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에필로그 - 남은 자의 의무
모두가 분투하는 동안 지상은 이미 전투가 끝나 있었다. 우리는 기지로 귀환했다. 황룡은 잡지 못했다. 히데 소위가 백룡을 잡으러 떨어져 나간 순간 저 멀리 도망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교전한 상대가 누구인지는 알아낼 수 있었다. 비상탈출장치로 탈출한 녹룡의 용기사와 청룡의 용기사 중 청룡의 용기사가 아군의 진지 한가운데에 낙하한 탓에 포로로 사로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포로는 프랑크인이었다.
그 와중에 충격적인 사실도 밝혀졌는데 프랑크인은 브리타니아 및 다른 여러 나라와 다르게 공군 창설 때부터 기관포를 탑재하고 훈련에 임했다는 것이다. 일정 위력을 보장하는 용기사를 대량생산할 수 있는 방법이니까. 그냥 한가롭게 정찰용도로, 그러다 서로 만나면 하늘의 기사들처럼 결투하는 것으로 안이하게 생각해온 나라들은 뒤통수를 맞았다.
대대적인 군비증강이 있을 것이다. 모든 안장에 기관포를 설치하기까지는 베테랑 용기사들만 하늘로 나설 것이다. 편대장들이 편대원이 되고, 대대장이 편대장이 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앞서 중요한 행사가 있었다. 칼레샤 소령의 장례식이었다.
칼레샤 소령은 루프트바페 정복 중 가장 좋은 것을 입고 관에 누워 있었다. 기관포를 몸통에 맞았기 때문에 칼레샤 소령의 머리는 온전한 모습 그대로였다. 마치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빈드발드에서 여기까지 올라왔을 칼레샤 소령의 유족들은 작게 흐느끼고 있었고, 분위기는 침통했다.
화장장까지 관을 운구하는 데에는 여섯 사람이 필요했다. 화장은 유족들의 뜻이었다. 전시에 바이어에서 빈드발드까지 관을 운반하기는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제3편대원 전원이 관의 오른쪽을 들고, 제1비행대대에 남아 있는 편대장 세 명이 관의 왼쪽을 들었다.
칼레샤 소령이 재가 되어 작은 상자에 담기자 유족들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훌쩍이고 있는 알비 소위는 장례식에 처음 와보는 게 확실했다. 히데 소위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눈물은 흘리지 않고, 다만 어두운 표정으로 장례의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제3편대원 전원에게는 3박 4일의 휴가가 주어졌다. 루프트바페 1기 용기사 중 처음으로 적을 격추한 사람들에 대한 포상휴가였다. 우리 셋 다 한 명씩 격추시켰으니까.
그러나 내 생각엔 첫 실전의 충격에서, 그리고 편대장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라는 의미도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우리의 공훈을 치하하러 내려온 델 중장이 그런 의미의 말을 흘렸기 때문이었다.
특히 두 사람에겐 더욱 충격이 큰 것 같았다. 나중에 알비 소위에게 들으니 무뚝뚝했던 겉모습과는 다르게 제3편대원들을 정말 잘 챙겨주었다고 했다. 가능한 한 이들을 보호하고, 감싸고, 어머니처럼 돌보고.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넌 고향으로 내려가는 거야?”
“네! 탈 데스 토데스라고, 프로이센에서 남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되는 곳이에요.”
“뭐야, 그 살벌한 이름은.”
“이름이 이래서 그렇지 좋은 곳이에요. 다음에 대위님도 한 번 놀러 와요!”
장례식장에선 거의 유족들만큼 슬퍼하던 알비 소위였지만 밝은 성격으로 금방 떨쳐낸 모양이었다. 기차역으로 향하는 알비 소위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나는 숙소로 돌아왔다. 원래 이런 갑작스러운 휴가가 주어진다면 이텔을 한 번 찾아가거나 했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이텔은 육군 중령이기 때문에 전선에 나가 있었다. 뭐, 혼자서 휴가 보내는 것도 괜찮다. 내 성격이 그렇게 생겨먹었으니까. 나는 문을 열었다.
히데 소위가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머리맡에는 카트리나가 있었다.
히데 소위가 책을 살짝 덮으며 말했다.
“휴간데 안 가십니까?”
“그러는 너는.”
“제 고향은 너무 멉니다.”
하르트란트까지 가려면 도이체스 제국의 거의 절반을 종단해야 한다. 그리고 히데 소위는 하르트란트에서 가출해 여기까지 올라온 사람이다. 하르트란트로 돌아가 봤자 그 갑갑한 시설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돌아갈 곳이 없어. 고향도 없고.”
그 말에 히데 소위가 조금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겠지.
그나저나, 피폐해진 마음엔 부드럽고 따뜻한 고양이가 최고인데 히데 소위에게 가 버렸다. 내 편은 아무도 없다. 비정한 세상 같으니.
어차피 고양이가 없는 공간은 무의미.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철저히 사치와 향락으로 시간을 보내줄 테다.
한 번 결심한 건 그대로 실천에 옮겨야 마땅했다. 우선은 술이다. 맥주도 좋아하지만, 이 세상엔 맛있는 칵테일이 너무 많다고. 그동안은 너무 바빴던 데다가 전쟁 터지고 나선 컨디션 난조 때문에 꿈도 못 꾸었던 술이다. 마음껏 마실 거다.
그래서 평소 가던 크나이페 대신 좀 더 고급스러운 술집을 찾았다. 그렇다고 크나이페를 안 간 것도 아니었다. 맥주도 맛있거든.
물론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마신 건 아니었다. 술이 나를 먹어서야 되겠나. 기분 좋아질 정도로만 취한 다음 나는 바이어 내의 오락시설을 마음껏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매일 술냄새를 풍기며 들어오자 히데 소위가 살짝 경멸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히데 소위의 양 볼을 쭉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이고, 우리 어린이. 술 못 마셔서 삐졌어요?”
“으브브브!”
새삼 이렇게 보니 히데 소위는 정말 작았다. 이미 훌륭한 전사이자 군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조그맣고 예쁜 소녀이기도 했다. 얘를 17살이라고 한다면 누구도 믿지 않을 거다. 아마 전부 초등학생으로 보겠지. 이 쪼끄만 애가 커다란 용 위에 올라탄다니, 정말 아이러니다.
“귀여워라—뚧!!”
허리가 반으로 접히는 충격에 나가떨어졌다. 주먹 한 방으로 나를 무력화시킨 히데 소위가 말했다.
“성희롱 주정뱅이 대위님. 얼른 부동액 마시고 술 깨십시오.”
“잠깐만잠깐만 뭔가 위험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달달해서 맛있을 겁니다.”
“죽으라는 거냐!”
나는 얼얼한 명치를 문지르며 말했다.
“너 자꾸 여기만 때릴래? 여기 엄연한 급소라고! 죽으면 어떡할 거야!”
“오, 모든 건 야와의 뜻이지 어쩌겠습니까. 관 정도는 들어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
그렇게 티격대면서 보냈다. 그나저나 히데 소위는 책을 참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들어올 때나 나갈 때나 언제나 책을 읽고 있었다.
각자 나름의 방식이 있는 거겠지.
휴가 마지막 날, 나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아침 일찍 나온 건 똑같았다. 일찍 일어난 새가 부지런히 노는 법이지, 암.
하지만 지난 3일 동안 지나치게 열과 성을 다해 놀았던 탓에 바이어에는 더 이상 놀 만한 데가 없었다. 갔던 데를 또 갈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또 가도 재미있을 테니까. 아니면 다른 도시로 갈까?
좋은 생각이었다. 바이어와 바로 붙어 있는 바서슈와인이라는 도시가 있었다. 돌고래 집단거주구역이라고 들었다. 그동안 한 번도 돌고래를 실제로 본 적 었었으니, 새로 개척하는 마음으로 가면 되겠지. 사실 바서슈와인은 그것 말고도 정말 중요한 의미가 있었으나, 굳이 지금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쉬러 가는 거다.
거의 마음을 굳혔을 때쯤, 내 눈에 극장의 입간판이 들어왔다.
에드셀 뵈시의 신작?
그 순간 단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이건 봐야 한다.
에드셀 뵈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감독이었다. 연출도 연출이지만 각본도 정말 대단했다. 감동스런 장면도 시기적절하게 끼워 넣어 관객의 마음을 고양시킨다.
무엇보다, 로맨스 영화의 제왕이었다.
“성인 한 명이요.”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나는 표를 끊고 있었다. 직원이 나를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키 178센티미터의 시커먼 남성이 에드셀 뵈시의 영화를 혼자 보러 온다니, 의외였던 모양이지. 하지만 남자가 로맨스 영화 좋아할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런 눈으로 보는 걸까.
‘너 의외의 분야에서 진짜 뻔뻔하다니까.’
나와 함께 연인 가득한 분홍색 카페에 가서 특대 샤베트를 같이 퍼먹었던 폰조 상급돌격지도자의 말이 순간 뇌를 스쳤지만, 무시했다.
표는 오전 것은 다 팔리고 오후만 남아 있었다. 역시 뵈시의 작품이었다.
오전을 대충 때운 뒤 상영시간 전에 들어와 팝콘과 콜라를 샀다. 이 콜라라는 게 물건이었다. 빈랜드에서 만든 음료인데 톡 쏘는 탄산과 특이한 맛이 일품이다. 아직 빈랜드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만약 참전한다면 우리 추축국 쪽이 아니라 연합군 쪽에 붙겠지. 그러면 콜라 수입도 끊길 거다. 슬픈 이야기였다.
영화를 보기 전 마지막으로 화장실을 갔다 온 나는 새까만 머리를 양갈래로 묶은 작은 실루엣을 발견했다.
“히데?”
조심스레 부르자 히데 소위가 뒤돌아본다. 무릎 위까지 오는 흰 원피스에 남색의 귀여운 리본을 달았다. 베이지색 단화에 레이스가 달린 하얀색 니삭스.
마치, ‘혼자서 영화관에 오다니 대단해요!’라고 칭찬하거나, ‘어머니는 도대체 어디 가셨니?’라고 물어보고 싶은 모습이다.
히데 소위를 빨리 발견할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하지만 꼬마 숙녀분, 이 영화는 15살 이상의 언니들만 볼 수 있어요.”
“저는 17살입니다!”
“아무리 영화가 보고 싶어도 거짓말은 나빠요.”
“으으! 진짜라고요!”
여기서 웃었다간 죽겠지. 그러니 마음속에서 실컷 웃을 테다. 나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보호자 동반은 괜찮지 않나요?”
내 목소리에 직원이 고개를 든다.
“예. 성인 보호자와 함께라면 가능합니다만···”
직원의 눈이 그쪽은? 하고 묻는 표정이라 나는 대답했다.
“이 아이의 사촌오빠입니다.”
“알겠습니다.”
순순히 표를 끊어주는 직원을, 히데 소위가 배신감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표를 받아가는 히데 소위에게 툭 던진다.
“영화관 처음이야?”
이전에 영화관을 한 번이라도 가봤으면 이 사태를 예상하고 신분증을 미리 챙겨왔을 거다.
히데 소위가 눈에 띄게 움찔한다.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나는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파라가 거짓말 하는 거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
나는 지나가는 말로 슬쩍 던졌다.
“버터맛 팝콘이랑 콜라 세트 시키고 영화 보니까 재밌더라.”
어쩌면 카라멜 팝콘을 추천하는 게 더 나을 수 있었다. 히데 소위가 식당에서 달달한 디저트를 많이 먹는 걸 봤으니까. 하지만 단 걸 좋아하는데 카라멜 팝콘을 싫어하는 나 같은 경우도 있으니 위험부담이 크다. 제일 무난한 버터맛이 낫겠지.
“도대체 무슨 영화를 보려고?”
히데 소위가 내민 표를 읽는다. 나와 같은 영화였다. 심지어 상영관도 같았다.
“저기, 너무 대놓고 얼굴 구기면 나 상처받거든?”
“같이, 보게, 되어서, 매,우, 기쁘군요, 대위님.”
졌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히데 소위는 결국 카라멜 팝콘을 시켰다. 우리 둘은 의외로 좌석이 가까웠다. 일찍 예매한 나는 정가운데의 명당자리, 히데 소위는 내 대각선 방향으로 뒷줄.
영화 시작하기 전 광고 시간에 팝콘을 다 먹어버린 나는 콜라를 마시며 영화를 봤다.
영화를 다 보고 히데 소위와 함께 쓰레기통에 음식물을 버리는 동안, 내 얼굴을 본 히데 소위가 묻는다.
“울었습니까?”
“당연한 거 아냐? 역시 에드셀 뵈시는 대단해. 어떻게 거기서 그 사건을 터뜨리는지. 아, 이번 영화도 감동적이었어.”
내가 운 것 가지고 무언가 꼬투리를 잡거나 놀리려고 했던지 히데 소위가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약간 촉촉한 눈을 비비고 코를 한 번 훌쩍거린 나는 히데 소위에게 물었다.
“넌 다음 스케줄이 있니?”
약간 걱정되었다. 험한 꼴을 볼 거라는 걱정은 당연히 아니었다. !파라니까. 하지만 저 모습으로는 계속 오해를 받을 것이다.
“집에 갈 겁니다.”
“뭐?”
“더 이상 할 일이 없습니다.”
“할 일이 없다고?”
나는 히데 소위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저녁에 하는 광장 분수대 음악쇼도 구경 안 하고, 포켓볼도 안 치고, 수도권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미정원도 안 보고, 지금 도이체스를 순회하는 아르누보 전시회도 안 보고, 거의 프로이센만큼 뛰어난 브리타니아식 딸기 디저트 카페도 안 간다고?”
“···디저트 카페?”
“그쪽에 신경 쓸 줄 알았다.”
갈등하는 히데 소위를 보며 말했다.
“누릴 수 있을 때 최대한 누려야지.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여러 의미를 담고 있었다. 우리 목숨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도 했고, 전쟁이 어떻게 진행될 지도 모른다. 한가하게 딸기 디저트나 미술관을 누릴 시기는 오지 않을 것이다.
“···디저트는 맛있습니까?”
나는 격한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딸기와 딸기소스를 얹은 커스터드 크림 파이도 맛있고, 딸기 크림 롤케익도 맛있고, 딸기 케이크 조각도 맛있었지. 거기다 홍차를 곁들이면—”
“홍차가 뭡니까?”
“브리타니아인들이 물처럼 마시는 차가 있어.”
솔직히 그 카페는 남자 혼자 가기엔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뻔뻔했기 때문에 레이스와 프릴, 로코코 방식으로 꾸며진 카페에서 우아하게 딸기 디저트를 해치웠다.
그렇게 디저트가 얼마나 맛있는지 풀어내자 히데 소위가 동하는 표정이 되었다. 거의 다 넘어왔군. 나는 장황한 설명을 마치고 마지막에 무심코 덧붙였다.
“근처에 레버부어스트*랑 블루트부어스트** 잘 하는 집도 있었—”
(*간으로 만든 소세지/**피를 넣은 소세지.)
“집에는 나중에 돌아가겠습니다.”
걸렸다. 그리고 히데 소위가 덧붙인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전 그것들이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잘 아시는 대위님, 안내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죠, 꼬마 숙녀분.”
“그놈의 꼬마 소리 좀 그만하십시오.”
“알았습니다. 작은 아가씨.”
“···바깥이니 참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디저트를 먹었다간 저녁을 하나도 못 먹을 게 뻔했기에 우리는 소시지를 잘하는 요릿집으로 향했다.
나는 레버부어스트를 시켰고 히데 소위는 충엔부어스트를 시켰다. 충엔부어스트는 피를 넣어 만든 블루트부어스트 중에서도 그 안에 돼지의 혀 고기를 썰어 넣은 소시지로, 씹히는 맛이 일품이었다. 노점이 아니라 식당이었기 때문인지 빵이 아니라 감자요리와 자우어크라우트가 함께 나왔다.
“맛있군요.”
음식 칭찬에 인색한 히데 소위가 툭 던진 말이었다. 이곳에서 남서부 요릿집을 찾을 거라곤, 그리고 맛도 훌륭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이른 저녁을 먹고 배도 좀 꺼트릴 겸 미술관으로 갔다. 가는 길에 장미정원이 있어서 그쪽도 구경했고. 향수로 유발된 독한 향이 아닌 자연스러운 진짜 장미향이 우리를 감쌌다. 장미덩굴로 감아 놓은 아치를 통과하고 나자 아르누보 전시회를 열고 있는 미술관이 나왔다.
히데 소위는 처음엔 좀 시큰둥했다. 그러나 막상 전시회장 안으로 들어가자 누구보다도 눈을 반짝거리며 구경했다. 아르누보는 화려한 장식과 평면, 선,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미술 양식이었다. 그 중 독보적인 건 ‘황금의 마술사’라고 불리는 오스트리아의 화가. 그림에 진짜 금박을 입혀 찬란하게 번쩍거렸다. 히데 소위는 거기서 눈을 뗄 줄 몰랐다.
히데 소위의 반응이 생각보다 열성적이어서 미술관을 나온 건 조금 늦은 시각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도착한다.
브리타니아식 딸기 디저트 카페.
나는 전에 시켰던 메뉴에서 딸기 타르트만 더 추가해서 똑같이 시켰다. 음료가 먼저 나오기 때문에 예쁜 다기들이 놓였다. 히데 소위는 살짝 겁먹은 표정이었다. 다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건 여기 도이체스인들 전부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종업원은 잔을 세팅해주면서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 히데 소위의 잔에 담긴 다즐링. 한 모금 마신다.
“묘한 맛이군요.”
“지금은 그렇지만 디저트를 먹고 나면 이것만큼 어울리는 음료가 없을 거야.”
나는 얼 그레이를 마신다. 구석에 따뜻한 우유가 놓여 있긴 하지만 겁나서 시도해보지는 못하겠다. 브리타니아인들은 여기다 우유를 타서 마시겠지. 도대체 어떤 맛일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오늘 참··· 대위님의 여러 가지 모습을 보는군요.”
“뭐, 의외의 멋진 면이라도 발견했나?”
히데 소위가 인상을 팍 구기더니 말했다.
“취향이 참 소녀스러운···”
“무슨 소리야. 취향에 성별은 없다. 다만 남자들이 꼴에 자존심 세우느라 안 하고 있는 거지. 세상의 즐거운 것들의 반을 놓치고 사는 거야. 안타깝지.”
그러다가 디저트가 도착했고, 히데 소위가 포크로 커스터드 크림 파이를 조금 떼어서 입에 가져갔다.
히데 소위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고 헉 하고 숨을 들이킨다.
천천히 즐겨야 할 디저트이건만, 히데 소위는 맹렬한 기세로 먹기 시작한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중간에 홍차로 계속 입가심을 하며 먹는다. 그렇게 디저트들이 순식간에 비워졌다.
포크를 내려놓은 히데 소위가 환하게 웃었다.
“맛있어요, 정말 맛있어요!”
나는 잠깐 숨을 멈추었다. 히데 소위의 딱딱한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지며 환히 빛나는 순간, 이 주변 모두가 빛나는 것처럼, 그런 착각이 들었다. 순수한 웃음 그 자체. 그렇기에 매혹적이다.
정신 차려라. 눈앞의 사람은 !파라다. 그 외형에 잠시 현혹된 것뿐이다.
자신이 환하게 웃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히데 소위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이 힘겹게 말을 뱉는다.
“나··· 나···”
히데 소위는 울컥 치밀어오르는 것을 간신히 억제하고 말했다.
“이렇게 있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폭발할 것 같은 내부를 억누르며, 내뱉는다.
“칼레샤 소령님은 돌아가셨는데, 슬퍼해야 하는데,”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린다.
“이렇게 웃고, 마시고, 기뻐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혼란스러움으로 범벅이 된 히데 소위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한다.
“마치 죄를 짓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그렇지?”
알비 소위가 말했었다. 칼레샤 소령은 정말 어머니처럼 그들을 챙겨 주었다고. 그리고 어머니를 어릴 적에 잃은 히데 소위는 성장하고 나서 그런 보살핌을 처음 겪은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륵, 흘러내렸다.
히데 소위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히데 소위는 그동안, 칼레샤 소령이 죽은 뒤로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그랬다.
나는 팔을 뻗어 히데 소위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남은 자의 의무 같은 건 없어.”
그 말에 히데 소위가 고개를 든다.
“죽음을 겪은 자는 슬퍼하지. 하지만 이게 남은 자를 옥죄이기도 해. 하지만 모든 순간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생활하고, 견뎌내고, 가끔 웃고, 그러다 시간이 흘러 기억으로만 꺼내볼 수 있고. 다 그런 거야. 마음껏 기뻐해도 돼. 마음껏 누려. 남은 자의 의무 같은 게 있다면, 아마 그런 쪽일 거야. 넌 진심으로 칼레샤 소령님의 죽음을 애도했잖아. 그걸로 충분해.”
좀 더 물어보니 히데 소위에게도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이게 처음이었다. 그리고—
“악몽을 꿨어요.”
히데 소위는 두 번째 출전에서 다섯 대의 전차를 파괴시키고 보병 한 무더기를 죽였다. 그녀는 !파라다. 자신이 발사한 로켓이 어떤 일을 벌이는지, 어떤 식으로 사람을 망가뜨리는지 똑똑히 보았을 것이다. 나중엔 공중에서 백룡의 용기사를 직접 발동한 마법으로 죽이기까지 했다.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겪은 정신에 충격이 온 것이다.
나는 말했다.
“나도 내가 죽인 사람의 악몽을 꿔.”
이번 전쟁에서 내가 죽인 사람은 없다. 히데 소위가 흠칫 놀란다.
“그건 어쩔 수 없어. 하지만 이걸 기억해. 넌 제국을 수호한 거야.”
클로리스 중위에게 해준 말과 비슷한 영역이다.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히데 소위의 눈이 살짝 커진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얼굴을 지켜보았던 !파라는 말했다.
“대위님은 정말 거짓말쟁이군요.”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눈앞에 놓인 얼 그레이 차를 한 모금 마셨을 뿐. 그 액체는 갑자기 쓴맛이 되어 내 목구멍을 넘어갔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화려하게 반짝거리는 분수대까지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나도, 히데 소위도 즐거움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채로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문을 열자 카트리나는 우리 두 사람을 모두 반겼다.
그렇게 남은 자들의 휴식이 끝났다.
『...그리고 너는 용이 되어』1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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