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너는 용이 되어-4화 (4/102)

1권 1장. 장검의 밤-(4)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다시 눈을 뜨니 이번엔 칼레샤 소령과 날 기절시킨 소녀가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주로 칼레샤 소령이 소녀를 일방적으로 혼내는 구도였다. 말을 들어 보면 소녀는 나를 침입자로 오해하고 때려눕힌 것 같다. 한참을 혼내던 칼레샤 소령은 내가 눈을 뜬 걸 발견했다. 칼레샤 소령이 나에게 말했다.

“숙소를 증축하면 따로 살 수 있을 거다, 예거. 히데, 너도 불편하겠지만 당분간만 같이 살아라.”

분명 델 중장은 숙소를 증축하겠다는 말 비슷한 것도 꺼내지 않았다. 그냥 하는 말이 틀림없었다.

히데 소위는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은 표정이었다. 부조리하다. 이 상황 전체가 부조리하다. 하지만 여기는 군대였다. 그런 부조리마저 따라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나는 !파라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히데 소위의 말에 나는 잠시 멍하니 그쪽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말할 줄 몰랐다. !파라는 정말 자존심이 세고 반골 기질이 있는 종족이었다. 그토록 뛰어난 전사의 체질을 타고났으면서도 군에 부적합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들은 흉폭하고, 잔인하고, 오만한···

소녀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보석 같은 보라색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내가 히데에게 『살인자』를 투사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히데는 !파라였다. 그러나 히데는 그녀가 아니었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비록 남녀 사이라지만···”

히데 소위가 슬쩍 내 계급장을 곁눈질했다. 친위대 대위 계급장. 그러나 이름은 없다. 나는 내 이름을 말했다.

“헤르만 예거.”

“예거 대위님. 아무 일도 없으리라 믿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안광을 빛내며 나를 내려다보는 이 맹랑한 소위는 나를 위협하고 있었다!

보통의 남자라면 겁을 집어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파라에 익숙했다. 이 정도 실력행사는 예상하고 있었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으니 나도 문제 삼지 않겠어, 히데 소위. 잘 지내보자고.”

칼레샤 소령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방금 히데 소위가 한 짓은 엄밀히 말하면 하극상이었다. 벌을 주려면 언제든지 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넘어가는 것을 택한 것이다.

히데 소위의 바람과는 다르게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얼굴 맞대고 살아야 하는 사이다. 첫인상은 최악이었지만 더 나쁘게 만들 이유는 없다. 상황이 종료되자 칼레샤 소령이 나갔다.

사실 칼레샤 소령도 히데 소위를 징계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은 이유는 그녀도 히데를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아침에 남자 룸메이트가 생겨버린 어처구니없는 이 상황을.

나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여기 하루일과가 어떻게 되지? 너랑 같은 편대라고 하던데.”

“편대장이신 칼레샤 프랑크 소령님, 대위님, 알비 하스 소위, 그리고 저까지 합쳐 총 4명이 제1비행대대 제3편대입니다. 훈련 단위는 비행대를 기준으로 합니다.

오전 6시 30분에 기상해 6시 40분에 아침점호 및 체력단련을 한 뒤 7시 20분에 아침식사를 합니다. 그 뒤 오전엔 마법학 강의를 수료하고, 듣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대신 체력단련에 들어갑니다. 12시부터 한 시간 동안 점심식사를 합니다. 오후에는 용기사 관련 훈련이 있습니다. 18시에 저녁을 먹고, 그 이후에는 자유시간입니다만, 가끔 행군 등의 훈련이 있으면 하기도 합니다. 이상입니다.”

꼭 군인이 아니라 사관생도 같은 스케줄이었다. 나는 마법학을 수료했다고 말한 것을 후회했다. 체력단련을 한다니!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고 수업이나 듣고 있으면 좀 나았을 거다.

“넌 마법학 수업을 들어?”

“아닙니다. 마법학은 미리 공부해왔기 때문에 체력단련에 참여합니다.”

히데 소위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파라이니 체력단련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나는 조금 마음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파라에게서 저런 순수한 표정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히데가 살짝 주저하면서 물었다.

“예거 대위님, 어떻게 여기로 오시게 된 겁니까?”

내가 남자라는 사실을 빼고서라도 나는 특이한 존재였다. 나는 프로이센 한복판에서 만났던 용과 델 중장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용을 만져보셨단 말입니까······.”

그렇게 말하는 히데 소위의 얼굴엔 부러움이 가득했다. 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루프트바페의 용기사인데, 아직도 용을 타보지 않은 거야?”

“저 멀리 하늘을 나는 것밖에 못 봤습니다. 물론 감응력은 특수 기구를 이용해 테스트했지만, 그동안은 용을 타기 위한 예비 훈련만 실컷 받았습니다. 실제로 용을 타본 사람은 편대장님 이상부터입니다.”

그 뒤로 이야기를 더 나누었고, 나는 히데 프롬 소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히데 소위는 하르트란트에 있을 때부터 용과 용기사를 동경해왔고, 마침내 도이체스 제국으로 가출해 군대로 들어갔다. 나이 때문에 입대하지 못할 뻔했지만 !파라는 더 어린 나이에 지원할 수 있었기 때문에 통과되었다. 그렇게 여자가 병사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의무병이 되었다.

그리고 1년간 군생활을 한 뒤 감응력 테스트를 받을 나이가 되자 응시했다. 다행히 히데는 감응력 테스트에서 합격점을 받았고, 곧바로 소위로 임관해 육군 항공대에서 훈련을 받다가 루프트바페로 넘어왔다고 했다.

“용감했네. 네가 !파라가 아니었다면 정말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어.”

“확실히 보통 사람이라면 위험한 일을 많이 겪었을 겁니다. 수작을 부리는 자들도 몇 있었죠. 길 가다가 뜬금없이 체포된 적도 있었고요.”

그러나 다 때려눕혔습니다, 라는 말이 생략되었다. 하르트란트는 도이체스 제국의 식민지 중 가장 가까운 곳이었지만 그래도 국경을 넘는 일이다. 여자애 혼자서 육군에 들어가기까지 온갖 고초를 겪었을 것이다. 보통 여자였다면. 하지만 나와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은 밧줄을 손아귀 힘으로 뜯어내는 종족이었다. 그 누가 !파라를 건드린단 말인가? 아마 히데의 손에 작살난 불운한 인간들은 히데의 !파라 중에서도 빼어난 미모와 자그마한 몸집만 보고 만만하게 본 놈들이었을 것이다.

한참을 이야기 나누는데 카트리나가 히데에게 다가가 얼굴과 턱 밑을 비볐다. 히데 소위는 눈에 띄게 뻣뻣하게 굳어 당황한 기색이었다.

“카트리나가 사람을 많이 좋아해. 너도 마음에 들었나보다. 고양이는 처음이야?”

“그,그렇습니다.”

“나도 혼자 살게 될 줄 알고 데려온 건데, 조금 미안하게 됐네. 카트리나도 잘 부탁해.”

싫어도 어쩔 텐가. 난 대위고 히데는 소위다. 카트리나가 싫어도 어쩔 수 없는 거다.

“쓰다듬어 봐도 됩니까?”

“물론. 배는 만지지 말고.”

히데 소위는 긴장한 기색으로 카트리나의 등을 쓰다듬었다. 뻣뻣하게 굳은 몸과는 다르게 손길은 퍽 부드러웠다. 카트리나는 기분이 좋았는지 골골골 소리를 냈다. 히데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위님, 이 아이, 모터를 삼킨 게 아닙니까? 이상한 소리를 냅니다.”

조그만 소녀가 잔뜩 심각한 표정으로 그렇게 묻는 것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히데가 부루퉁해졌다.

“기분 좋으면 내는 소리야. 완전히 정상이니 안심해도 좋아.”

“그렇습니까···”

표정이 풀어지며 카트리나를 쓰다듬던 히데 소위는 손에 묻어나온 하얀 털을 보며 다시 표정이 굳어졌다. 음, 저건 어쩔 수 없다. 매일매일 빗질을 해주지만 고양이는 고양이였다. 털이 무지막지하게 빠졌다. 어쩔 수 없다. 히데는 털과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그나저나 대위님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친위대원에서 루프트바페의 용기사가 된 경위는 들었으니 그 이전을 이야기해달라는 뜻이었다.

“난 정말 별 거 없어. 우선 어머니 혼자서 날 기르셨는데, 그만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버지에게 가게 되었지.”

귀족의 사생아로 태어났다가, 어머니의 죽음으로 아버지 쪽 가문에 들어갔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었지만 다행히 후견인을 만나서 시설로 가진 않았고,”

아버지와 그 가문은 숙청당했고, 그들을 도륙한 『살인자』가 나를 거두어 성인까지 길러 주었다.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어서 안정적인 군인을 하기로 했어. 굳이 친위대를 고른 건 도시에서 근무하고 싶었기 때문이었고.”

『나의 친애하는 적』을 말살하기 위해, 군에서 가장 부패하고 비밀스러운 조직으로 들어갔다.

“적당적당히 일했지.”

부패한 조직이 시키는 대로 손을 더럽혔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그리고 루프트바페로 온 건 아까 이야기했고. 그냥 이정도.”

내 말은 진실과 거짓이 섞여 있다. 그리고 히데 소위는 내 거짓말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파라란 그런 존재였으니까. 보통 사람은 인지할 수조차 없는 미세한 표정을 잡아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저도.”

히데 소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부모님이 없습니다. 저는 시설에 들어갔어요. 그 높다란 담벼락에 가로막혀 갇혀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늘이 너무 부러웠어요. 창공을 가르는 용, 그리고 용기사에 대해 알게 된 순간부터 그들이 되고 싶었습니다.”

히데 소위의 설명은 간략했고 이 말을 하는 것조차 껄끄러워 보였다. 마치, 내 쪽에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쪽에서도 억지로 쥐어짜낸 느낌이었다.

“그렇구나.”

나는 웃으며, 이렇게만 대답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덧 소등시간이 다 되었다. 나는 잘 생각이 없었지만 우선 잠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히데 소위의 잠옷은 심플한 검은색이었다. 나는 곧 애도를 표했다. 검은 잠옷이니 카트리나의 털이 붙으면 정말 눈에 띌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저것이 잠옷이라는 것일까. 나는 검은색 친위대 제복에 붙은 털을 떼어내느라 아침에 5분은 잡아먹었다.

“뒤돌아 있을까?”

“감사합니다. 뒤돌아보시면 죽여 버릴 겁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상관을 협박하는 데 도가 텄다.

스륵, 스르륵, 옷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옷이 살결과 스치는 소리, 다른 옷과 부딪히며 바스락거리는 소리.

히데 소위는 나를 의식해서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순식간에 옷을 다 갈아입었다. 나도 히데 소위에게 뒤돌아 있으라고 부탁한 뒤 옷을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히데 소위의 벽장은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다. 히데 소위는 휘장을 걷고 벽장에서 천 꾸러미 하나를 꺼냈다. 꾸러미에서는 양쪽에서 말린 두루마리가 나왔다. !파라교의 경전 토라였다.

히데 소위는 토라를 펼쳤다. 잠시 주저하며 내 쪽을 바라본 히데 소위는 곧이어 토라를 암송하기 시작했다. 거의 8년 만에 듣는 토라였다. 『살인자』도 이렇게 홀로 토라를 펴놓고 암송하곤 했지.

마침내 10시. 소등시간이었다. 히데 소위는 암송을 끝냈다. 나는 미리 준비해 둔 스탠드를 켜고 마법학 책을 빼들었다.

“···안 주무십니까?”

토라를 집어넣은 히데 소위는 벌써 침대에 드러누웠다. 나는 놀라서 반문했다.

“소등시간 됐다고 바로 자는 거야?”

“군에서 내려 준 소등시간입니다.”

히데 소위가 스탠드 불빛 때문에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히데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한 마디 하려 했지만, 곧 내가 더 상관임을 상기했는지 그냥 아무 말 없이 불빛이 안 보이는 쪽으로 돌아누웠다.

나는 노트를 꺼내서 마법학 책의 내용을 복습하기 시작했다. 따로 교육을 안 받는다지만 내가 모든 내용을 기억하고 있으리라는 자신도 없고, 필요할지도 모른다. 한참을 적어 내려가는데 히데 소위가 말했다.

“조금 조용히 해주실 수 없습니까?”

이번엔 숨길 수 없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 군에 적응했다지만 !파라는 !파라인 모양이었다. 겨우 종이에 펜으로 사각거리는 정도였다. 그러나 !파라에게는 무척이나 크게 들렸던 모양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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