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1장. 장검의 밤-(5)
다음날 나는 히데 소위와 함께 아침을 먹으러 갔다. 히데 소위는 나에게 같은 제3편대원인 알비 하스 소위를 소개시켜 주었다. 알비 소위는 남색 바지, 그리고 흰 상의에 푸른색 세일러 칼라가 있는 해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키가 껑충하게 크고 호리호리했다. 원래라면 조금 헐렁했어야 할 세일러복은 풍만한 가슴 때문에 터질 듯 팽팽했다.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비죽 튀어나온 귀는 끝이 뾰족했다. 나는 같이 아침을 먹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랑이야?”
“헤헷, 반만요. 어머니 쪽이 아랑이었어요!”
조심스럽게 물어본 것이 무색하게 알비 소위는 쾌활했다. 도이체스 제국에서 아랑으로 살아가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도 구김살 없는 아가씨였다.
“예언은 못해요.”
알비 소위가 덧붙였다. 예언은 아랑 중에서도 극소수만 발현되는 능력이다. 혼혈인 알비 소위에게 나타날 리 없었다.
그렇게 밥을 먹으면서, 나는 우리 쪽을 보며 수군거리는 여군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구경거리가 되는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다. 앞으로 익숙해져야 할 일이지만.
“편대장님은 남부 출신인가 봐?”
칼레샤 소령의 악센트는 상당히 강했다. 두 사람 다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뭐더라··· 빈드발드에서 오셨다고 그랬던 것 같기도···”
빈드발드.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이름이다. 숲이 무성한 시골로, 정말 아무 특색 없는 깡촌이다. 지금 내가 이름을 아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였다.
지금 제3편대원의 구성원은 이렇다. 일명 ‘도깨비’로 분류되는 !파라와 아랑, 그리고 루프트바페 용기사 중 유일한 남자. 편대장 칼레샤 소령은 남부 시골 출신.
이 편대, 지뢰다.
너무나 눈에 띄는 조합이었다. 군에선 무엇이든지 눈에 띄면 좋지 않았다. 무능해서 눈에 띄든, 유능해서 눈에 띄든. 전쟁 상황이라면 모를까 이런 때 튀는 사람은 실수도 더 잘 눈에 띈다. 아마 여기에 돌고래까지 추가된다면 현존하는 세 종류의 이종족이 전부 모였을 텐데.
나는 앞으로의 군생활이 걱정되어 한숨을 내쉬었다. 친위대에서 복무할 때는 비밀경찰 일을 좀 더 많이 했다. 몸 쓰는 일이라고는 체포할 때의 몸싸움밖에 없었다. 몸싸움에는 이골이 나 있었고 자신도 있지만 용기사가 지상에서 싸움박질 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지금부터 하게 될 훈련을 제대로 따라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나저나 대위님, 무서운 분인 줄 알았는데 부드러우시네요!”
“내가? 내가 왜 무서워.”
“그거야··· 아무래도 친위대니깐? 보통 사람들이 친위대를 볼 일은 체포당할 때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좀 맹금류 같으시고··· 얼굴에 그거······ 전투화장이신가요? 히데처럼?”
맹금류라. 이텔도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내 샛노란 눈동자는 매의 눈처럼 상대를 꿰뚫어본다고.
“아니야. 원래 얼굴에 있는 거야. 멍자국인지 뭔지는 모르겠는데, 어릴 때 갑자기 생겼어.”
내 오른쪽 얼굴엔 이상한 자국이 있다. 오른쪽 눈 밑에서 구불구불하게 흘러내리는 세 줄의 문양. 난 이 자국이 언제 생겼는지 기억할 수 없다. 문신만큼 진하지는 않아 화장하면 가릴 수 있다. 그러나 항상 하는 건 아니다. 헤르만 예거일 때는 맨얼굴 그대로, 친위대원 에리히 아벨일 때는 화장으로 문양을 가린다.
전투화장이라.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겠다. 내 눈동자는 보라색이 아니지만 이것 때문에 히데와 비슷한 부류로 여겨졌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머리카락도 새까맣다. 진갈색 정도야 흔했지만 석탄처럼 시커먼 머리색은 달랐다. 일반인 사이에서도 어쩌다가 유전자가 농간을 부려 이런 흑발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대체로 이런 식의 흑발은 !파라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어제 그렇게 수군거렸을 테고.
알비 소위가 말했다.
“그랬었다는 이야기에요. 지금은 전혀! 하여튼 그날 밤에 온갖 말이 다 나온 걸요.”
무슨 말이 나왔을지 별로 알고 싶지 않다.
“그래서 말인데—”
“하스, 보안을 질질 새며 다니는구나.”
알비 소위의 말을 뚝 잘라먹으며 끼어든 사람이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가장 먼저 보인 쪽은 흑발에 녹색의 눈동자가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미인. 그녀를 수식하는 데는 이것이면 충분했다. 최근 들어 본 사람 중 가장 아름다웠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병약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금발의 여자. 바로 이 자가 알비 소위의 말을 자른 사람이다. 이 무례한 아가씨는 맵시 있는 해군복을 입고 있었다. 치켜 올라간 눈에 날카롭게 쨍한 푸른빛의 눈동자. 한 성격하게 생겼다. 계급은 중위.
나는 금발의 여자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귀관은?”
“중위 클로리스 슈타인.”
“이쪽은 헤르만 예거다.”
그녀의 이름을 들은 나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한다.
“슈타인 가의 영애인가?”
“그렇습니다.”
클로리스 중위는 분명 내 계급장을 봤다. 알비 소위가 ‘보안’을 어겼다손 치더라도 대위와 대화중인데 그 사이에 끼어드는 건 굉장히 무례하다. 그럼에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던 건 그녀의 뒷배경 때문일 것이다. 친위대 출신인 나는 귀족 가문을 전부 외우고 있었다. 클로리스 중위가 말했다.
“화제의 중심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리고 클로리스 중위의 얼굴이 약간 오만하게 변했다. 귀족 가문을 외우고 있는 건 저쪽도 마찬가지일 터. 그 데이터베이스에 예거라는 성은 없다.
“나야말로, 슈타인 가의 아가씨를 만나게 되어 영광이야. 해군에서 복무했었나?”
세일러복을 입고 있는 클로리스 중위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었다. 아마 클로리스 중위가 남자였다면 이 질문은 생략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눈앞에 있는 자는 백작 영애다. 보통의 경우라면 백작 영애가 군에 투신하는 경우가 흔치 않다. 이텔 황녀는 예외 중의 예외였다.
“아니요. 재미 삼아 해본 감응력 테스트가 꽤 높게 나와 지원한걸요. 루프트바페로 바로 편성되었어요. 굳이 해군을 선택한 건, 옷이 예쁘니까.”
도이체스 제국의 제복은 꽤 멋있는 축에 들었다. 가장 세련된 것이 친위대 정복이고 두 번째로 깔끔한 것이 해군복이다. 육군복도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객관적으로 괜찮았지만, 아무래도 이 둘만은 못했다.
육군 항공대를 거쳐 온 히데 프롬은 소위, 해군 항공대를 거쳐 온 알비 하스도 소위. 그러나 루프트바페에 바로 들어온 클로리스 슈타인은 중위다. 나처럼 이전에 군에 복무했던 인물도 아님에도 이런 이유는 그녀가 귀족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이텔 황녀가 중령을 빨리 단 것처럼.
어쩌면 클로리스 중위는 곧 내 계급을 추월할지도 모른다.
“그래, 귀관에겐 해군복이 더 어울릴 것 같군.”
이 말은 진심이었다. 클로리스 중위의 쨍한 푸른 눈과 파란색 세일러 칼라는 잘 어울렸다.
나의 말에 클로리스 중위는 깜짝 놀랐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은 것처럼. 클로리스 중위가 잠시 미소를 지었고, 그 오만한 표정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의견이 일치해서 기쁘군요, 대위님. 훈련 때 뵙죠. 저는 같은 비행대의 제1편대 소속이에요.”
클로리스 중위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더니 멀어져 갔다. 그녀를 맞이하는 무리의 구성원은 약 열 명. 편대장을 제외하면 제1비행대대의 인원은 열 명이다. 그 중 날 포함한 세 명은 여기서 밥을 먹고 있다. 즉 다른 편대원뿐만 아니라 다른 대대의 인원도 섞여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중심에 클로리스 중위가 있었다.
나는 오믈렛의 마지막 조각을 포크로 찌르며 물었다.
“편대장을 제외한 다른 장교들의 계급은 어떻게 되지?”
“다른 대대는 잘 모르지만 우리 대대는 클로리스 중위님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소위입니다. 급하게 임관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맞아요. 헤르만 대위님 오기 전까진 우리 대대에서 클로리스 중위님이 가장 높았어요. 그래서 왕고 역할을 하셨죠.”
그러면서 알비 소위가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 기대에 부응해주지 못해서 아쉽다. 클로리스 중위가 사람을 휘어잡으며 왕고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중위라서가 아니라 백작 영애이기 때문일 것이다. 친위대 출신 대위라곤 하지만 평민인 내가 클로리스 중위의 세력을 빼앗아 올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 클로리스 중위가 이쪽으로 온 것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려고 온 것 같고.
밥을 다 먹은 우리는 아침점호를 하러 갔다. 연병장에 제1비행대대가 전부 집합했다. 편대장 뒤에 한 줄로 나란히 서는 방식이었다. 나는 제3편대가 있을 위치쯤에 갔다가 칼레샤 소령에게 손목을 잡혔다.
의아해하며 바라보자 칼레샤 소령이 말했다.
“넌 도중에 전입해온 인원이다. 대대원들에게 소개가 있을 거다. 따라오도록.”
굳이 손목까지 잡을 필요는 없었는데. 나는 칼레샤 소령의 그을리고 거친 손등을 잠깐 바라본 뒤 그녀를 따라 걸었다.
우리는 단상 옆쪽에 섰다. 나는 제1비행대의 인원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우선 제1편대에 4명. 그 중에는 클로리스 중위와 그 인상적인 미인도 있었다. 제2편대는 3명, 내가 속한 제3편대는 총 4명, 제 4편대는 3명. 편대장들은 전부 소령이었다.
도합 13명의 여자가 호기심어린 눈길로 나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대장이 왔다.
요한나 쿤츠 중령. 제1비행대대의 대대장. 그녀가 단상 위에 섰다.
“제군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우리 비행대에 새 인원이 들어왔지. 보다시피 남자이지만, 사령관님이 검증하신 인재다. 헤르만 예거 대위는 앞으로 제1비행대대에 들어가 모두와 함께 동고동락할 것이다.”
그렇게 나를 소개해주고, 또다시 시선이 확 쏠리고, 아침 점호가 끝났다.
알비 소위는 마법학을 들으러 떠났고, 그 외에도 대대원의 삼분의 일 정도가 마법학을 수강하러 갔다. 남은 사람은 체력단련이었다. 조교는 칼레샤 소령이었다. 편대장들이 돌아가면서 조교 자리를 맡는 모양이었다.
나는 히데와 나란히 달렸다. 어차피 낙오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여자와 남자의 체력 차는 꽤 크니까. 적어도 히데와 동등하게 달려야 좀 해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남들이 한 바퀴를 뛸 때 우리는 두 바퀴를 달려 달리기 행렬의 뒤꽁무니를 지나치게 되었다. 꼴지로 한참 처진 사람은 아까 클로리스 중위와 함께 있던 미인이었는데, 누가 봐도 상태가 엄청나게 좋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스쳐 지나가며 조금 불안해졌다. 그녀는 쓰러질 것처럼 위태위태했다. 그러나 얼굴만 아는 사이에 다른 편대원을 선뜻 챙기기에는 조금 그랬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지나쳤다.
계속해서 히데와 나란히 달렸다.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옆에서 달리던 히데 소위가 나직하게 말했다.
“대위님, 힘들면 군장을 좀 나눠 질 수 있습니다만.”
“마음은 고맙지만 됐어.”
!파라의 체력과 보통 인간의 체력을 비교하는 건 당연히 어리석은 짓이었지만, 나는 오기로 버텼다.
“딱히 염려해서라기보다는, 대위님 숨소리가 너무 시끄럽습니다.”
“너 어제부터 정말 너무하다니까.”
그러는 동안에도 그 미인은 점점 낙오되기 시작했다. 결국 칼레샤 소령이 그녀를 멈춰 세운 뒤 병원으로 보내버렸다.
체력단련을 마치고 2등으로 성과를 내는 데 성공했지만 벌써 크게 지쳐버렸다. 1등은 당연히 히데였다.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운동한 것 같다. 다음날은 백 퍼센트 근육통이다.
입맛이 없었지만 점심을 억지로 먹은 뒤 오후 훈련에 들어갔다. 이제 정식으로 모두가 용기사 훈련을 받는다. 나는 살짝 들떠 있었다. 히데 소위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그냥 침묵했다.
요한나 쿤츠 중령은 연병장에 사열한 제1비행대대에게 말했다.
“오늘은 화생 훈련이다.”
나는 표정관리에 실패했다. 화생 훈련? 그걸 왜 지금 한단 말인가? 사관생도 때 하고 다시는 인연이 없을 줄 알았다.
힐끗 곁눈질을 하니 다들 경악한 기색이다.
“우리의 신인이 놀란 모양이니 설명을 해주지.”
나를 정확히 바라보며 요한나 중령이 말했다. 나는 몸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분명히, 다른 이들도 경악했다. 그러나 요한나 중령은 굳이 나를 지목해서 말했다. 나는 그제야 요한나 중령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맑은 푸른색이었다.
“화생 훈련은 모든 군인에게 중요하다. 적이 비열하게 화학무기나 생물학 무기를 쓸 수도 있기 때문이지. 그러나 루프트바페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적이 가장 먼저 무력화하려고 시도할 곳이 루프트바페이므로. 그렇기에, 육군보다도, 해군보다도 더 화학전‧생물학전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왜냐고? 제군들. 루프트바페는 넓다. 좆나게 넓어. 이 광활한 대지를 폭격했다간 3년은 족히 걸릴 거다. 하지만 화생무기는 간편하지. 몇 발 뿌리기만 해도 기지가 순식간에 무력화된다. 이 간단한 사실은 적들도 당연히 알고 있지.”
요한나 중령이 느릿하게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나를 지나쳐 알비 소위에게 향했다.
“무슨 불만이 있나?”
“소위 알비 하스, 그런 사실 없습니다!”
“표정이 그게 뭐야? 정신상태가 썩어빠졌군. 전원, 엎드려.”
그렇게 갑작스러운 얼차려가 시작되었다. 루프트바페에 오고 나서 처음 겪는 것이었다. 나중에 히데 소위가 루프트바페에서는 ‘동기부여’라고 에둘러 말한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동기부여가 끝나고 나자 모두가 땀범벅이 되었다. 나는 마음 한 구석이 정말 찜찜해졌다. 설마? 조금만 두고 보면 알 것이다.
화생 훈련은 크게 두 가지다. 적어도 내가 사관생도였을 때는 그랬다. 첫 번째로 방독면을 포함한 보호의 착용, 두 번째로 방독면 사용법을 실습하며 익히는 가스실습. 방독면을 제대로 착용한다면 별 문제가 안 되지만 문제는 가스를 터뜨려놓고 그 안에서 온갖 것을 다 시킨다는 것이다.
보통 절차는 밀폐된 공간 안에서 최루가스를 발생시킨 뒤 방독면을 벗고 몇 분간 참다가 다시 방독면을 착용하고 퇴실한다. 루프트바페는 어떤 식으로 할지 잘 모르겠지만 괴로울 거라고 미리 생각해 두면 편할 것이다.
연병장에 보호의가 하나씩 놓였다. 각각 상하의, 보호장화, 보호수갑, 방독면이었다. 편대장들과 요한나 중령이 착용하는 시범을 보여 주었다. 친위대에 있다 보니 가물가물해져 있었기 때문에 시범 자체는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런데 왜 대대장마저 번거롭게 시범을 보인단 말인가?
우리는 보호의를 앞에 두고 착용 지시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맨얼굴인 우리 앞에 방독면을 쓴 여군들이 나란히 서 있는 장면은 꽤나 기괴했다.
요한나 중령이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손에는 뭔가 쥐고 있었다. 우리 앞으로 다가선 요한나 중령은 손에 쥐고 있는 것을 허공에 던졌고,
그것은 최루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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