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너는 용이 되어-29화 (29/102)

2권 1장. 한계-(4)

게랄드는 훗날 ‘압축성’이라고 알려질, 용기사의 악몽에 갇혀버린 것이었다.

공기 중에서의 음속은 약 시속 1,224킬로미터이다. 물체가 공기 중에서 움직일 경우 이 음속의 0.3배 이상부터는 공기가 압축되면서 생겨나는 효과를 무시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약 시속 367킬로미터부터이며 빠르기로 유명한 카플랑 종은 물론이고 슈미트무트 종조차도 간단히 돌파할 수 있는 속도다.

하물며, 게랄드는 방금의 급강하로 거의 음속에 접근한 상태였다. 굉음의 충격파를 낼 정도는 아니었지만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용은 사출비행 중에는 날개를 움직이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다르다. 날개를 크게 퍼덕이지 않을 뿐, 용의 날개는 미세하게 움직이며 방향과 상승을 조정한다. 그러나 압축성에 걸려버린 순간, 아무리 용이 애써도 신체를 조정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조종불능이 된 것이다.

이 현상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인간이 사출비행을 조종하기 시작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항공역학은 부실하기 그지없었다.

게랄드는 패닉에 빠져 조종간을 마구 잡아당겼다. 이제 게랄드는 육안으로 지상에 자리한 성당의 십자가를 구분할 수 있었다. 이 웅장한 유적은 천 년 전에 세워진 유적으로 도이체스인인 게랄드조차도 알고 있었다. 아마 언젠간 공습으로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왔었다. 게랄드도, 비록 적국이라지만 저런 찬란한 문화유산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말에 가슴 아파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파괴자가 폭격룡이 투척한 포탄이 아니라 게랄드 자신이 될 줄은 몰랐다.

“이런 데서 산산조각나긴 싫어어엇!!”

게랄드는 소용없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온 감응력을 전부 동원해 용과 하나가 되었다. 이토록 깊게 감응한 건 처음이라 게랄드는 마치 자신이 용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하늘을 나는 거체로.

그 순간, 용이 반응했다.

지상과 가까워져 높아진 공기밀도와 게랄드의 간절함이 합쳐진 결과였다.

게랄드는 르 끼리 대성당의 십자가를 부서뜨리며 지면과 평행하게 스쳐 지나갔다. 용의 울부짖음과 사출공에서 뿜어져 나오는 괴성이 지옥의 절규처럼 거리의 시민들을 강타했다.

마침내 통제력을 회복한 게랄드의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안장의 앞쪽과 눈앞의 유리창은 엄청난 G를 받고 산산조각나 있었다.

집에 갈래. 이 꼴로는 더 이상 못해먹겠어. 난 할 만큼 했다고. 기지로 귀환할거야.

이미 두 대를 격추한 상태다. 게랄드를 꾸짖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때, 다시 총탄이 게랄드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면서 아직 안 깨졌던 나머지 앞유리창을 박살냈다.

「씨발 집에 좀 가자!」

게랄드는 진심으로 고함을 꽥 질렀다가, 자신이 크라쿠프어로 욕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누가 들었으면 어쩌지? 우습게도 게랄드는 지금 자신을 뒤에서 쫓아오고 있는 프랑크의 시방위군 용기사보다도 지금 도이체스의 분위기—오직 순결한 게르만 외에는 전부 2등시민이라 여기는 그러한 공기를 더 두려워하고 있었다.

못 들었을 거야. 이렇게 멀리 있는데. 이렇게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던 게랄드는 무척이나 쓸데없는 걱정이었음을 깨달았다. 게랄드는 편대 채널만 켜놓은 상태다. 일단 이렇게 멀었으니 그들이 들었을 리도 없고, 헤르만 예거를 제외한 나머지 편대원들은 아랑과 !파라였다. 현 친위대 소속인 헤르만이면 몰라도 그들이 뭣하러, 반쪽 도이체스인이자 반쪽 크라쿠프인인 자신을 밀고할 것인가?

몹시 지쳤지만, 기지로 귀환하자마자 관리소에 끌려가 혼혈인 등록 지문을 찍으러 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덕분에 게랄드는 싸울 기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래도 싫다, 이 상황. 난 다쳤다고. 몸은 모르겠고 마음이 심하게 다쳤어. 이제쯤이면 집에 가서 발 뻗고 쉴···수가 없네······.

게랄드 소위의 룸메이트는 중령이었다. 편히 쉴 수 있을 리가 없다. 차라리 낯선 도시의 싸구려 여관에 가서 자는 게 더 편할 것이다.

「에이 씨발 되는게 없어.」

이젠 거친 소리를 참으려고도 하지 않으며 게랄드는 조종간을 있는 힘껏 당겼다. 동체를 축으로 거칠게 90도 우회전을 했다. 현재 적기가 게랄드의 5시 방향 아래쪽 뒤에서 쫓아오고 있는 상황. 게랄드는 또다시 적의 속도를 이용한 것이다. 게랄드의 기동으로 그녀는 엄청나게 속도가 느려졌다. 고속도로를 내달리는 자동차의 브레이크를 잡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꽉 잠가버린 셈이나 다름없었다. 엄청난 속도로 실속하자 동체가 마구 떨려왔다. 뒤이어 당연하다는 듯이 둔중한 중력이 게랄드를 짓눌렀다. 게랄드는 이번 출전 전까지만 해도 높은 G를 경험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이제는 마음만은 베테랑이 된 기분이었다. 게랄드는 견뎌냈다. 적룡도 황급히 속도를 줄이려 했지만 실패하고 게랄드를 추월해 지나쳤다. 게랄드의 극단적인 선택은 적절했지만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이라기보단 지금 상황에 대한 짜증으로 홧김에 저지른 짓에 더 가까울 것이다.

게랄드는 이제 자기 앞쪽에 위치한 적룡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지만 모두 맞추지 못하고 지나쳤다.

둘 다 저공비행은 너무 제약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고도를 높였다. 고도를 높이는 적룡을 게랄드가 일방적으로 추적하는 것에 더 가까웠지만.

적룡은 게랄드가 계속 따라오자 그녀를 떼어내려고 온갖 기동을 다 써보기 시작했다. 비행묘기공연에서 보일, 혹은 헤르만 예거나 해볼 법한 현란한 기동의 향연이 벌어지다가 고도 900미터가 될 때쯤 게랄드는 경악했다.

“미친 거 아냐?? 여기서 스플릿 S를???”

스플릿 S 기동. 반전 강하의 일종으로 우선 동체를 축으로 반 바퀴 돈 뒤 반원을 그리며 강하한다. 최저점에 내려왔을 때 다시 정면으로 기동하게 된다. 이로써 위쪽 고도에 있을 때와 반대 방향으로 순식간에 전환할 수 있는 고급 기동이다.

문제는 여기가 고도 900미터라는 것이었다. 카플랑, 아니 슈미트무트이든 무엇이든 스플릿 S 기동을 하려면 적어도 1980미터 이상의 고도를 확보해야 했다. 900미터는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게랄드는 쫓아가지도 않았다. 추락할 게 틀림없었다. 게랄드는 하늘 위에 떠서 굉음과 먼지구름을 기다렸다.

그러나 적룡은 땅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되는 대신 온전한 몸 형태를 유지했다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저 미친 용기사가 성공해 낸 것이다. 게랄드는 적군이라지만 진심으로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그러나 적룡의 위기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게랄드는 한참 위쪽에서 에너지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게랄드는 무서운 기세로 상승해오는 적룡을 겨냥해 조준선을 맞추고 기다렸다.

“게랄드! 꼬리에 하나! 선회해!”

그 순간 히데의 목소리가 게랄드의 귓전을 때렸다. 무선이 간신히 닿는 엄청나게 먼 거리였지만 히데의 초인적인 시력이 게랄드의 위기를 포착해냈다. 게랄드는 고개를 왼쪽으로 홱 돌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오른쪽으로 돌리자 500미터 밖에서 프랑크의 용이 쫓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앞에서 빛이 번쩍번쩍했다. 게랄드의 정면으로 다가오는 기관포가 불을 뿜은 것이었다.

이미 게랄드의 속도는 너무 빨랐다. 좌선회를 하면 벗어날 수 있겠지만 선회 자체가 불가능했다. 게랄드는 정면의 기관포 포화 속으로 돌진했다.

게랄드는 자신이 이 제24전투항공단에 처음 배속되었을 때를 생각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키가 컸다. 루프트바페 용기사 중에서 가장 커다란 사람임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는 키 178센티미터의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보기 드문 새까만 흑발을 짧게 잘랐는데, 그의 샛노란 눈동자는 그가 이종족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맹금류의 눈처럼 강렬한 그 눈동자는 그의 오른쪽 눈가에서 춤추듯 내려오는 세 줄기의 곡선 무늬와 더불어 아주 뚜렷한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섬뜩하게 벼려진 듯한 그 기운도 잠시, 그의 눈가가 휘어지며 미소를 만들어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그가 천천히 걸어오며 말했다.

“나는 앞으로 2주간 너희들의 교육을 맡게 된 헤르만 예거라고 해.”

그의 목소리는 퍽 부드러웠다.

알고 있음에도,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용기사들 사이에서 술렁임의 파문이 퍼져나갔다. 헤르만 예거. 도이체스에서, 어쩌면 전 세계에서 유일한 남자 용기사. 그리고 격추수 세계 1위를 기록 중인 슈퍼 에이스. 2위와는 50대 넘는 차이를 벌리고 있다. 어느 날 수도에서 용과 마주쳐 바로 용기사가 된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용기사 지망생이 아니더라도 꽤 유명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내 최선을 다해 가르칠 거고, 부디 모두 다 흡수해주었으면 바라.”

웃는 입가와는 별개로, 시선은 날카롭다. 그는 사열해 있는 애송이 용기사들을 한 명 한 명 훑었다. 한참 높은 위치에서 낱낱이 파헤치듯이 지켜보는 시선은 용기사들을 저절로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들을 주눅 들게 하려는 의도였다면 충분히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정작 본인은 친위대가 만들어낸 쓸데없는 직업병이라 일축했을 테지만.

“왜냐하면, 난 여기 너희들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니까.”

압도적인 자신감이었지만 결코 오만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 말을 한 순간 헤르만은 게랄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다. 이건 이미 2세기도 전에 C. 클라우비테가 『전쟁론』으로 논파한 구닥다리 이론이지만 공중에선 다르다. 방어 기동이라는 건 최하책이야. 그건 이미 본인이 불리한 상황에 있고 그걸 타개하기 위한다는 뜻이니까. 공성전과는 달리 용기사는 방어만 하다간 죽는다. 최선은 절대 불리한 상황에 빠지지 말 것. 만약 그렇게 되었으면 공격적으로 대응할 것. 지상의 멍청한 남자들은 모르지. 용기사들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사납고, 공격적인 족속들이다. 하늘의 숙녀들이 아니라, 하늘의 투견들이지.”

아마 게랄드는 결코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게랄드는 더욱 더 속도를 높였다. 축구공만한 불길이 게랄드를 스치고 지나갔다. 게랄드는 극한으로 속도를 높인 다음 반원을 그리며 상승, 배면 비행으로 근접하자 동체를 뒤틀어 다시 원상태로 회복, 고도를 높여 직진한다. 아까 적룡이 시전한 스플릿 S 강하의 상승 버전, 임멜만 선회였다. 그렇게 사선에서 벗어난 게랄드는 다시 그 자리에서 바로 스플릿 S 기동을 시전, 반원을 그리며 내리꽂힌다. 게랄드의 고도도 1900미터에는 모자랐지만, 이미 신경 쓰지 않은 지 오래였다. 횡전을 거듭한 탓에 어지러울 만도 했지만 극한에 몰려 분비된 아드레날린이 게랄드의 정신을 각성시킨다.

그렇게 하여 게랄드는 추적자의 6시 방향에 위치하게 되었다. 게랄드는 방아쇠를 당겼다. 기관총이 발사되었고, 사출구에 맞은 총알은 곧 거대한 폭발이 되었다.

이제 남은 건 아까 지상에서 만났던 시방위군을 추적하는 것뿐이었다. 게랄드는 적룡의 꼬리를 잡고 뒤쫓기 시작했다.

상승도, 선회도 불가능한 상황. 적룡은 무모한 선택을 했다.

산맥에 놓여있는 협곡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V자로 가파르게 파여 있는 협곡은 좁고 위험했다. 적룡은 게랄드의 기관포와 산맥의 위험 중 후자를 택한 것이다. 이로써 완벽히 게랄드를 따돌렸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적룡을 따라 같이 협곡으로 돌진하는 게랄드를 보며 히데가 자기도 모르게 내뱉었다.

“게랄드! 자마닌 다레쿠에스!”

히데의 육안으로는 보이나 통신이 닿지 않는 먼 거리였기에 그 말이 게랄드에게 들리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적 여럿을 소탕하고 이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알비에게는 들렸다.

“뭐라고 말한 거야?”

히데는 1초 정도 고민했다. 이 미묘한 말의 뜻을 어떻게 전달할까. 히데는 가장 비슷하고도 거친 말을 택했다.

“미친년.”

*

게랄드는 이렇게 낮게 비행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게랄드도, 쫓기는 자도 모두 나무들에 배를 찔릴 듯이 아슬아슬한 높이로 날고 있었다.

게랄드가 따라와 버린 이상 적은 게랄드가 추락하거나 박살나는 것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게랄드는 온몸의 털이 쭈뼛 솟는 것을 느꼈다. 이건 900미터에서 스플릿 S 강하를 하는 것만큼이나 미친 짓이었다.

복잡한 계곡 지형을 따라 두 용기사는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수없이 좌로 틀고 우로 틀었지만 게랄드의 기관포는 번번이 적을 맞추지 못했다. 계속 기관포의 궤적이 적룡의 위쪽으로 날아가 버리는 것을 보고 게랄드는 기총의 가동범위 한계 내에서 최대한 각도를 내렸으나 더 이상 내려가지 않았다.

‘기관포 각도 때문에 적은 나보다 살짝 위에 있어야 해. 내가 내려가거나 적이 올라가거나 둘 중 하나.’

그러나 게랄드는 내려갈 수 없었다. 이 이상 고도를 낮추는 건 자살행위였다. 그랬다간 게랄드와 그녀의 파트너 용 에밀리는 강판에 간 감자처럼 되어버릴 것이다.

더 이상 탄환을 낭비할 수도 없었다. 무의미하게 소모해버린 결과 게랄드의 탄환은 5발밖에 남지 않았다. 저격수 히데라면 몰라도 게랄드에겐 엄청나게 빠듯한 숫자다.

“2미터만 더 내릴 수 있었어도!”

부질없는 바람을 외치며 적을 추격한다. 마스크를 통해 순도 100퍼센트의 산소를 호흡하고 있는 탓에 숨이 가빠질 리는 없었지만 게랄드는 긴장으로 헐떡이면서 호흡이 막히는 것처럼 느꼈다. 거듭된 공중전으로 탈진 일보 직전인 뇌가 이제 비관적인 예측을 출력하기 시작한다. 이대로 적을 놓아주어야 하는 것일까? 여기가지 쫓아와서?

그렇게 넋을 놓은 순간, 갑자기 지형이 바뀌었다.

상류 계곡에서 정말 보기 드문 급커브 지형이었다. 적룡이 먼저 발견해 갑작스레 홱 틀어 동체가 마구 흔들리지 않았더라면 게랄드도 모르고 충돌했을 것이다. 급커브와 더불어 경사 자체의 각도도 높았다. 거의 언덕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

적룡은 기수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게랄드의 조준선에 적룡이 들어왔다. 게랄드는 남은 5발을 쏘았다. 그것이 적룡의 사출공에 명중했다. 동시에 적룡은 너무 극단적인 기동전환을 이기지 못하고 산비탈에 충돌했다.

게랄드는 스스로의 추력으로 나선상승을 하며 솟아올랐다가 통제력을 회복했다. 자기 자신의 그림자와 충돌한 적룡은 굉음을 내며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아마 용기사는 탈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탈출 안전거리를 확보하기엔 그들이 지나치게 낮게 날고 있었다.

아마 저 용기사는 폭발하는 용에 휩쓸려 잔해가 되었을 것이다.

비로소 호흡이 진정된 게랄드가 내뱉은 건 이겼다는 환희의 함성이 아니었다.

“살았다···”

기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생존의 기쁨이었지, 상대방이 산산조각난 것에 대한 기쁨은 아니었다. 멍한 게랄드의 시야에 현재 시각이 들어온다. 이 산에 들어오기 전에 얼핏 봤던 시각에서 10분이 지나있었다.

찰나와도 같은 순간으로 여겨졌는데, 무려 10분 동안이나 목숨 걸고 싸웠다. 비록 적이었지만, 그녀 역시 하늘을 나는 여자였다. 같은 용기사이자 하늘의 동료인 입장에서, 게랄드는 그녀가 무사히 잘 탈출했으면 조금 기분이 나아졌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처참한 파괴의 흔적을 눈으로 훑던 게랄드는 칙칙한 나뭇가지와 잎들 사이에서 유난히 밝은 것을 발견했다. 무엇인지 보려고 눈을 가늘게 뜬 게랄드는 곧 욕지기가 올라오는 걸 느껴야 했다.

“우욱!”

새끼손가락이 날아간 왼손 하나였다. 그것은 나뭇가지에 꽂힌 채, 살아남은 게랄드를 배웅하듯이 바람에 흔들리며 손짓하고 있었다.

갑자기 온몸이 떨렸다. 그 손을 마주한 순간 모든 기력이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그 뒤로 기지까지 어떻게 귀환했는지도 모르겠다. 관제탑에 기억나지 않는 교신을 하고, 거의 무의식이 시키는 대로 도약광장에 착륙했다.

용 에밀리가 축사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동안, 용유지관리전대에서 게랄드가 내려올 사다리를 조작하고 있었다. 게랄드는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 중 유달리 높이 튀어나온 검은 머리의 사람을 볼 수 있었다. 헤르만 예거였다. 게랄드가 일찍 귀환한다는 소식에 맞이하러 나온 것이었다.

헬멧의 선바이저를 올리고 그와 눈이 마주친 게랄드는 힘없이 오른손을 들었다. 숫자 3을 나타내는 손이었다. 그것을 본 헤르만의 눈이 잠시 놀라움으로 커졌다가, 기쁨과 기특함으로 웃음기를 담았다.

관리전대의 여군들과 함께 독에 올라온 헤르만이 말했다.

“축하해. 에이스가 멀지 않았어.”

참 쉽게 말한다 싶었지만 루프트바페에는 에이스가 발에 채일 정도로 많은 실상이다. 모두가 뛰어난 최고 등급의 용기사라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루프트바페의 용기사들은 실력이 낮으면 에이스가 되기도 전에 하늘에서 죽을 정도로 혹사당하고 있다.

과연 에이스가 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게랄드는 자신에게 손짓하던 프랑크인의 왼손을 생각했다. 그녀도 분명 전쟁 이후 어떻게 살아갈지 꿈이 있었을 것이고, 에이스였을 수도 있고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무엇이든 그녀의 삶은 오늘 끝났다. 게랄드의 손에 의해서.

이젠 그냥 쉬고 싶었다. 룸메이트가 중령이든, 뭐든.

그렇게 일어서려던 게랄드는 그제야 자신의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랄드는 약간 절망적인 기분으로 자신을 데리러 온 사람들에게 말했다.

“못···못 일어나겠어요······.”

세 번의 공중전을 치렀고, 세 번 다 그녀의 역량을 한참 웃도는 혈투였다. 게랄드로서는 처음 겪는 사투의 현장이었다. 히데 같은 초인이나 헤르만 같은 슈퍼 에이스라면 몰라도, 게랄드는 자신이 격추시킨 상대들만큼이나 평범한 용기사였다. 날뛰는 호르몬으로 각성된 것도 이제 지났다. 게랄드는 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곤란한 얼굴의 여군들 사이로 헤르만이 다가왔다. 그는 게랄드의 겨드랑이 밑에 손을 넣어 번쩍 들어올린다. 안긴 자세가 된 것도 잠시, 어깨를 따라 자신을 두른다. 마치 게랄드가 가벼운 깃털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든 군인에게 의무적으로 가르치지만 용기사라서 별 쓸모가 없었던 응급상황행동요령—그 중 안전하게 들쳐 메는 자세였다.

‘남자에게 안기는 거 한 번쯤은 상상해봤는데, 이렇게 푸댓자루처럼 들쳐메이며 실현될 줄은 몰랐네.’

게랄드는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기절했다.

*

다행히도 내가 용기사 노조를 결성하는 일은 없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결성하기 직전까지는 갔지만, 엘리자베트 대령이 막아준 덕이다.

모두 임무에서 복귀한 뒤 열린 장교회의. 제3편대의 편대장인 나도 거기 꼽사리 끼여 있었다. 작전 인사배치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요한나 중령이 계획을 건의한 순간 나는 그냥 테이블을 뒤집어엎고 난동을 부리고 싶었다. 사람이 극한에 몰리면 눈이 돌아간다더니 정말이었다.

“좀 더 다르게 갔으면 하는데.”

그러기 직전에 엘리자베트 대령이 그 계획을 사실상 기각했다. 엘리자베트 대령이 말을 이었다. 이번엔 요한나 중령이 아닌, 비행단장을 향해서였다.

“최근 제24비행전대의 출격이 너무 잦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복출격으로 혹사당하는 쪽도 있고요.”

엘리자베트 대령은 그렇게 말하며 내 눈을 힐끗 보았다.

“물론 제국을 위해 충성하려면 몇 번이고 나가도 부족함이 없겠지만— 이대로라면 기사들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겁니다. 슬슬 휴가를 줄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비행단장은 꽤나 합리적인 사람이었기에 일정과 작전내용을 검토하고는 엘리자베트 대령의 손을 들어주었다. 제24비행전대의 3분의 2가, 그리고 그 중에서도 나를 비롯해 비정상적으로 출격횟수가 많았던 자는 그 곱절로 쉬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요한나 중령이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본 것은 물론이었다.

엘리자베트 대령이 『살인자』의 눈치를 보느라 나에게 잘해주는 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감사하다고 절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동안 요한나 중령이 철저히 악의에 가득 찬 편성으로 나를 집요하게 괴롭혀왔던 탓이다. 이제 엘리자베트 대령이 날 싸고도는 걸 알면서도 저러는 걸 보면, 참 근성만큼은 대단하다 싶다.

어쨌든 휴가가 생긴 건 사실이었기에, 나는 나중에 꾸벅 인사를 하면서 말했다.

“휴식시간 귀중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 뒤, 이것저것 볼일을 마치고 히데 중위에게도 휴가 사실을 전달했다.

그러고 다음날, 옷을 갈아입는 내 모습을 지켜보던 히데 중위가 물었다.

“그런데 왜 그 옷을 입고 계십니까? 휴가 아니었나요?”

새까맣게 달라붙는 정복에 포인트로 조금씩 들어간 진홍색. 친위대 정복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휴식시간이라도 나라에게 충성하는 길이라면 최선을 다해야지.”

우와, 방금 나 정말 애국자 같다. 그 말을 들은 히데 중위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 말이 거짓말임을 알아본 탓이다. 나는 아침부터 바깥옷을 입고 있는 히데 중위에게 물었다.

“그러는 너는? 어디 나가려고?”

보통 사람이라면 이 질문을 안 했을 것이다. 그러나 히데 중위는 집에 틀어박혀 책이나 읽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다. 휴가 첫날부터 바깥에 나갈 리가 없었다. 히데 중위가 말했다.

“지문 찍으러 가야 해서요.”

“등록부 갱신하러?”

히데 중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어제 알비 중위도 그거 찍으러 간다고 했었다.

도이체스에 거주하는 이종족들은 인간과 다르게 등록부에 양 손의 지문을 찍어야 한다. 지문감식이 수사기법에 도입된 직후 통과된 법이다. 떠돌이 생활을 하는 아랑들은 아예 신원이 없었기에 안 찍는 경우도 있지만, 인간과 결혼한 알비 중위의 어머니처럼 주류 사회에 편입한 경우는 반드시 이종족 등록을 마쳐야 했다. 그것은 식민지의 !파라들도 마찬가지였다. 통상 이종족 조부모가 3명 또는 4명만 있어도 이종족으로 분류된다. 따라서 순혈 !파라인 히데 중위는 말할 것도 없고, 1세대 혼혈인 알비 중위는 당연히 지문 날인을 해야 했다.

사실 전쟁 터지기 몇 년 전부터 낌새는 수상했다. 베르논 황태자가 ‘도이체스 제국민의 유전적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법’을 제정했기 때문이었다.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모든 남녀가 보건기관으로부터 결혼 적합성 증명서를 발급받도록 요구한다. 유전적 질병 및 전염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베른하트 법을 위반해서 결혼하려는 사람에게는 이 증명서의 발급이 거절된다.

이 베른하트 법이란 게 또 걸작이다. 제국 시민권 법과 게르만 혈통과 명예에 대한 보호법 두 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자는 ‘도이체스인 또는 순수 게르만 혈통’만이 도이체스 제국민이 될 수 있었다. 후자는 타민족(이종족이 아니다!)과의 결혼과 성관계는 범죄로 규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친위대인 나는 이런저런 소문을 주워들을 수 있었는데, 이종족과의 성관계는 ‘수간’으로 간주하고 금지시키겠다는 걸 겨우 막았다고 한다.

소급 적용 금지의 원칙에 따라 이미 태어난 혼혈인들은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 태어날 아기들은 순수한 게르만 혈통을 보존시키겠다는 굳은 다짐이다.

이런 분위기가 되어버린 탓에, 이제 지문 날인의 범위는 최근 이종족에서 타민족, 그리고 타민족 혼혈 인간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도이체스 제국은 다민족 국가이므로 항의가 거세게 빗발칠 만도 하지만, 여기는 ‘여러 종류의 게르만족이 섞인’ 다민족 국가였다. 그들의 의견은 묵살되었다.

이 광기와 같은 지문 날인의 바람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사람이 바로 돌고래였다. 인간 형태로 변신할 수 있는 이 포유류들은 변신하며 언제든지 지문을 바꿀 수 있기 때문에 날인을 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파도를 상징하는 소용돌이 문양 뱃지를 차고 격리구역에서 살아야 한다. 그들은 회색 피부로 정말 확연하게 구분가능한데도 굳이 뱃지를 달아야 하는 저의는 정말 뻔했다.

어제 단순히 지문을 찍으러 가는 것 치곤 너무 많은 짐을 싸는 알비 중위에게 어디 가냐고 물었다. 찍으러 가는 김에 휴가를 멀리 떠나겠거니 하고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다. 알비 중위가 말했다.

“어머니 뵈러 가요. 요즘 거동이 괜찮아지셨대서.”

내가 아주 살짝 놀란 기색을 보이자 알비 중위가 말했다.

“재작년에 린치를 당하셔서 하반신이 마비되셨거든요. 다행히 이번에 마법의료술 순번이 돌아오셔서 나으셨대요. 지금 회복하고 집에 오셨대서 한 번 찾아가려고요.”

재작년, 재작년. 나는 잠깐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깨진 유리의 밤(Kristallnacht)?”

알비 중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작년에 15세의 한 !파라 소년이 도이체스 대사관 공무원을 암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자 전국 각지에서 반-이종족 시위가 확산되었고, 급기야는 폭력사태로까지 번져서 수많은 상점과 종교시설이 불타올랐다. 그때 상점들의 유리창이 박살났기 때문에 이 사건에는 ‘깨진 유리의 밤’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알비 중위의 어머니도 그때 휘말린 모양이었다.

“나으셨다니 다행이네.”

순수 게르만인인 나로서는 이 말밖에 해줄 수가 없었다.

나는 이제 나갈 채비를 하는 히데 중위에게 말했다.

“내일 가지? 오늘 오전부터 비 온댔어. 천둥 번개도 동반한대.”

나는 일찍 귀환한 탓에 일기예보를 어제 미리 들을 수 있었다. 내 말을 들은 히데 중위는 입고 있던 외투를 다시 의자로 휙 던져 버렸다.

이제는 군도 히데 중위의 천둥공포증을 안다. 그러나 알게 된 시점에서 이미 그녀는 슈퍼 에이스였기 때문에 내쫓을 수가 없게 되었다. 잘 된 일이었다.

우산을 챙기는 나의 뒷모습을 보며 히데 중위가 말했다.

“도대체 뭘 꾸미고 계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식으로 다니다간 부러질 겁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 내 몸, 꽤 튼튼하다고.”

“팔씨름에서 진 주제에 말입니까?”

“야! 그건 솔직히 아니다.”

그렇게 가볍게 투닥인 뒤, 우리는 기지를 나섰다.

전철을 타는 방법도 있겠지만 우리는 과감하게 택시를 불렀다. 우리 목적지는 바서슈와인. 저번에 가려다가 계속 실패한 돌고래 격리 거주구역이었다.

이것만 보면 제국에 널린 격리구역 중 하나 같지만, 그곳에는 친위대 기밀문서 보관창고가 있다. 그것도 우리가 찾는 걸 발견할 확률이 높은 곳이었다. 우리는 이번 휴가 때 거길 노릴 작정이었다.

우리는 주 활동무대가 프로이센이었지만 중앙본부 소속 요원이었다. 그래서 저번 계몽결사 건에서도 바이어의 수사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중앙본부 소속이기에 바서슈와인으로 가도 우릴 쫓아내지는 못한다. 계몽결사 추적원이라는 신분은 여전히 유효하므로 우리가 수사하러 왔다는 핑계를 대면 그만이었다.

기밀문서 보관소이니만큼 최고 수준의 보안을 자랑하겠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안 할 수는 없으니까. 이번 한 번 만에 성공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이번은 어디까지나 사전답사차. 다음번 언젠가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내가 그 전에 격추되지만 않는다면.

그렇게 멍하니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택시가 멈춰 섰다. 벌써 도착했나 싶어 시선을 돌린 우리는 길을 봉쇄하고 있는 검은 제복들을 마주했다.

택시기사가 친위대와 실랑이하는 것을 들어 보니 모종의 이유로 도시가 봉쇄되어서 출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택시기사가 여기서 더 해줄 일은 없었으니 우리는 요금을 치르고 내렸다.

그들은 일반적인 친위대와 조금 다를 바가 없어 보였는데, 처음 보는 뱃지를 달고 있었다. 사실 저 문양 자체를 처음 보는 건 아니었지만 친위대가 저걸 달고 있는 건 못 봤다. 친위대 조직계통은 꽤나 광범위했지만, 우리는 친위대를 적으로 삼은 입장이기에 친위대와 관련된 일이라면 낱낱이 조사했었다. 그런데도 저런 걸 차고 다니는 보직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막아선 요원에게 나 또한 친위대이니 들어가고 싶으며,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우리를 막아선 사람은 장교가 아니라 병사였다. 그럼에도 완강했다. 우리가 고집을 부리자 이쪽 입구를 책임지고 있는 장교가 나왔다. 상급돌격지도자* 계급의 장교 둘이었다.

(*중위)

그들도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는 말했다.

“난 비밀국가경찰 방첩과 소속이고 본부 쪽 요원이라 관할에 영향을 받지 않아. 도대체 무슨 일이지?”

그렇게 말해도 곤란한 얼굴로 우리를 돌려보내려고만 한다. 그렇게 한참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반지도자* 한 명이 우리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말했다.

(*중사)

“혹시 루프트바페의 에이스인 헤르만 예거 씨 맞으십니까?”

우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루프트바페 군번줄을 꺼내 보이자 그가 말했다.

“그랬군요. 신문에서 본 것과 얼굴이 살짝 달라서 못 알아봤습니다.”

그의 시선이 우리 오른쪽 눈가에 닿는다. 지금은 얼굴의 얼룩을 지워버렸다. 상당히 눈에 띄는 특징이니 바로 못 알아보았을 법도 하다.

“루프트바페···?”

“루프트바페라면···”

상급돌격지도자 둘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단순히 어떤 유명인을 대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한 명이 어디론가 가더니, 아마 상급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는 다시 되돌아와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그렇게, 우리는 의문을 품고 돌고래들의 도시로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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