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너는 용이 되어-41화 (41/102)

2권 4장. 검은 제복의 악마-(3)

그리고 라인스 중위를 옭아매는 손가락.

라인스 중위의 목숨을 단숨에 앗아갈 방법은 많았다. 에리히는 그 중 느린 방법을 택했다. 고통스러워하는 라인스 중위를 보면서 이제 에리히는 그 ‘미소’를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에리히를 밀어내려는 시도를 멈췄다. 다시 관조자의 태도로 돌아와 바라보기만 한다. 라인스 중위의 피부는 점점 회청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죽음이 가까워지자 변신이 서서히 풀리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나는 급작스럽게 몸을 확 빼앗았다. 신체통제력이 돌아온 걸 느끼자마자 손아귀에 걸린 힘을 풀었다. 무너져 내리는 라인스 중위의 몸을 품에 안아 쓰러지지 않도록 한다.

조심스레 눕힌 라인스 중위는 눈을 뜨지 않았다.

회색 피부로 변해 축 늘어진 그녀를 보며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처음이었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써 행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스스로의 감정을 위해 휘두른 폭력. 내가 행한 것이 아니더라도 내 육신이 저지른 일이었으며 이것을 방기한 나의 책임도 존재한다.

“안 돼.”

입술이 힘없는 말을 내뱉는다. 패닉이 오려는 걸 억지로 다잡고, 라인스 중위의 경동맥에 손가락을 대었다.

혈관은 박동하고 있었다.

“맙소사.”

나는 스르르 주저앉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라인스 중위의 몸 상태를 살폈다.

나는 의사가 아니었지만 라인스 중위의 상태를 대충은 알 수 있었다. 그저 정신을 잃은 것뿐이다.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 그래야만 한다.

라인스 중위의 목에 서서히 나타나는 손자국이 나를 책망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러고 기다렸다. 라인스 중위가 깨어날 때까지. 중간에 누가 들어오려는 걸 간간이 막았다. 라인스 중위는 변신이 반쯤 풀린 상태였다. 그걸 다른 누군가가 보는 순간 끝장이다.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흐르자 라인스 중위가 눈을 떴다. 내가 가까이에서 내려다보니 화들짝 놀라는 게 느껴져서 물러났다.

라인스 중위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됐어요. 돌아오신 거 같네요.”

자신의 손을 흘깃 본 라인스 중위가 다시 변신을 시작했다. 피부의 회색이 서서히 옅어지더니 완전히 백인 여성의 피부로 돌아왔다.

라인스 중위는 벌떡 일어서려다 기립성 저혈압이 왔는지 비틀거렸다. 내가 황급히 가서 잡아 주자 라인스 중위가 내 손을 뿌리치며 혼자서 일어났다.

그럼에도 서로의 몸에 반응하는 서로의 심장. 함께 고동친다. 반응한다. 돌고래가 서로에게 반응하는 것처럼. 조용한 이곳에서 어느 때보다도 더 확실히 느껴진다. 하지만 저쪽에선 그걸 공명이 아닌 연심으로 착각하고 있지. 그녀는 살짝 혼란스러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누구죠?”

나는 결국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나의 비밀이었다. 그러나 방금 죽을 뻔한 이 사람에게 나는 비밀 운운할 자격은 없다.

“···에리히.”

“어떤 사람이죠?”

“나와 거의 비슷한 사람.”

한참 침묵이 흘렀다. 나는 입을 열었다.

“미안해.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해서. 어떻게 사죄해야 할 지 모르겠어.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알아차렸어도 네 목숨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았을 텐데···”

“그럼 그 사람은 누구죠?”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아 망설이는 사이 라인스 중위가 말한다.

“첫 번째 사람이 누구에요?”

헤르만 예거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는 에리히 아벨의 실체를 꿰뚫어본 사람. 우리의 인생에서 라인스가 두 번째다.

첫 번째는 이텔 마리아 폰 프로이센.

그녀의 이름을 그대로 말할 수 없어서 감춰진 진실만을 이야기한다.

“마리아.”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녀 역시 죽이려고 했나요?”

“···아니.”

이럴 땐 거짓말을 해 달래는 것이 도리겠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러자 라인스 중위가 나를 확 밀친다. 그러나 서로의 무게 차이가 상당한 탓에 그녀가 오히려 뒤로 밀려난다.

조금 거리를 둔 그녀의 흰자위는 빨개져 있었다. 라인스 중위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하···하하, 아니라고요? 뭐에요. 그럼 절대 이길 수가 없잖아요.”

여기서 그는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타인이라고, 라인스 중위가 착각하고 있는 대상은 여기 있는 헤르만 예거라고 말하면 될 일이었다.

에리히 아벨은 나와 목적을 공유하는 타인일 뿐이라고.

그러나 나는 끝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라인스 중위는 돌아서더니 휙 나가버렸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그녀가 우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머리를 감싸며 옆에 있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제 아르노 얀츠를 색출할 가장 유력한 방법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나는 사건 증거물들을 검사해야 하니 실험기구 몇과 화학물질들을 요구했다. 프리몬트 연대지도자는 흔쾌히 허가했다.

사실 나에겐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추리소설에선 결국 탐정이, 경찰이 신묘한 추리력으로 범인을 찾아낸다. 궁지에 몰아넣고 체포한다. 하지만 나는 소설 속 인물이 아니었다. 나는, 조금 우수하긴 해도, 한계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나는 이제 아르노 얀츠를 정식 고발할 길이 거의 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간이 실험실에 박혀서 증거품들을 검사했다. 화학물질을 섞어 새로운 걸 제조했다. 아직은 포기할 수 없어서였다.

그리고 그렇게 몰두하는 편이, 라인스 중위를 잊기 더 쉬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A형 친위대원의 파일을 뒤적거려 아르노 얀츠와 드루드 베커를 꺼냈다. 아르노 얀츠는 정보장교였다. 드루드 베커도 정보장교. 희생자를 선택한 게 우연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의태가 더 쉬워졌다.

“왜 이쪽의 에니그마를 훔치지 않은 거지?”

아인자츠그루펜 한 연대 정도면, 그리고 아인자츠그루펜이기에 그들은 반드시 암호화 도구가 필요했다. 얀츠는 이 암호기계를 접하기 정말 쉬운 위치에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아인자츠그루펜의 것을 훔치지 않고 문서보관소에서 훔쳤을까.

“유일한 빈틈이었나.”

아인자츠그루펜은 당연히 에니그마를 엄중히 관리할 것이다. 연대급이면 정보병과 정보장교들이 변심해 허튼 짓을 할 가능성도 원천차단한다. 얀츠가 거기서 훔칠 수 있을 확률은 거의 없었다. 기밀문서보관소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테지만, 적어도 얀츠의 눈에는 그쪽이 더 쉬웠던 것이다.

‘아르노 얀츠’의 행적을 찾는 게 더 이상 불가능해졌으니 이젠 시선을 돌릴 차례다. 에니그마. 사라진 에니그마는 어디 갔을까. 일단 묵고 있는 여관에는 없었다.

아르노 얀츠가 바서슈와인 근처에서 탈영하는 건 불가능하다. 계엄이 안 내려졌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에니그마는 뚜껑을 닫으면 판형이 큰 책 정도의 사이즈. 그리 크지는 않지만 몰래 몸에 지니기엔 부담스럽다.

따라서 탈영까지 고려하면 아인자츠그루펜이 들고 다니는 보급품, 그 중에서도 접근하기 쉬운 쪽에 숨겨 두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보급품 쪽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후보지에서 나오지 않았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건 나와 그의 승부였다. 그리고 그동안은 그가 판정승으로 앞서 있었다.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열 번째 후보지에서도 나오지 않자 나는 조금 절망적인 기분이 되었다. 이대로 나는 패배하고 마는 것인가?

밤이 되자 나는 패배를 인정했다.

절망적인 기분이 되어 나오는데 발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이 시간에? 뒤를 돌아보자 드루드 베커의 얼굴이 있었다.

“···이 시간까지 웬 일이야?”

나를 고생시키고 있는 장본인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한 명이 에니그마를 훔치고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일감이 늘어서 그만, 야근하게 됐지 뭐예요. 아직 저녁도 못 먹었어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배가 무척 고프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친 듯이 혼자서 수색한 탓에 먹은 게 없었다.

“식당은 다 닫았겠지?”

“그렇죠. 이 시간에는.”

“할 수 없네. 굶을 수밖에.”

“굶지는 않아요.”

드루드 하급돌격지도자의 얼굴을 뒤집어 쓴 아르노 얀츠가 말했다.

“24시간 하는 크나이페*를 하나 알아요. 조금 짭짤한 저녁이 되겠지만, 안주들이 꽤나 맛있어요.”

(*도이체스식 맥주집, 주점.)

“잘됐네.”

그리하여 나는 반역자와 함께 술집을 가게 되었다. 일단 포만감을 주는 안주류를 잔뜩 시킨다. 원래는 배만 채우려 했지만 이왕 크나이페까지 온 김에 맥주도 시켰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술집 구석의 낡은 라디오에서는 심야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늘 오전 경찰은 프란츠 팔크 씨를 체포했습니다. 딸을 강간한 20대 남성을 잔혹하게 살해한 혐의입니다. 조사 결과 훼손된 그의 시신은 죽은 뒤 잘린 것이 아니라 산 채로 토막이 난 것으로···”

멍하니 뉴스를 듣고 있던 아르노 얀츠가 말했다.

“끔찍하고, 마음이 복잡하네요. 딸의 복수를 한 아버지라. 흔해빠진 이야기지만 그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죠.”

그는 나를 흘깃 보더니 말한다.

“아참, 경찰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조금 실례될까요? 공권력을 수호하시는 입장이니···. 결국 복수란 허무한 것이니까요.”

나는 미리 나온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아니, 복수는 무척 좋은 거다.”

그런 대답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지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말을 이었다.

“복수심은 정말 강렬한 감정이야. 사랑, 기쁨, 슬픔, 노여움과 동등할 정도로 강력하다.”

나의 삶을 이끄는 것 또한 복수이다. 그것 때문에 나의 존엄이 짓밟히면서도 결코 놓지 못한다. 그만큼 강렬하기에.

“복수의 끝이 허무하다는 건 거짓말이야. 해소되지 못한 복수심이 어떻게 사람을 좀먹어 가는지 고려하지 않는 사람들만이 그 말을 믿지. 인간은 원래 복수의 생물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이웃이 죽인 돼지 때문에, 살해당한 부족민을 위해 복수했다. 복수자들은 칼날을 속에 감추고 이웃 마을을 잔치에 초대한 뒤 살육한다. 그것이 다음 피를 불러올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거야. 너무 달콤하니까.”

“그러면 어째서···”

“그러나 복수는 끊어내기가 매우 어렵지. 복수의 연쇄에 놓인 인간들은 언제나 긴장해야 한다. 언제 복수를 당할지 몰라. 언제 자신의 죽음이 복수의 시발점이 될지 모른다. 그 결과는 이방인에 대한 끊임없는 경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야. 그러면 이러한 경향이 언제 사라지느냐? 바로 국가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나서다. 국가는 이전 부족사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전문화되고 강력한 중앙 통치 기구이지. 부족사회는 모두가 폭력을 잠재하고 있다. 부족장은 그들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어. 그러니 폭력은 새어나가고, 그것은 투쟁이 된다.

국가는 달라. 국가는 이러한 상태, 모두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사는 삶을 내버려 둘 생각이 없다. 따라서 국가는 폭력을 독점한다. 치안을 유지하는 공권력이 생겨난다. 사람들은 국가만이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회적 계약을 맺음으로써 비로소 끝없는 투쟁의 연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거지. 그들이 나를 대신해 폭력을 사용해 줄 거라는 믿음으로 사회는 돌아간다.

그러나, 그런다고 사람의 본성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들의 복수심을 가만히 내버려둘 수는 없는 거지. 그래서 국가는 교육으로 복수심을 통제한다. 복수는 허무한 것이며 스스로를 망가뜨릴 뿐이라는 신념을 주입시켜.”

“···그러면 결국 복수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건가요?”

“그들을 이해하지만 용납하지는 않아. 정의로운 국가는 복수를 간접적으로 대행해준다. 물론 자기 손으로 강간범을 찢어죽이는 희열보다는 약하겠지. 하지만 자신이 ‘국가’에서 태어난 이상, 그 사회계약의 혜택을 받으면서, 언제 살해당할지 몰라 노심초사하면서 살고, 모든 자극에 예민하게 행동하는 삶이 아닌 안락한 삶을 보장받으며 살아온 이상 사람은 계약을 이행할 의무가 있어.

복수의 대용으로 용서가 나온 건 편리하기 때문이겠지. 용서도 사실 매우 복잡해. 하지만 확실한 건, 누군가에게 못된 짓을 한 사람을 용서할 때 미래에 얻을 이득은 상당히 높아. 사회 전체로 보았을 땐. 물론 용서해야만 하는 자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았지만.”

안주가 나왔다. 나는 부어스트*를 포크로 찍으며 말했다.

(*소세지)

“복수는 좋아. 하지만 결국은 절차를 지켜야 해. 그게 ‘시민’으로 태어난 자의 의무야. 국가가 자신의 의무를 저버린다면, 자신의 정당한 복수를 대행해주지 않는다면, 그때부터는 자신의 선택에 달렸겠지.”

“결국, 결국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복수 그 자체는 이루겠다는 의미네요.”

“···맞아. 하지만 정의로운 국가는 복수를 무사히 해내겠지. 거기서 끝나게 될 거야. 도이체스는 정의로우니까.”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며, 얀츠의 얼굴을 슬쩍 살핀다. 역시나 나의 마지막 말에 조금 반응했다.

“정의로운 국가를 반드시 전제해야 하는군요.”

“정의롭지 않은 국가는 튀어나가는 시민을 통제할 자격이 없으니까. 하지만 복수자도 기억해야 해. 자신이 정의라고 믿는 건 오만이다. 자신의 정의가 누군가에겐 비수가 될 수 있어. 굳이 그 복수의 대상자로 한정하지 않더라도.”

가령, 무슨 이유에선지 에니그마를 훔친 한 명 때문에 1만 5천명이 죽어야 하는 사태.

이제 친위대원이 의태자라는 걸 밝힐 때까지만 해도 학살이 멈추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었다. 그러나 프리몬트 연대지도자는 내 기대를 저버렸다.

“‘청소’는 예정대로 속행한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가 말을 잇는다.

“자네가 먼저 찾아낸다면 또 모르지만, 우리는 시간이 없다. 곧 크라쿠프로 가야 해. 제아무리 냉혈한이라도 동족을 학살하는 데에는 주저함이 있겠지. 전체 장교들을 감시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A형 장교만을 감시하는 건 수월하다. 그때 빈틈을 보인 자를 잡아내겠다.”

내가 하루 만에 패배를 인정한 이유이기도 했다. 모든 보급품을 뒤진다면 언젠가는 나온다. 하지만 나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결국 동원할 것은 최후의 수단.

“그러면 도대체 정의는 무엇일까요?”

나도 그것을 알고 싶다.

“그런 어려운 질문에 바로 대답할 거라곤 생각하지 마. 뭐, 그래도 흥미로운 주제야. 한 번 볼까.”

나는 소금병과 후추병을 조금 떨어지게 세웠다.

“자, 여기서 문제. 너는 지금 열차를 운행하는 기관사고, 모종의 이유로 브레이크가 고장 났다. 그리고 갈림길은 두 개 있지.”

소금병과 후추병을 가리킨다.

“각각 1명과 5명을 의미한다. 왼쪽 선로 위에는 한 명이, 오른쪽 선로 위에는 다섯 명이 있어. 그들이 피할 틈은 없다. 반드시 누군가는 죽는다. 그럼 너는 어느 쪽으로 핸들을 꺾을 거지?”

정의에 대한 아주 고전적인 담론—기차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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