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2장. 흔적들, 그리고 앞으로도-(1)
헤르만 예거가 없었다.
그가 있을 만한 장소를 전부 찾아다녔던 라인스 윈터는 이제 약간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꾹꾹 눌러 담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출전 나간 것도 아니었다. 친위대 쪽으로 간 것도 아니었다. 정상적으로 근무 중이라면 있을 만한 장소를 모조리 가보았지만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위치를 알법한 제1비행대대 제3편대원들이 전원 행방이 묘연했다. 당연히 그들도 오늘 출전하지 않았다.
그렇게 급히 전할 말도 아니었지만 계속 찾지 못하니 오기가 생긴다. 라인스는 기지 구석으로 가기로 했다. 갑자기 담배가 땡겼다. 헤르만은 담배연기를 질색하니 그 근처엔 얼씬도 안 하겠지만 좀 쉬었다 찾아도 될 것이다.
라인스가 발견한 그곳은 인적이 드물고 루프트바페 1기들조차 잘 모르면서 경치가 좋았다. 흡연자들이 고뇌하는 표정으로 옹기종기 모여 담배를 뻑뻑 펴대는 다른 장소와는 달랐다.
“담배는 해로운데에.”
넋두리를 하면서 걷는다. 지상에서 접한 인간들의 여러 가지 해악 중에서 담배가 단연코 최강이었다. 하지만 이제 끊을 수가 없었다. 하루에 한 갑씩 피워대는 제4편대의 라헬만큼 골초는 아니었지만.
일부러 느긋하게 걷는 라인스의 귀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포착되었다. 돌고래였기에 가능한 일. 이미 장소를 선점한 사람이 있으니 발길을 돌리기만 하면 될 일이었지만 라인스는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곧이어 라인스는 원래 걷던 대로 걸었다. 소리의 진원지로부터 일정 거리, 즉 청력 좋은 인간 정도에게 들릴 정도의 거리에서부터 뛰기 시작했다.
“게랄드, 멈춰. 이쪽으로 누가 온다.”
히데 프롬 중위의 목소리였다. !파라이니 라인스가 아주 멀리서 걸어올 때부터 발자국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 순간 바로 뛰었으면 의심하겠지. 인간이 들을 수 없는 거리니까. 그래서 조금 걷다가 뛰었다.
경치 좋은 라인스만의 흡연장소에는 두 번째로 찾아다녔던 제3편대원들이 전부 있었다.
제각기 무슨 나쁜 짓이라도 들킨 사람들처럼 요동치는 감정을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파라인 히데는 특히 심했다. 그들은 라인스를 보자 간단하게 경례를 올렸다. 히데와 알비는 중위, 게랄드는 소위, 라인스는 대위였기 때문이다.
손을 흔들어 쉬어로 돌아가라는 뜻을 전달한다. 어차피 알비와 막역한 사이라 부담 없이 터놓고 지내고 있다. 히데는 조금 어려웠지만.
사실 그들도 습관처럼 경례한 것이겠지. 라인스는 자신이 대위까지 올라간 건 납득할 수 있었다. 공격용 마법이나 전술적 운용에 엄청나게 기여했으니까. 심지어 영관급으로 2계급 특진해줄 테니 용기사를 관두고 전술본부로 오라는 제안까지 받았었다. 하늘이 좋아 거절했지만. 그러나 두 슈퍼 에이스인 알비 하스와 히데 프롬이 아직도 중위인 건 납득할 수 없었다.
이유는 알고 있다. 그들이 이종족이기 때문이겠지. 중위까지 올려 준 것도, 그들이 슈퍼 에이스였기 때문에 겨우.
히데가 말했다.
“담배 피러 오신 겁니까. 실례하겠습니다. 후각 때문에요.”
라인스의 주머니 속에 있는 담배의 냄새까지 맡을 수 있으니 담배 피는 사람 옆에 있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담배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라인스의 어조는 절로 다급해졌다.
“지금, 지금 헤르만이 체포되었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게랄드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그걸 어떻게 들었···”
게랄드가 말을 더듬었다. !파라보다 읽기 쉬운 인간이라니. 조금 어리숙한 건 알고 있었지만.
히데가 한숨을 내쉬었다.
“웬만큼 청력이 좋은 인간이 아니고서야 그 거리에서 들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들으셨군요.”
라인스는 게랄드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야? 뭘 알고 있는 거야?”
게랄드는 이도저도 못하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게랄드 입장에서 나는 까마득한 상관. 추궁하면 계속 입을 다물기가 힘들다. 알비가 말했다.
“됐어, 게랄드. 라인스도 알아둬야 할 거 같아. 정말 친한 사이니까.”
게랄드는 안절부절 못하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중령님이 사람을 죽였어요.”
최악을 각오한다면 나올 법한 말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농담 수준이다. 때문에 그 말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알비가 더듬거렸다.
“중령님이 뭐?”
반면 히데는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더 침착했다.
“누구를? 아니, 왜?”
“모,몰라요. 8명이나 죽이셔서······. 제가 본 건 마지막 여덟 명 째를 죽이는 것만···”
“8명?”
히데마저 평정을 잃었다. 히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뭐, 연쇄살인 같은 거라도 한 거야?”
“아마 아닐···걸요? 어제 하루 동안, 아니 하루 동안도 아니지. 새벽 시간 동안 그 8명을 죽였다고 그랬으니까··· 중령님은 정당방위라고 주장하고 있어요.”
게랄드는 자기가 목격한 걸 이야기했다.
게랄드는 사나운 셰퍼드 토비를 기른다. 평소에 목줄을 단단히 잡으며 잘 제어하고 있지만, 유달리 성격이 사나운 개이니만큼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는 일. 그래서 항상 새벽에 일찍 일어나 운동 삼아 토비와 함께 달린다. 그 중에서도 사람을 거의 마주치지 않을 정도로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는 편. 그 산책코스를 따라가면 헤르만 예거의 주택을 스쳐 지나게 된다.
그 날도 변함없이 토비를 산책시키던 게랄드는 갑자기 토비가 맹렬하게 짖어 대서 당황했다. 인적이 드물었기에 망정이지 동네 사람들을 전부 깨울 정도로 컸다. 빨리 산책을 끝내려던 게랄드는 헤르만의 집에서 평소와 다르게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었다. 유리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창문 정도가 아니었다. 일반적인 가정집에서 날 만한 소리가 결코 아니었기에 게랄드는 도움닫기로 점프해 헤르만의 담장에 매달렸다. 얼굴만 간신히 빼꼼 내밀 수 있었다.
“그리고 온몸이 피에 절은 중령님과 어떤 남자를 볼 수 있었어요. 벽면 통유리 일부가 산산조각이 났고 두 사람은 정원에 있었어요. 남자는 칼을 들고 있었고 중령님은 아마 맨손이었을 거예요.
그 남자는 죽일 기세로 중령님에게 칼을 휘둘렀어요. 둘 다 동작이 너무 빨라 잘 보기는 힘들었는데 한눈에 봐도 훈련받은 사람이구나, 싸울 줄 아는 사람이구나, 하고 느꼈어요. 중령님이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죠. 밀리고 밀리다가 결국 벽으로 몰렸고, 비스듬히 세워져 있던 삽을 들어 공격을 쳐냈어요.
그러고··· 그러고 삽날을 남자의 목에 내려찍었어요. 거의 목,목의 절반까지는 파고들게··· 남자가 쓰러지고 나서 중령님은 제 쪽을 봤어요. 당연한 일이죠. 토비가 그렇게 짖고 있는데. 그러고 경찰을 불러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그리고 구급차는 필요 없대요. 구급차가 필요한 인간은 더 이상 없대요.”
게랄드는 여기서 말을 멈췄지만 그들 모두가 다음 말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구급차가 필요한 인간은 없다. 나는 그렇게 다치지 않았으니까. 구급차가 필요한 인간은 없다. 확실하게 전부 죽었기 때문에.
“저는 아무것도 못했어요. 제가···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사태였어요. 그렇게 담벼락에 매달린 채로 가만히 있기만 하니까 중령님이 깨진 유리벽의 구멍으로 들어가더라고요. 저도 담에서 내려왔어요. 그리고 몇 분 뒤 경찰이 왔고, 중령님을 체포해 갔어요.”
“···그 정도는 정당방위 아냐? 아, 물론 네가 목격한 그 사람에 한정한다면.”
라인스가 말했다. 그녀는 의외로, 그들만큼 놀라지 않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미 헤르만이 어떤 인간인지 알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헤르만은, 그리고 에리히는 친위대다. 친위대 중에서 제일 악명 높은 게슈타포다. 헤르만이, 아니 에리히가 태연하게 고문을 하는 걸 눈앞에서 봤다. 그 이후로도 여러 이야기를 나눴고 그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느꼈다.
그러니까, 살인 같은 건 필요하다면 거리낌 없이 행할 수 있는, 그런 사람.
“모르겠어요. 너무 무서워요.”
게랄드가 울먹이며 말했다.
“중령님은 정말, 정말 제가 아는 그 모습과 똑같았어요. 옷 색깔이 안 보일 정도로 얼룩져 있고 얼굴은 피가 엉망으로 말라붙어 있는데도요. 그리고 사람을 죽였는데도요.”
여기 있는 모두가 사람을 죽인 적 있다. 게랄드까지 포함해서, 이 자리에 있는 전원이 상대를 다섯 이상 격추시킨 에이스.
그러나 그것은 전장이라는 약속된 장소와 명분을 위해서. 그럼에도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군인이라는 허물을 내려놓고서도 태연하게 남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꺼려지겠지.
“···그럼 중령님, 감옥에 갈까?”
알비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히데가 말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8명이야. 가볍게 넘어갈 수 없을···”
히데의 표정이 굳었다. 알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왜 그래?”
“···정말 딱 맞춰서 나타나네.”
의문은 곧 풀렸다. 친위대 정복을 입은 헤르만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히데가 말했다.
“용기사들 중 가장 무거운 발걸음, 걷는 속도. 헤르만 말고는 없죠.”
이미 익숙해진 알비나 알고 있는 라인스는 작게 감탄만 하고 끝이었지만 게랄드는 언제나 처음 아는 것처럼 깜짝 놀랐다. 용기사가 되기 전까진 !파라를 별로 접할 일이 없었을 테지.
헤르만은 다른 군의 정복을 입고 있는 것만 빼고는 정말 평소 같은 모습이었다. 굳이 달라진 점을 꼽자면 양 손을 꼼꼼하게 감싼 붕대. 헤르만이 이쪽으로 와서 말했다.
“한참 찾아다녔네. 혹시 내 얘기 중이었니?”
그 말에 게랄드 및 제3편대원들이 동요한다. 그러나 헤르만은 화난 것 같지가 않았다. 헤르만이 게랄드의 눈을 보며 말했다.
“얘기 다 끝냈니?”
“네···”
게랄드가 벌벌 떨며 말하자 헤르만이 어깨를 으쓱했다.
“게랄드가 설명해줬으니 수고를 좀 덜었네. 정당방위로 풀려났어. 그 8명이 근처에 차를 대기시켜 놓는 등 계획적으로 접근했고, 무장하고 있었고, 자는 데 기습했고, 날 죽이려 했다는 점에서. 한 명이라도 살아 있었으면 배후를 캐낼 수 있었겠지만 내 처지에 그걸 바라는 건 사치겠지.”
“암살 시도였단 말입니까?”
히데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묻자 헤르만이 대답했다.
“납치 겸 암살 시도였던 거 같아. 떨어뜨린 주사기 속 약물을 검사한 결과 강력한 수면제로 나왔거든. 그걸 내 팔에 주사하기 직전에 깼어. 그걸 봐서 처음엔 납치하려고만 했던 거 같지만··· 내가 죽어도 딱히 상관은 없었나봐. 그때 조금만 허둥댔어도 살해당했을 거야. 관사에서 나와 단장한 지 얼마 안 된 집이었는데, 망했어. 그냥 청소 업체 부르려고. 나 혼자선 감당이 안 될 정도라···”
태연하게 집 청소를 읊는 헤르만에게 게랄드는 조금 질려 있었다. 그러나 아까의 일방적 두려움과는 조금 다른 느낌. 헤르만이 말했다.
“아참, 이것도 본론이었지만 아무튼 본론. 나 이번 주는 루프트바페 일 하나도 못해.”
라인스가 물었다.
“친위대 쪽 일이에요?”
“그래. 지금도 그렇게 한가하진 않아. 제1비행대대의 임시 대대장은 알프리다 소령이 맡을 거야. 너희들이 제1비행대대원 나머지에게 잘 전달해 줘. 불쌍한 알프리다는 내가 어제 종적을 감춘 바람에 일에 치여 있어서 거기까진 할 정신이 없거든.”
헤르만이 라인스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잠깐 시간 내줄 수 있을까? 물어볼 게 몇 가지 생겼거든.”
라인스가 마법을 상담하고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마법학에 소질이 있는 사람은 헤르만밖에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자주 학술적 목적으로 만났고, 모두들 당연하게 여기는 풍경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대형사태가 일어난 뒤 라인스에게만 할 말은 아마 마법이 아니겠지, 하고 라인스는 짐작했다.
“좀 있다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는데요. 나중에 가능한 시간 없어요?”
“안 될 거 같은데. 가는 길에 잠깐 말하는 정도니까. 그건 괜찮니?”
라인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서려는 헤르만에게, 히데의 말이 꽂힌다.
“도대체.”
감정을 읽기 쉬운 !파라임에도 불구하고 평정을 잘 유지하는 편인 히데가 오랜만이 약간의 격정에 휩싸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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