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4장. 미숙한 기사들과 사선의 끝-(1)
그 이후 한 달은 마치 꿈처럼 흘러갔다.
누가 봐도 세르보 과격파의 소행인 것은 명백했다. 그러나 보헤미아는 즉각 대응하지 않고 약 한 달 동안 시간을 끌었다. 도이체스 제국의 전폭지지를 약속받는 데 1주일, 내각을 수립하는 데 3일, 거기서 의견을 조율하는 데 10일. 최후통첩문은 그때에도 발송되지 않았다. 프랑크 공국의 대통령과 외무장관이 키예프 연방을 방문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보냈다간 프랑크와 키예프가 세르보 문제에 공동대응을 할 게 뻔했다.
그리하여 최후통첩은 약 한 달의 시간이 지나서야 세르보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십수 개의 불평등 조약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그 한 달 동안 어찌나 신경을 썼던지 나중에는 위염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누가 봐도 불공평한 조약이었지만, 세르보는 받아들여야 했다. 보헤미아라는 대국을 건드린 대가가 그 정도는 되어야 하니까. 계몽결사가 세르보 과격파를 사칭하고 그런 것인지 아니면 세르보 과격파에게 용병기를 제공해준 것인지는 아무 상관없었다. 일어난 일과, 보여진 일은 이렇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세르보는 거부했다.
모두 거부한 건 아니었다. 일부 조약은 수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보헤미아가 만족할 리가 없었다. 보헤미아는 세르보와 국교를 단절해 버렸다.
왜 세르보가 그런 판단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다. 여러 정치적 판단이 엇갈려서 그렇게 된 것이겠지.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무척이나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보헤미아는 세르보에게 선전 포고를 한다.
그리고 도이체스 제국은 보헤미아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했었다. 도이체스도 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선전포고의 연쇄가 이어지면서, 아르텐 대륙 전체가 전쟁의 광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본래라면 이것이 너희의 첫 실전이 되어야 마땅했으나—”
요한나 중령이 연설했다.
“루프트바페 1기의 절대다수가 간단한 마법 하나도 발동시키지 못하는 상태다. 하지만 군대라는 건, 전쟁이라는 건 네년들처럼 쓸모없는 전력이라도 놀게 내버려두지 않아. 제1비행대대는 그러므로 정찰 임무만 수행한다. 하루빨리 용과 호흡을 맞춰 마법을 발동시킬 수 있도록. 빨리 해내는 년은 살고, 뒤처진 년은 죽을 거다.”
그리하여 제1비행대대는 오늘 출격하기로 했다. 제1편대와 2편대가 내일, 3편대와 4편대가 모레. 다들 이 현실을 믿기 힘든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녀들이 육군이었다면, 하다못해 해군이었어도 전쟁의 현장에서 그 누구보다도 전쟁을 실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은 루프트바페였다. 그 중에서도 용기사였다. 용을 타고 하늘의 전장에 나가기 전까진 이 현실이 와 닿지 않는 것이다.
내가 아직 친위대였다면 전방에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나갔을지도 모른다. 친위대에서 병력을 차출해 무장친위대를 설립, 그들을 최전선에 보낸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다. 이런 생각은 다 무의미하다. 이미 나는 용기사이고, 거기에 만약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일. 내일부터는 전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늘은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자유시간이었다.
나는 제1편대원과 제2편대원을 통틀어 가장 상태가 나빠 보이는 사람을 불러내어 데려갔다.
“···대낮부터 술입니까.”
“낮부터 마시고 오늘 안에 깨는 게 낫지. 밤에 마시면 더 큰일 날 거야.”
출격 12시간 전부터는 술을 마시면 안 된다. 따라서 지금, 대낮에 마셔야만 괜찮다. 클로리스 슈타인 중위가 크나이페*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도이체스식 맥주집, 주점.)
“이런 데는 처음이지?”
클로리스 중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가의 아가씨가 올 만한 장소는 아니지. 또한—”
나는 맥주 두 잔을 시켰다.
“백작가의 아가씨가 마실 만한 술도 아니고. 하지만 한 번쯤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우리는 크나이페의 어두침침한 구석에 가서 앉았다. 우리와 클로리스 중위는 서로 마주보고 앉았다. 우리는 품속에서 크림을 꺼내어 눈 밑에 펴 발랐다. 거울이 없었지만 십사 년 동안 해온 일이다. 아마 제대로 발렸을 것이다. 그걸 본 클로리스 중위가 쿡쿡 웃었다.
“마치 아가씨 같군요, 대위님.”
“아가씨들은 식탁 앞에서 화장을 고치진 않을 것 같은데.”
“그건 맞아요.”
우리는 크림을 품속에 집어넣고 클로리스 중위에게 말했다.
“내일은 그럴 일이 없겠지만, 결국 나중에는 싸워야 할 거야. 우리는 용기사니까. 상대방을 죽여야 하지.”
그 말에 클로리스 중위가 움찔했다.
“현대인은 한평생 절대 살인해선 안 된다는 계율을 뇌 속에 각인하면서 살아.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전장으로 내몰면서 ‘하지만 저 사람은 죽여야 한다!’라고 말하지. 결코 쉽지 않아. 정말로 쉽지 않아. 어떤 방식으로든 망가지게 되어 있어.”
우리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냥 이 말을 해주고 싶었어. 망가지지 않으려면—”
클로리스 중위가 고개를 든다.
“—네 적을 절대로 사람으로 여기지 마.”
클로리스 중위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상대는 제국을 짓밟을 적, 동포를 유린할 적, 괴물. 날 죽이려 하는 괴물. 악마. 뭐든지 좋아. 그들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야.”
평생 지켜온 신념과 반대되는 행동을 강제할 경우, 인간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인지부조화를 일으켜 원래부터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해왔던 것마냥 합리화를 하든지, 아니면 정신에 손상을 입고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에 시달리든지.
그러나 그것을 줄일 방법이 있다. 정당화. 자기 행동에 대한 정당화. 역사적으로도 대의명분이 없고 부끄러운 전쟁일수록 병사들의 트라우마는 엄청나다.
“반대로, 너는 제국을 수호하는 엘리트야. 네가 적을 하나씩 죽일 때마다 제국은 승리로 더 다가갈 거야. 너는 귀족의 고귀한 의무를 지키는 거지.”
따라서, 아무리 악한 행위일지라도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만 있다면 부서지지 않는다.
“···왜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해 주시는 거죠?”
“나는 평민이야.”
한쪽은 귀족의 피가 흐르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와 『살인자』만이 간직해야 할 비밀이다. 우리는 클로리스 중위의 얼굴을 본다. !파라만큼은 무리지만, 수사관으로 훈련받았기 때문에 상대의 감정, 생각의 일부는 읽어낼 수 있다. 클로리스 중위는···
“따라서 네 제안은 정말 매혹적인 것이었지. 이건 그 보답이야.”
우리는 웃었다.
“나에게 호의를 베푼 자가 망가지는 걸 두고 볼 성미는 못 되거든.”
클로리스 중위의 손이 잘게 떨렸다.
“부디 깊이 마음에 새겼으면 좋겠어.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이니까.”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악마는 없다. 다들 자신만의 명분을 가지고 악을 행한다. 우리는 친위대원이 가지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없다. 친위대원이 가지는 사명감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훗날의 폭로를 위해서라는, 그런 얄팍한 명분을 가지고 스스로를 지탱한다. 그것마저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대위님은, 설마···”
거기까지 말한 클로리스 중위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쓸데없는 말이었군요. 대위님, 대위님은 두렵지 않아요? 정말 이 모든 게 두렵지 않은 거예요?”
“왜 두렵지 않겠어.”
우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두려워. 목숨을 건 적이 처음이 아닌데도 미칠 듯이 두려워. 나는 매번 목숨을 걸 때마다 두려웠어. 이번도 마찬가지야. 그러니—”
클로리스 중위의 눈을 바라본다.
“두려워하는 너 자신을 경멸하지 마.”
그 말을 들은 클로리스 중위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결국 눈시울이 붉어졌다.
“진짜로 나가서 싸우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냥 처음부터 백작 영애의 삶에 만족하며 살았다면, 나는 귀족 여자니까 전쟁터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진짜로 전쟁에 나가서, 진짜로 싸우게 될 줄은···”
“당연한 거야. 누가 예상이나 했겠어. 당연히 두렵고, 당연히 도망치고 싶은 거야. 그건 잘못된 게 아냐.”
그러자 클로리스 중위의 오른쪽 눈에 눈물이 맺혔다. 손을 뻗어보았다. 클로리스 중위의 어깨가 닿는다. 우리는 그 어깨를 토닥였다.
눈을 깜박여 눈물을 없앤 클로리스 중위는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손을 내저었다.
“함께하지 않겠냐고 제안해놓고는 약한 모습을 보였군요.”
클로리스 중위를 따르는 무리에게는 절대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없었을 것이다. 클로리스 중위는 귀족이라는 마음의 벽을 나에게만 살짝 허문 것 같았다.
언젠가는 이 관계를 써먹을 날이 오겠지. 피차 저쪽도 마찬가지니까.
눈물을 닦은 클로리스 중위는 이미 고고한 백작가의 여식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클로리스 중위는 맥주를 마셨다. 낯선 맛에 살짝 찡그리기는 했지만, 꿀꺽꿀꺽 잘 마신다. 그래서 우리 쪽에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천천히 마셔. 약한 술이라지만, 그렇게 벌컥벌컥 마셔버리면 안 좋아.”
우리는 구운 소시지가 있는 접시를 그녀 쪽으로 밀었다.
“안주랑 같이, 쉬엄쉬엄 마셔.”
이곳의 소시지를 먹어본 적은 없었지만 딱 보기에도 먹음직스럽게 생겼다. 클로리스 중위가 포크로 소시지를 찌르는 동안 우리도 한 입 먹었다. 맛있었다.
남은 시간 동안 우리는 각자의 용과 마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보냈다. 우리 용은 생명계였고 클로리스 중위의 용은 원소계였다. 그러나 이것을 안다고 끝은 아니었다. 마법의 작동원리를 알아야 용의 마법을 발동시킬 수 있다. 그것이 용기사들이 마법을 배우는 이유였다.
클로리스 중위가 막히는 곳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난 뒤, 우리는 일어섰다.
“어때? 서민의 술은?”
클로리스 중위가 씩 웃었다.
“가끔씩이라면, 나쁘진 않네요.”
그렇게 클로리스 중위는 다음날 출전하게 되었다. 남은 자들에겐 아직 내 차례가 아니라는 안도감이, 그들이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공존했다. 나 또한 완전히 태연할 수 없어서 하루 종일 카트리나만 붙들고 있었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모두를 볼 수 있었다. 모두 무사히 돌아왔다. 안전하게 정찰비행만 했으니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식당은 약간 축제 분위기였다.
그렇게 먹고, 마시고,
다음날.
용기사복을 차려입고 축사로 향한다. 내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파라는 전투화장을 공들여 새겨 놓았다. 반쪽짜리 아랑은 룬 문자가 새겨진 나무 목걸이를 꽉 움켜쥐었다가 놓는다. 나는 뺨의 얼룩을 문질렀다. 여기 이곳에 헤르만 예거가 있다는 걸 확인하듯이. 각자의 방식으로 각오를 다진 우리들은 각자의 축사로 걸어 들어가서, 용의 등 위에 올라탄다.
크르르륵.
아바셋이 으르렁거린다. 내가 극도로 긴장한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여러 번의 훈련 동안 나에게 하나도 필요 없다고 판명 난 조종간을 꽉 움켜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친 듯이 떨리는 손을 들킬 것 같았다.
도약광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를 넘어서는 날,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햇살이 쨍하게 내려쬐는 하늘은 이 모든 사람들의 다툼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결국, 사람은 그 하늘마저 전쟁터로 만들어 버렸지만.
정해진 구역에 모두 모였다. 나와 아바셋, 칼레샤 소령과 기셀라, 히데 소위와 비베카, 알비 소위와 발다.
칼레샤 소령이 전체 통신으로 말했다.
“여기는 첫 번째 C(채자르). 이륙 대기중.”
“여기는 관제실. 30초간 대기하라.”
“수신양호.”
칼레샤 소령이 그렇게 말하는 동안 알비 소위는 우리 채널로 떠들었다.
“우리, 이번 출격에서 돌아오고 나면 카페 가요! 거기 디저트 맛있는데.”
내가 기겁해서 말했다.
“그런 말 하지 마! 불안하잖아!”
“모두 살아서 돌아가요!”
“아아아악 그만해 이번 생은 망했어.”
그렇게 시답잖은 대화를 하며 눈앞을 본다. 지금 내 시야에는 글자가 둥둥 떠 있다. 적어도 일곱 가지 이상의 정신계 마법을 중첩하여 내 시각중추에 직접 데이터를 전송하는 것이다. 왼쪽 구석에 시계가 떠 있다. 초 단위로 표시되는 시각은 내가 저절로 삼십 초를 헤아리도록 만든다.
꿀꺽.
편대원 통신으로 누가 침 삼키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긴장 때문이다. 마법의 성능이 지나치게 좋은 탓에 저런 사소한 소리까지 들리는 것이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심지어 칼레샤 소령마저도. 그러자 통신기에서 부루퉁한 볼멘소리가 튀어나온다.
“웃지 마십시오!”
“오구오구, 우리 히데, 긴장했어요?”
알비 소위가 놀리듯이 말했다. 지금 나는 맨 앞에 있어서 히데 소위가 안 보였지만 발끈한 게 확실했다. 그 모습이 상상되어 웃음을 더 멈출 수 없었다. 웃음소리는 이륙허가가 떨어지고 나서야 멈췄다.
용에게 내 의지를 전달한다. 용이 거대한 날개를 쫙 펼치고 날갯짓을 시작한다.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높아진다. 제3편대 전체가 대형을 이룬 채, 한 자리를 빙글빙글 돌며 날아오른다.
적정고도에 다다르자 제3편대는 선회를 그만두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우리는 작전지역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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