상급자도 ‘당신’이라 칭할 수 있는 친위대식 호칭은 그들에게 낯설다.
“수고했네, 예거. 온 김에 방금 전달된 소식을 말해 주지. 훈장 수여식 장소가 변경되었다. 황궁 안에서 받게 될 거다. 자세한 사항은 밑에 이야기해 두었으니까 듣고 가도록.”
“···황궁?”
“황태자님이 직접 훈장을 달아 주고 싶다고 하셔서 일정이 변경되었다.”
“정말 엄청난 영광이군요.”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아달베르토 집단지도자는 진심인 것 같았다. 우리는 다시 경례를 올리고 나갔다.
라인스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배후를 짐작해 냈다. 이텔에게서 이미 그가 드라헨킨더를 양성하려 한다는 정보를 얻고 추가로 더 조사하면서 실험체 조달 방식 등을 추리해냈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안다.
베르논 블라즈 폰 프로이센이, 얼마나 진지하게 드라헨킨더를 바라는지를.
유일무이한 남자 용기사의 신체를 지금 탐낼 사람이라면, 그밖에 설명할 수 없다. 습격자들의 정체도 그렇게 하면 설명된다. 황태자이니 당연히 친위대에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을 테고, 일부 특수부대를 빼돌려 개인적인 용도로 쓸 수도 있겠지.
납치 혹은 암살시도가 실패한 직후 불러내다니, 누가 봐도 의심스럽다.
쩍 벌린 용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나를 씹어 삼킬 것이다.
그러나 나는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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