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너는 용이 되어-42화 (42/102)

2권 4장. 검은 제복의 악마-(4)

질문을 받은 얀츠는 살짝 난처한 얼굴을 하더니, 곧 답을 내놓았다.

“당연히 1명 쪽으로···가 아닌가요.”

“왜 당연하지?”

너무 확고한 믿음에 대해 질문하면 오히려 말문이 막히는 경우가 있다. 지금 그가 그랬다.

“그거야 왼쪽으로 꺾으면 1명만 죽고, 오른쪽으로 꺾으면 5명이 죽으니까··· 사람을 많이 살릴 수 있는 쪽을 선택해야죠.”

“사람을 더 많이 살릴 수 있는 쪽.”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주머니에서 펜을 하나 꺼내 근처에 놓았다.

“이제 네가 언덕 위에서 그 철로를 바라보고 있다고 가정해 봐. 철로는 일직선이고 사람은 다섯 명. 그런데 가만 보니 근처에서 너와 같이 철로를 내려다보는 뚱뚱한 남자가 있어. 얼마나 뚱뚱하던지 그가 열차에 치이면 열차가 멈출 수 있을 정도로. 네가 그 남자를 언덕 위에서 밀어버리면 철로 위의 사람들은 전부 다 사는 거야. 그러면 이제 뚱뚱한 남자를 밀어버릴 건가?”

“아니요!”

얀츠가 황급히 대답했다. 나는 물었다.

“왜지?”

“왜냐뇨! 그건 정말 잘못된 거잖아요?”

“왜? 첫 번째 문제에서 너는 1명을 희생하고 5명을 살릴 수 있었지. 만약 뚱뚱한 남자를 밀어버린다면 1명을 희생하고 5명을 살릴 수 있는 거야.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쪽을 선택하겠다고 방금 말하지 않았어?”

“그래도, 그래도···”

얀츠는 할 말을 찾으려 애썼다.

어떤 것이 논리가 아니라 윤리, 그 중에서도 도덕과 미덕에 관한 문제가 되면 의외로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그것은 다른 의도적으로 학습된 논리에 비해 ‘당연한 것’으로 체화되었기 때문이다. 평소에 많이 생각해 두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자기 언어로 이유를 설명하기 힘들다.

“그건 의도적으로 남을 죽게 만드는 거잖아요. 앞의 것과는 다르게요.”

“그건 둘 다 마찬가지 아닐까? 둘 다 죽이고자 하는 의도가 없었다고 볼 수도 있어. 저 1명을 죽이고 싶어서 1명 쪽을 선택하지는 않았다고 할 수도 있어. 마찬가지로 뚱뚱한 남자를 미는 행위의 진짜 목적은 ‘치이면 열차가 멈추니까’야. 그 과정에서 남자가 죽을 수도 있지만, 본래 목적은 남자의 죽음이 아니라고.

다시 말해, 두 행동의 ‘의도’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아. 왜냐하면 똑같으니까. 그런데 왜 뚱뚱한 남자를 미는 것은, 더 많은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음에도 그렇게 거부감이 드는 걸까?”

곧바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기에 나는 새 질문을 시작했다.

“실제 사례를 예로 들어볼까. 60년 전에 도이체스의 한 어선이 표류하게 되었지. 인원은 총 5명. 그들은 식량을 한계까지 아끼고, 운 좋게 바다거북을 한 마리 잡아 근근이 연명할 수 있었지. 하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찾아왔어. 그 4명 중 한 선원은 젊은 견습 선원으로 고아에다가, 조난 초기 선원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바닷물을 잔뜩 마셨다가 시름시름 앓고 있었어. 어느 날 남은 4명 중 한 명이 그 소년을 죽여서 먹자고 몰래 제안했지. 하지만 어떤 한 명이 반대하는 바람에 하지 못했어. 그 후 며칠 뒤, 다른 한 명은 소년을 잡아 누르고 주도자는 칼을 들어 단숨에 소년을 죽였어. 처음 반대했던 선원조차도 그 고기를 결국은 받아들였지. 그들은 그 후 4일째 식사를 하던 도중 구조되었고 체포되었어. 혹시 이 사건을 아나?”

얀츠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떠올렸다.

“아! 맞아요. 기억났어요. 김나지움*에서 법과 정치 시간에 들은 적 있어요.”

(* 초등학교 4년제 이수 후 들어가는 인문계 학교.)

내가 김나지움에 다닐 때도 저 예시는 나왔다. 내가 학교를 다닐 당시엔 교육과정이 자주 바뀐 편이었는데 저 예시는 용케 계속 살아남은 모양이다. 얀츠가 말했다.

“그거 결과적으론 6개월만 형살이를 하다 나왔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일단 처음에 반대했던 그 사람은 기소되지 않았었고, 적극적으로 소년을 죽였던 둘은 교수형을 선고받았지만 결국은 저렇게 되었고요.”

“당시 여론이 그들에게 우호적이었으니까.”

“맞아요.”

“4명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게다가 소년은 죽으면 슬퍼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아프기까지 했으니까. 아주 합리적이고 옳은 판단처럼 보여.”

나는 얼굴을 찡그린 얀츠에게 말했다.

“하지만 너는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야. 왜일까? 1명이 죽으면 모두 행복해지는데? 전체를 위한 사소한 희생 아니었을까?”

순간 얀츠의 표정이 굳었다.

나 또한 말을 뱉어놓고 아차, 했다.

앞서의 모든 문제들에서 ‘전체의 행복이 증가하는 방향’ 쪽으로 선택을 하는 게 합리적이지만, 어째서인지 거부감이 드는 이유가 하나씩 있었다.

이 이유를 설명할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 한 가지가 그런 차갑고 냉정한 계산 위에 군림하는 상위의 도덕, 미덕의 존재를 가장하는 것이다. 사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생각이 가기 마련이었다. 언덕 위의 뚱뚱한 남자를 미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 병든 소년이지만 인간이 인간을 먹는 것. 사람들로 하여금 저절로 꺼리게 만드는, 내재화된 도덕법칙을 언급하면서, 그게 어떤 양식인지를 파악하고자 던진 질문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도이체스다.

하지만 우리는 친위대의 탈을 쓴 채 대화하고 있다.

우리라면 당연히 조국을, 더 큰 가치를 위해 소수의 희생 따위는 감수해야 마땅한 것이다. 친위대는 더욱 심했다.

내가 이 철학적 질문에서 말한 전체는 개인의 집합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전체’는 어떤 의미가 부여된, 가치가 있는 집단이다.

얀츠는 이 질문을 함정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오로지 전체 집단을 위해 충성하고, 지배계급의 권위를 인정하고, 엘리트주의와 결합한, 현 도이체스와 친위대를 대표하는 사상, 파시즘에 동의하지 않는지 시험하려는 질문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마 나도 얀츠가 아니었다면 남에게 이런 얘기를 하지는 않았겠지. 이텔과는 할 수 있어도, 현대에서 다른 사람과 주고받기에는 너무 위험한 이야기다. 하지만 나는 얀츠에 대한 계획이 있었고, 그래서 이런 주제까지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 주기 위해서.

하지만 이번 건 상대가 더 의심하도록 만든 것 같았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얀츠는 그렇게 말하고 일어섰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화장실로 가는 얀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위에서 아무도 안 보는 걸 확인한 뒤, 품에서 종이접기를 해서 포장한 가루약을 꺼내 얀츠의 맥주에 부었다.

냄새도 없고 맛은 없다. 다만 색깔이 노래서 물에 넣을 순 없다. 하지만 맥주에 녹아들고 있으니 하나도 티가 나지 않았다.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사람이라면 맥주의 색이 아주 약간 달라졌다는 걸 알아차리겠지만 일반인이 알기는 힘들다. 그 정도로 인생을 편집증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아, 게슈타포를 제외한다면.

화장실에 갔다 온 얀츠는 목이 탔는지 맥주를 쭉 들이켰다. 휙 허공을 스친 그의 손에서 으레 술집 화장실에서 쓸 법한 싸구려 비누 냄새가 났다.

얀츠의 표정은 아까보다는 편안했다.

“생각해 봤는데, 지금까지의 문제들은 전부 하나의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전체의 행복을 극대화 시키는 것’. 아까의 식인 사례에 이제 답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건 바로 식인이 궁극적으로는 전체 공동체의 행복을 떨어뜨리는 것이라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마 본인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진 않겠지. 아까 곤란해 하던 그의 모습은, 그의 내면의 ‘미덕’과 이성이 어긋나 괴로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나는 아군인지 적인지 모호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수사관이었다면 명백한 적이었겠지만, 나이기에 모호한 상태. 나였기에 정의 이야기를 먼저 물어보았겠지만 사상 깊숙이 서로 드러내기에는 위험부담이 큰 상대. 딱 이 정도가 적당하겠지.

화장실에서 급조한 것치고는 썩 괜찮은 답이었다. 게다가 정답이기도 했다. 적어도 쉬운 방식으로 논리적인 설명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얀츠가 말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누구도 이의 없이 동의하려면 수치처럼 계량되는 게 유익합니다. 뜬구름 잡는 철학보다는 훨씬 명쾌하겠죠.

제가 보기에 옳은 행동과 정의는 공동체 전체의 행복을 증가시키는 겁니다. 쾌락은 양수, 고통은 음수. 이걸 합산해서 행복이 증가하는 방향이면 옳은 행동입니다.

그 점에서 그 식인을 용납하는 것은 지엽적으로, 그 선원 5명 안에서 보면 1명의 고통과 4명의 행복을 합쳐 결과적으로 옳은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회 전체로 보았을 때 특정 상황에서의 식인을 용납하는 건 인간 존엄성 훼손의 사례를 처벌하지 않고, 살인을 정당화하는 겁니다. 궁극적으로 사회 전체에 대해선 행복이 증대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식인이 틀린 겁니다.”

“그러면 검투 경기는 어떨까?”

아주 오랜 옛날, !파라가 식민지도 아니었고 조상들이 칼과 창으로 싸우던 시절, !파라에 대한 증오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은 강했고, 그렇기에 수많은 게르만 전사들을 죽였다. 너무 강하기 때문에 포로로 잡아와도 일반 노예로 부릴 수가 없었다. 평생 탄광에 가두고 일하게 하거나, 아니면 검투 경기에 내보낸다.

남녀를 불문하고 알몸으로 !파라를 원형경기장에 들인다. 그것은 그들에게 ‘완전한 맨몸’이라는 상태를 주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맹수를 많이 들여보낸다. 그리고 관람한다. 마침내 !파라가 뜯겨 죽을 때까지, 아니면 전부 물리치고 시체의 산에 설 때까지.

사람이 벌거숭이의 몸으로 짐승들과 혈투를 벌이고 잡아먹는 것을 우리 조상들은 오락거리 삼아 관람했다.

“!파라를 경기장에 맹수와 함께 풀어놓는 건?”

얀츠가 두 번째로 긴장했다. 이건 함정 질문이 맞았다. 걸려도 나는 얀츠를 사상범으로 찔러버릴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상관없지만. 약간의 심술이기도 했다.

물론 야만의 시대를 종결하고 새 시대를 연 첫 번째 카이저가 제정한 차별금지법은 지금에서도 유효하다. 사람을 차별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하지만 현실은 법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깨진 유리의 밤(Kristallnacht)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이종족, 이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다쳤다. 그리고 아인자츠그루펜은 이종족을 조직적으로 청소한다. 친위대는 우월의식에 젖어 있다.

여기서 원론적인 답변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걸 듣고 있는 상대가 나라면? 얀츠는 나에게라면 속내를 드러낼 수 있을까? 아니면 그럼에도 게슈타포이니 경계한다?

“당시에는 그게 사회 전체의 행복을 증대시켰죠. 파라 하나 당 수만의 관중.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파라를 부릴 방법이 광부 아니면 전무했기 때문에 선택지가 별로 없었죠. 지금은 훨씬 ‘사용처’가 많습니다. 검투 경기에 몰아넣는 건 그 파라 하나가 지속적으로 일하며 기여할 몫에 비하면 비효율적이에요.”

결국 얀츠는 나를 경계하며 ‘올바른 답’을 내놓는 편을 택했다.

나는 말했다.

“혹시 김나지움에서 윤리와 사상을 들은 적 있나?”

보통의 도이체스 시민이라면 초등학교 4년을 지낸 후 레알슐레 혹은 김나지움으로 진학한다. 대학교를 가고 싶으면 김나지움으로 진학해야 하는데, 보통은 9년 다니고 졸업하면 대학교로 진학한다.

그런데 사관학교의 경우, 가능한 한 젊은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대학에 해당되는 고등교육기관임에도 불구하고 16세부터 입학생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미 김나지움을 졸업한 사람이 아니라면 입학하기 위해서는 김나지움 교육과정의 80퍼센트는 미리 이수한 상태여야 한다. 즉, 16세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9년치 교육과정을 5년으로 압축해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나이가 많을수록 감점되기 때문에 보통 학생 같이 빈둥거릴 수도 없다. 사관학교는 2학년부터는 보통 대학과 다름없이 가르치기 때문에 결국 남들보다 4년 일찍 대학교에 가는 셈이다. 사관학교 출신이라 하면 엘리트라고 선망에 찬 시선을 보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관학교 입학을 노리는 사람은 과목 선택도 전략적으로 하는 편인데, 특정 계열 학생들이 ‘버리는’ 과목들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마도공학 전공으로 가고 싶으면 고대 게르만 어와 철학을 버린다. 마법학과로 가고 싶은데 윤리와 사상을 듣는 나 같은 괴짜도 더러 존재하지만, 대부분은 그런 식으로 산다. 효율적으로.

“들은 적 있습니다.”

나와 같은 부류의 괴짜인가. 그런데 왜—

“헬라스 시대 이후부터 졸아서 그 다음 내용은 기억이 안 나지만요.”

나는 피식 웃었다.

“네가 화장실 갔다 온 뒤 생각해 낸 그게 바로 ‘공리주의’야.”

“이미 있는 사상이란 말입니까? 정말 참신하다고 생각했는데.”

“응. 200년 전쯤의 사상이야.”

얀츠가 낙담하는 것을 보며 말했다.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걸 생각해낸 건 대단한데?”

이쯤 되니 돌고래가 얼마나 똑똑한 사람들인지 다시 실감이 난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초기 공리주의 이후의 공리주의 사상들, 그 비판점으로 제시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사실 김나지움에서 안 가르치는 내용도 있었다. 현 카이저 집권 전의 책들을 열람할 수 있는 이텔이 없었으면 불가능했겠지.

방에 들어와 공리주의의 여러 한계를 들은 얀츠가 말했다.

“그럼에도 공리주의는 매력적이네요. 순환논리도 없고. 하지만 머리는 받아들일 수 있어도 가슴 깊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냉정한 사상이에요.”

얀츠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저라면 공리주의를 받아들일 거 같네요. 철로에 선 다수의 행복을 극대화시키는 쪽으로요.”

“그럼 소수는?”

“거부감은 들지만, 결국은 선택하겠죠. 소수를.”

얀츠가 말했다.

“단위를 바꾸면 명확해져요. 다섯이 아니라 서른 명이면? 백 명이면? 수천 명이면? 전체 행복을 극대화시킨다는 본질은 같아요. 한 명 대신 수천 명을 선택하는 것과 한 명 대신 다섯 명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똑같아요. 그리고 대부분은 한 명으로 수천 명을 살린다면 주저 없이 선택하겠죠.”

나는 아르노 얀츠의 대답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그의 결론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억지로 미소를 지어봤지만 어색하겠지. 나의 변화를 눈치 챈 얀츠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 그의 미간에 겨누며 말했다.

“그러면 나에게 에니그마를 줘, 아르노 얀츠.”

얀츠는, 마치 전혀 예상치 못한 배신을 당한 사람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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