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프롤로그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5년 전, 아직 우리가 18살이었을 무렵. 3학년 사관생도였을 무렵, 도이체스 제국 유일의 육군사관학교 뒤뜰에 앉아, 가을 별자리를 올려다보며 한 말이었다. 우리 옆에 누워서 별을 보고 있던 이텔이 그 말을 듣자마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텔은 당혹스런 시선으로 우리를 보았다. 사내처럼 짧게 잘라버린 머리카락 때문에 일어나 앉은 이텔은 제국 유일의 황녀가 아닌 미청년 사관생도처럼 보인다. 냉정한 푸른 눈이 오랜만에 뜨거운 감정을 담아 우리를 응시한다.
이텔은 지금 당장 무슨 소리냐며 화를 내고 싶어 하는 감정과 우리의 우정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한참의 침묵 뒤 이텔이 택한 건 후자였다.
“도대체 누구를···?”
물론 그렇다고 그녀가 우리에게 동조하거나 방관할 거라는 뜻은 아니다. 끈질기게 설득할 참이겠지. 우리는 대답했다.
“우나 브라운.”
그 말이 끝나고 몇 초 뒤, 순간적으로 산소가 차단된다. 이텔이 우리의 멱살을 거세게 틀어쥐었기 때문이다. 그 손은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이텔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은 아니겠지.”
“저하께서 생각하시는 바로 그 사람이 맞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우리는 쐐기를 박으며 웃었다.
“친위대 제국정보사령부 사령관 우나 브라운 상급집단지도자.”
“헤르만··· 그런 질 나쁜 농담은 하지 마라. 어머니를 살해하고 싶다니, 그런 패륜이 어디 있나!”
몸을 사로잡은 분노 때문에 호통치면서도 누가 들을까 봐 나직하게 말하고 있다. 이텔, 정말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구나. 코앞에 가까이 붙은 이텔의 얼굴에는 순수한 분노만이 있었다. 너무 곧고, 알기 쉬운 사람.
“암살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우리는 이텔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 편한 죽음은 안 됩니다.”
어느새 이텔의 손아귀에는 서서히 힘이 풀리고 있었고, 우리는 그 손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이텔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제가 이야기하는 건 모든 층위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그 외 무수한 모든 층위에서 죽여야 해요. 그게 제가 열 살 때 한 맹세입니다.”
미소가 지어지려는 것을 억누르고, 계속한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저는 그 무엇이든 할 겁니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타국에 정보를 팔아넘기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사관학교에 들어온 건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단순히 친위대 장교의 아들이라서 들어온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이텔이 짓씹듯 말했다.
“그래서, 목표를 이루면, 그때는 어떡할 건데?”
“글쎄요?”
사실 우리의 인생은 오로지 그 목표로 빛나고만 있었다. 그 등대가 꺼진 뒤에 무엇을 해야 할 지는 생각해두지도 않았다. 우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마도··· 자살?”
그 말을 한 직후 뺨에 얼얼한 통증이 찾아왔다. 이텔이 우리의 따귀를 갈긴 것이다. 이텔은 진심으로 화가 난 모양이었다.
입 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진다. 정말로 세게 쳤다. 우리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 자살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 과정에서 제가 저지를 불법들은 절 죽이기에 충분할 테니까요.”
“막을 거다.”
이텔이 어느새 굳게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아.”
“정말 그러실 생각이십니까? 그렇게 되면 전 무엇으로 살아야 하죠? 그저 생명체로만 기능하는 삶,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 말은 이텔에게 적잖은 상처가 되었는지, 이텔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다. 뺨 한쪽에서 흘러내린 눈물 한 줄기가 초승달의 희미한 빛을 받아 반짝였다.
우리는 이텔이 정말로, 정말로 큰 충격을 받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잠시뿐, 다시 이텔은 그 싸늘한 표정으로 되돌아와 말했다.
“알려다오. 네가 왜 그러는지.”
“정말입니까?”
“알려다오.”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상관없어. 후회한다 해도, 이것은 내 의지로 한 선택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말하는 18세의 올곧은 소녀는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아는 진실을 이야기했다. 진실이라고 해봤자 무척이나 얄팍한 편린에 불과했지만. 그렇게 털어놓은 뒤 끝맺는다.
“···그래서 저는 우나 브라운이, 그녀가 속한 조직이 저지른 짓들을 파내어 만천하에 드러낼 겁니다. 그 죄가 잊히도록 두고 보지 않을 거예요. 반드시 그녀가 재판을 받도록 할 거예요. 사형을 선고할 바로 그 재판에. 그것이 브라운에게 ‘헤르만 예거’라는 삶을 부여받은, ‘에리히 아벨’이라는 소년의 의무입니다.”
창백해진 얼굴로 우리 이야기를 듣던 이텔 황녀는 한참 침묵했다. 우리는 기다렸다. 이텔의 손은 신경질적으로 바지를 쥐어뜯고 있었다. 찌푸리다가, 슬퍼하다가, 분노하다가, 체념하다가. 이텔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전부 계산하고 한 짓이구나.”
이텔은 하나뿐인 친구가 어머니를 살해하겠다는 걸 절대로 내버려 둘 성격이 아니었다.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려 한다. 그러나 친구이기에, 당장 위험분자로 신고하는 대신 동기를 캐내어 설득하려 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러나 이텔은 너무 올곧은 사람이었다. 또한 자신의 제국에 높은 긍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제국의 치부를 발견한다면 가만히 있지 못한다. 위대하고 명예로운 도이체스 제국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썩은 살은 반드시 도려내야 마땅하다.
그리고 우리 또한 사적인 복수가 아닌, 모든 사실을 폭로하고 정당한 법 절차를 거쳐서 죄를 심판하겠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텔은 우리에게 협력하게 된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이텔이라면.
우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짓말을 했다.
“이 추악한 이야기를 이해해 줄 사람은 저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할 때가 온다면 그 상대는 바로 이텔일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이텔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우리의 눈을 쏘아보았다.
“넌 뭐냐.”
“전 당신의 벗 헤르만 예거이지요. 아, 본명은 따로 있지만—”
“그딴 말은 집어치워.”
이텔의 눈이 우리의 눈과, 우리의 뺨을 번갈아 쳐다본다. 얼룩이 가려진 뺨을. 이텔이 말했다.
“너는 누구지?”
이텔의 눈은 놀랍게도 우리의 눈, 우리의 심연, 그리고 에리히를 정확히 바라보고 있었다.
에리히의 감정이 불안하게 요동치더니 확고히 자리를 잡아갔다. 안도감이었다. 환희였다. 자신을 알아봐준 것, 자신의 눈을 본 것, 자신에게 말을 건 것에.
그것은 몸이 오싹오싹할 정도의 기쁨이었다. 그동안 몇 번 에리히가 이텔과 대화한 적은 있었지만 이텔은 헤르만 예거의 허상을 겹치며 이야기한 것에 불과했다. 처음으로 다른 존재에게서, 그것도 이텔, 에리히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인정받았다.
에리히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