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2장. 공조수사-(4)
약간 푸른 기운이 감도는 검은 정복들, 그리고 일부는 푸른색과 회색이 섞인 위장무늬 전투복. 낯선 옷들이 가득했다. 루프트바페의 제복이 드디어 나온 것이다. 나는 식당을 죽 훑어보다가 익숙한 얼굴들이 모여 있는 걸 발견했다. 클로리스 중위, 그리고 알비 소위의 룸메이트 라인스 소위.
음식을 받아든 나는 그쪽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실례. 같이 앉아도 될까?”
“물론이죠, 대위님.”
여기서 모르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저 주황 머리를 알고 있었다. 클로리스 중위가 같은 제1편대원 엘로이제 소위를 소개시켜 주었다. 내 바지 벨트를 풀어낸 주동자였다! 내가 짐짓 인상을 쓰며 노려보자 엘로이제 소위가 멋쩍은 듯이 웃었다.
그리고 라인스 소위.
여전히, 그녀를 보면 심장이 두근거린다. 용에게 느낀 것과 똑같았다. 이 넓은 루프트바페에서 오직 그녀만이 특별했다.
이 감정은 무엇일까? 나는 잠시 라인스 소위의 새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런데 제1편대에 한 명 더 있잖아. 아직도 병원에서 안 돌아온 거야?”
어제 체력단련을 하다 결국 병원에 실려 간 엘샤 크라우스 소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클로리스 중위가 말했다.
“엘샤는 어제 숙소에 들어오지도 않았어요.”
“저런, 많이 아픈가보네.”
내가 보기에도 엘샤 소위는 상태가 정말 안 좋았다. 라인스 소위가 아이스바인을 테이블나이프로 썰면서 말했다.
“그나저나 엘샤 씨 정말 예쁘지 않아요?”
엘로이제 소위도 긍정했다.
“내가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 가장 예뻤어.”
클로리스 중위도 거들었다.
“거의 배우들만큼 예쁘던데.”
그러자 화제는 클로리스 중위가 백작가에서 지내던 시절 실제로 보았던 배우들로 바뀌었다. 개중에는 내가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참을 그 주제로 떠들고 나자 클로리스 중위가 날 바라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된 일이에요? 어쩌다 대위님만 돌아오시게 된 거예요?”
아까부터 정말 궁금했던 모양인지 라인스 소위와 엘로이제 소위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희들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데?”
“용이 죽었다는 거요.”
“그럼 거의 다 알고 있는 거네. 수사 내용을 떠벌릴 수는 없지만, 제3편대만 불려간 거 보고 상황은 대충 짐작하겠지? 난 프로이센에서 여기로 온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풀려난 거고.”
나는 순간 친위대원으로서 헌병과 같이 수사하게 됐다는 것을 말할지 말지 고민했다. 고민의 시간은 짧았다. 엄청난 비밀은 아니지만 굳이 나서서 말할 건 없다.
다들 더 듣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선을 그었다. 내가 새 제복을 어디서 받을 수 있는지 묻자 클로리스 중위가 토라진 얼굴로 말했다.
“···보급반에 가시면 돼요. 제4비행대대 근처에 있어요.”
그러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 가면 된다. 제3비행대대인 것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멀긴 멀다. 이 기지가 지나치게 넓은 탓이다.
‘역시 자전거를 사야겠어.’
제복까지 받고 오후 훈련을 받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나는 순식간에 밥을 해치우고 일어섰다.
루프트바페는 행정반과 보급반이 분리되어 있었다. 그것도 신기한 점이었다. 군복을 나눠주는 곳으로 들어가자 날 본 부사관이 기다렸다는 듯이 군복을 내왔다.
“사령관님의 특별 지시로 남성용 제복을 맞춤으로 한 벌 제작했습니다.”
옷은 전투복, 체련복, 제복, 그리고 한겨울에나 입을 법한 두꺼운 옷과 장갑이 있었다.
“그게 용기사복입니다. 용기사님들은 고고도에서 활동하시기 때문에 옷이 두꺼워야 해서요.”
납득했다. 나는 서둘러 숙소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었다. 사이즈는 딱 맞았다. 이 인간, 내 사이즈는 어떻게 안 거야. 델 중장의 마수가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사령관의 특별대우를 받는 건 몹시 부담스러웠지만 군대에서 몸에 딱 맞는 옷을 입는 건 꽤 운 좋은 일이었기 때문에 만족했다.
훈련은 평범한 소총사격 훈련이었다. 여전히 기지위기상황대비 훈련의 일환이었다. 모두가 통일된 제복을 입고 있다는 것만 달랐다. 이제야 제대로 된 군대 같았다. 나 빼고 제3편대가 전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제4편대에 같이 끼어서 훈련을 받았다.
우리는 다음날 헌병대대로 향했다. 수사는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사라진 망치의 조사, 범인의 침입경로 추적, 그리고 용의자 심문. 광장에 대한 생각은 우리만 한 게 아니었는지 헌병은 용의자를 추가로 확보했다.
축사 대신 위치한, 광장과 바로 접해서 뒷문이 광장으로 통하는 건물은 병원과 동물병원을 포함해 총 다섯 개였다. 그리고 범행추정일 동안 그곳에 머무른 용기사는 총 세 명이었다. 그 용의자의 범위는 또 다시 압축되는데, 그 중 한 명인 엘샤 크라우스 소위가 그때 병원에 있었긴 했지만 상태가 심각하여 병실 밖으로 거동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저번에 체력단련에서 제외된 이후 계속 보이지 않던 그 병약한 미인이었다.
그렇게 그녀를 제외한 추가 용의자를 확보한 헌병은 그들을 구속해서 취조 중이다. 물론 전원의 지문을 따낸 상태다.
헌병대대는 지문감식결과가 나오기 전에 빨리 범인을 잡아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지문감식은 친위대 쪽에서 제시한 기술이었으니 그걸로 범인을 잡아버리면 공을 세우기 힘들어진다는 입장이었다. 지문감식은 오늘 감식요원이 와서 할 일을 다 해줄 테고 망치 수색은 우리보다 여기를 더 잘 아는 헌병들이 해줄 테니 할 일이 없어진 셈이었다. 망치 찾는 데에 도움을 줄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대대장에게 용의자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대대장이 반색했다.
“오, 그렇지. 자네는 친위대원이니 심문에 능하겠군. 잘 됐군. 이참에 취조에 합류하게나.”
우리는 친위대라는 광범위한 조직 중에서도 특별히 비밀국가경찰(Geheime Staatspolizei), 일명 게슈타포(Gestapo) 소속의 요원이다. 주 임무는 당연히 수사, 취조, 심문.
“아뇨. 취조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저 개인적인 용무입니다.”
“왜지? 친위대의 심문기술은—”
거기까지 말한 대대장이 말을 멈췄다. 그의 눈동자가 한동안 우리의 얼굴과, 우리 눈동자를 훑는다.
“됐네. 우리는 범인을 제외한 나머지 용기사를 온전한 상태로 보존할 필요가 있어. 자네에게 맡길 순 없네.”
“저도 동의합니다, 대대장님.”
허락은 의외로 순순히 떨어졌다. 단, 헌병 한 명과 동행해야 했다. 우리는 구치소로 들어갔다.
히데와 알비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우리를 보자 알비 소위가 반색했다.
“헤르만 대위님! 어쩌다 여기 오신 거예요? 수사관으로 오셨어요?”
그러자 히데 소위가 사납게 쏘아붙였다.
“친위대에게 수사를 받는다니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저기, 맞는 말이긴 한데 너무 대놓고 말하는 거 아니야? 나 상처받았다고?”
“헤르만 예거 최상급돌격지도자가 아주 훌륭한 친위대원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비꼼이잖아! 명백히 비꼼이잖아!”
히데 소위는 흥, 하며 고개를 돌렸다. 알비 소위가 난처해하며 물었다.
“그러면 정말 무슨 일로 오셨어요? 화장도 하셨네요?”
“딱히? 그냥 잘 살아있나 보러 왔지. 취조하러 온 건 아니니까 안심해도 돼.”
그러자 알비 소위가 잠시 뜸을 들이며 말했다.
“저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저 사람들은 우리가 마치 범인인 것처럼 윽박질러요. 대위님도 저희가 범인이라고 생각하세요?”
뾰족한 귀의 아랑이 우리의 눈을 바라본다. 우리는 즉답했다.
“범인은 아니지.”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범인은 기소당해서 형이 확정된 사람만을 지칭한다. 아직 용의자 신분인 둘은 당연히 범인이 아니었다.
물론 보통사람들은 이렇게 엄밀하게 구분해 쓰지 않는다. 관련업계 종사자의 버릇일 뿐. 그리고 사실 친위대에서도 곧잘 무시하는 원칙이기도 했다. 명백히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정해놓고 자백할 때까지 고문한 적도 많으니까.
알비 소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렇게 말해준 사람은 대위님밖에 없어요.”
그러자 히데 소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비, 착각하지 마. 저건 대위님이 우리가 결백하다고 믿는다는 뜻이 아냐.”
“그,그래도, 이렇게라도 말해준 사람은 없었잖아···”
우리는 창살에 꼭 붙어서 알비 소위를 달랬다. 한참을 달래고, 우리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최대한 빨리 잡아내도록 노력할게.”
시간을 너무 잡아먹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구치소를 나왔다.
마침 그때쯤 친위대 제복이 헌병대대 앞에서 머뭇거리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그를 안내했고, 그는 곧 지문 대조 작업에 착수했다. 그를 헌병대대에 남겨두고 나는 오후 훈련을 하러 제1비행대대로 돌아갔다.
이번 훈련은 감응훈련이었다. 각자 앞에 놓인 흑요석에 담긴 마법과 감응해 발현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연병장이 아닌 실내 강의실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제 좀 용기사다운 훈련을 받는가 싶었다.
“마법을 쓸 수 있는 존재는 용과 돌고래뿐이다. 돌고래는 자신의 몸에 한정한 변신술만을 사용할 수 있으니, 이 시간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강사가 말했다. 강사라고는 하지만, 그녀는 루프트바페의 육군 중령이었다. 마법 시범을 보일 수 있어야 하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마법의 종류는 무수히 많다. 원소계 마법, 생명계 마법, 광학계, 파동계, 정신계··· 그러나 이 중 특별히 공격적이고, 따라서 루프트바페에 적합한 마법은 따로 있다. 주로 원소계와 생명계이지.”
강사는 칠판에 ‘원소’라고 크게 썼다.
“그리고 생명계는 생체에 작용하기 때문에 분류의 편의상 생명계라는 이름을 따로 붙였을 뿐, 본질적으로는 원소계다. 따라서 용기사의 90퍼센트 정도는 원소계 마법을 지닌 용과 함께할 것이다.”
강사가 눈짓하자 옆에 서 있던 교관이 꾸러미에서 무언가를 꺼내 하나씩 모두의 책상 위에 놓았다. 손가락 한 마디만한 크기의 흑요석이었다.
“용기사는 타고 있는 용과 감응해 그 용이 마법을 적재적소에 활용하게 만들어 적을 쓰러뜨린다. 숙련된 용기사는 의지를 쏟지 않고 강하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용의 마법을 발동시킬 수 있지. 제군들은 전원 매우 뛰어난 감응력을 보였기에 이곳에 들어왔지만, 진짜로 용과 감응해본 적은 없기에 그 점에서 서투르다. 마력과 감응해 마법을 발동시키는 연습을 해서 익숙해질 필요가 있어.”
강사가 흑요석을 집어 들어 손바닥 위에 놓았다. 모두의 눈에 잘 보이도록. 잠시 후 흑요석 위쪽에서 불꽃이 치솟았다. 모두가 그 불꽃을 좀 더 잘 보려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제군들 앞에 놓인 건 가장 간단한 원소마법 중 하나인 ‘시마’를 각인한 흑요석이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시마를 발동시키면 흑요석 내부를 마력이 움직이며 발생하는 저항 때문에 열이 생긴다. 그리고 그 열과 발화연소제가 만나며 불이 붙는다. 마법 패턴은 이으, 단 한 가지로 무척 간단하다. 마법학 이론 수업 첫 시간에 꼭 나오는 마법이다.
“용병기는 용의 마법을 담아낸 무기, 혹은 물체. 특수 방아쇠 장치를 해두면 감응력이 전혀 없는 남자도 속에 있는 마법을 문제없이 발동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나눠준 흑요석에는 방아쇠가 없다. 제군들은 오로지 스스로의 감응력만을 이용해 흑요석에 저장된 마력을 움직여야 한다.
이제 각자 앞에 놓인 흑요석에서 시마를 발동시켜라. 낯설겠지만, 분명히 해낼 수 있다. 처음에 감응력 테스트를 받았을 때를 상상해라. 그때의 느낌, 그때 몸속에서 움직이고 느껴진 기운을 기억해.”
이런. 나는 감응력 테스트를 받아본 적이 없다. 그게 무슨 느낌인지도 잘 모르는데.
‘광폭화를 진정시킬 정도이면 루프트바페 전체를 통틀어 최상위에 속하는 감응력이거든.’
델 중장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나는 쉽게 마법을 발동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흑요석을 손 위에 올렸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흑요석 위에 불꽃이 생겨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자 불꽃이 확 피어올랐다. 예상보다 커다랬기 때문에 하마터면 눈썹을 태워먹을 뻔 했다. 강사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십 분 뒤 클로리스 중위도 성공했다.
“이번 기수는 꽤 괜찮군. 나머지 사람들도 분발해라.”
지금 우리가 루프트바페 1기다. 아마 저건 육군‧해군 항공대 선배들과 비교한 이야기겠지.
너무 일찍 성공한 탓에 한가해진 나는 다른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슬슬 지루해질 무렵, 갑자기 강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외쳤다.
“헤르만 예거 최상급돌격지도자!”
헌병이었다. 나는 교관에게 양해를 구했다. 훈련 중에 나가는 건 허용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불꽃 테스트를 완료했기 때문인지 그냥 보내주었다.
가기 전, 잠시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로 간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조그만 크림을 꺼내어 뺨에 바른다. 얼굴의 무늬가 지워졌다. 매끈한 얼굴의 ‘헤르만 예거’를 마주한다. 지금은 에리히의 시간이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헌병대대로 갔다.
회의가 소집되어 있었다. 다들 심각한 표정이었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 대대장은 회의실 탁자에 널려 있는 용의자들의 파일을 저쪽 구석으로 치워 버렸다.
“범인은 이 중에 없었다.”
대대장이 말했다.
“아무도 지문이 일치하지 않아.”
그것은 사건이 더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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