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1장. 장검의 밤-(2)
소속이 붕 떠버린 나는 다음날 육군본부로 가기 전까지 루프트바페에 대해 찾아보았다. 직역하면 하늘의 병기.
도이체스 제국의 군인은 세 종류밖에 없었다. 육군, 해군, 그리고 친위대. 친위대는 분류상 육군이지만 거의 따로 독립된 조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바로 내가 속한 곳이기도 하다.
루프트바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육군 소속인 내 육군사관학교 동기들에게 물어보려 했지만 다들 날 만날 수 없는 상태였고, 나는 지금 연락이 되는 유일한 동기를 불러냈다.
“그건 신생 조직이다.”
내 앞에 앉아 있는 금발벽안의 미인이 맥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갑작스럽게 불러냈는데도 흔쾌히 저녁 시간을 할애해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 차가운 인상의 여자는 이텔 마리아 폰 프로이센. 금발을 머리를 묶을 수 있을 정도로만 짧게 잘랐다. 긴 머리는 군인에게 불편하다고 여기는 탓이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그녀의 안경. 차가운 푸른 눈동자와 더불어 그녀의 싸늘한 외모를 배가시키고 있다. 전반적으로 선뜻 말을 걸 수 없는 인상이다. 이 미인은 도이체스 제국의 황녀이자 황실의 맏이, 그리고 육군 중령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유일하게 진정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다.
“용병기는 역사가 오래 되었지만 용을 타고 다닐 수 있게 된 지는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용기사는 군에 도입이 늦었지. 하지만 일단 육군 항공대와 해군 항공대 형식으로 용을 편성해 시범적으로 운영하고 있어. 이번에는 아예 용과 용기사만의 병력을 새로 만들어내려는 것 같더군.”
“공군···말입니까?”
“그래. 그게 바로 루프트바페다. 너는 친위대 소속이라 내막을 몰랐던 것 같군. 이쪽도 영관급 장교 이상만 알려준 정보니까.”
나의 동기들은 대부분 위관급 장교이다. 당장 나만 해도 육군 체계로 따지자면 중위였고, 승진이 빠른 녀석도 대위 정도였다. 내가 아는 영관급 장교는 지금 나와 술을 마시고 있는 이텔 중령밖에 없었다.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텔을 고른 것이었지만 뜻밖에도 맞는 패를 뽑아든 것이다.
이텔이 그 나이에 중령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황족이기 때문이었다. 정계로 뛰어든 베르논 황태자와는 다르게 이텔 황녀는 육군사관학교에 자진 입학해 군인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황족이기 때문에 순식간에 중령 자리까지 올라갔다.
“아쉽게 되었어. 같은 육군이 아니었을 때부터 느꼈던 감정이지만, 일이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저도 아쉬웠습니다. 이로써 저하와는 소속이 더 멀어지게 되었군요.”
“또, 또 그런다. 헤르만. 사석에서는 편히 부르라 하지 않았던가?”
“시정하겠습니다!”
내가 약간 장난스럽게 말하자 이텔이 쿡쿡 웃었다. 지금 이 모습만 본다면 얼음 같다는 평을 듣는 이텔 황녀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늘 그렇게 뻣뻣하니 너무나 아쉽군. 이래봬도 깊은 육체적 관계를 맺은 사이인데 말이야.”
“그,그런 오해를 살 만한 말은 자제해 주십시오. 카이저가 제 목을 네거리에 효수할 겁니다.”
“사실이지 않나? 우린 깊은 정신적 유대뿐만이 아니라 육체적 관계도 맺고 있지. 그때가 생각나는군. 사관학교 시절, 우리가 몰래 술 마신 날 밤에 결국 합체한 채 본 광경을—”
“어디서 그런 저속한 말을 배워 오신 겁니까! 제가 술 취한 공주님 업고 돌아다닌 게 어떻게 그런 말이 됩니까! 군대가 사람 다 버려놨네요.”
“야외에서 같이 뒹굴기도 했었지—”
“레슬링 대련이었지 않습니까!”
귀가 빨개진 나를 보고 이텔이 웃었다. 이럴 때만큼은, 그 차가운 황녀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아마 이런 식으로 서슴없이 장난을 치는 상대는 나밖에 없겠지. 이텔이 말했다.
“그나저나 헤르만이 용기사라··· 상상도 못할 일이야.”
“말도 마십시오. 레이디 퍼스트라며 양보까지 당했습니다.”
“그대가 진짜로 레이디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게 됐군. 그랬다면 레이디끼리의 비밀도 공유할 수 있었을 것이야.”
나는 답할 말을 찾지 못해서 그저 마주 웃었다. 이텔은 맥주 한 잔을 더 시켰다. 나도 내 앞에 놓인 맥주를 마셨다.
새 맥주가 오자 이텔이 말했다.
“정식 감응의식도 치르지 않은 용을 상대로 감응해 광폭화를 억제하다니.”
이텔이 맥주를 쭉 들이킨 뒤 잔을 내려놓았다. 우아한 제국의 황녀와는 거리가 먼 동작이었다. 그러나 이텔 중령에게는 어울렸다.
“그나저나 사상 초유의 사태군. 남자 용기사라니. 헤르만, 좋겠어. 청일점이네.”
나를 실컷 놀린 폰조 상급돌격지도자가 마지막에 내린 결론도 그것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여자가 싫은 게 아니다. 나도 남자다. 하지만 한 군대 병력 내의 유일한 남자가 되는 건 다른 문제였다.
“너라면 잘 해낼 거다. 넌 레이디의 마음을 잘 헤아리니까.”
눈앞에 있는 사람은 레이디와는 백만 광년쯤 떨어진 사람이었지만 나는 고맙다고 대답했다. 이텔은 나를 위로해주고 있었으니까.
나는 맥주를 마시고 말했다.
“안경은 새로 바꾸셨습니까? 이전보다 머리카락과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안경 너머 푸른 눈이 이채를 띠었다.
“후훗, 그런가. 잘 어울린다는 말을 들으니 기쁘군. 헤르만 너는 빈말을 하지 않으니까.”
나는 빈말을 잘 한다. 아주 잘 한다. 다만 정말 친한 사람에게는 그러지 않을 뿐이었다. 치장하는 것에 관심 없는 이텔이 유일하게 신경 쓰는 것이 바로 안경이었다. 사실 이텔의 시력은 그렇게 나쁜 편이 아니었다. 앞쪽에서 중간쯤 되는 자리에 앉아도 칠판의 글씨를 볼 수 있는 시력이었다. 하지만 이텔은 다른 안경 착용자들이 그렇듯이 항상 안경을 끼고 다녔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안경은 멋있는 물건이었다. 멋부리는 사람들은 눈이 좋아도 도수 없는 안경을 끼기도 했다. 이텔은 안경이 자신을 좀 더 군인다운 인상으로 만들어준다고 좋아했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안경을 쓴 이텔은 더 어렵고 다가가기 힘든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마침 프로이센에 계셔서 다행입니다. 나중에 '그 문서'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이텔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이텔은 한참 동안 침묵했다. 그녀가 포크로 소세지를 찌르며 말했다.
“이럴 때마다 느끼지만 헤르만 너는 너무 위태로워.”
“중간에 발각될 수도 있고, 그것을 피하더라도 나중에 '그 문서'가 제 목을 찌르겠지요. 하지만, 그래서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언제나 조심하고.”
“에리히도 안부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이텔과 작별인사를 하고 집에 돌아온 나는 옷도 안 갈아입은 채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많은 일이 벌어진 하루여서 그런지 피곤했다.
잠에 빠져들기 직전 고양이 카트리나가 내 손을 살짝 물었다.
“카트리나, 나 오늘 너무 피곤한데 내일 놀아줄게.”
그러자 카트리나가 야옹 하고 울었다. 나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카트리나를 바라보았다. 이 샴고양이는 날 자게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나는 조금 냉혹해지려 했다. 아무리 그렇게 쳐다봐도 소용없었다. 나는 잘 것이다. 네가 무척 귀엽다지만 소용없어. 그런 눈으로 봐도 안 통해.
카트리나가 서글프게 울었다.
결국 한 시간이나 놀아줬다. 나도 카트리나도 녹초가 되었다. 나는 카트리나가 좋아하는 찍찍이 인형을 던져 준 뒤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육군본부로 갔다. 그 여자가 이름도 안 알려 준 데다가 우리의 상관이 어제부터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좀 일찍 갔다.
그러나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도, 두 사람 다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아무리 떼써도 소용없어. 헤르만은 이미 내 거야!”
“억지 부릴래?”
우리의 상관 아달베르토 프리드리히 집단지도자와 그 여자가 육군본부 한가운데에서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둘에게 다가갔다.
여자의 눈이 커졌다.
“오, 우리 헤르만, 왔어?”
“예거가 언제부터 자네 거였냐!”
“지금부터. 이리 와, 헤르만.”
타군의 장교라 해도 우리는 상급돌격지도자(소속이 바뀌었다면 대위)에 불과했고 이쪽은 중장이다. 우리는 명령에 따랐다. 여자는 우리 어깨에 손을 턱 얹더니 갑자기 헤드락을 걸었다. 우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귀가 새빨개졌다.
“아참, 내 이름도 얘기 안 했네. 난 델 피셔. 사령관님이라고 부르면 돼.”
“델. 네가 하는 건 월권행위다. 예거 같은 인재를 멋대로 데려갈 수는 없어.”
“우웅, 하지만 용기사라고? 그것도 최초의 남자 용기사. 내가 놓칠 것 같아?”
“차라리 용병기사로 데려가는 거면 몰라, 새로 생겨서 쓸모도 용도도 불분명한 곳으로 빼돌리는 건 용납 못한다.”
“오호라, 아달베르토. 마음에도 없는 소리잖아, 그거. 용병기사로 데려간다고 했으면 겨우 그런데 데려가려고 헤르만을 빼 가냐고 반대했을 거 아냐?”
아마 그랬을 것이다. 감응을 못하면 용의 등에 타지도 못하는 용기사와는 달리 용병기사는 감응력이 좋을수록 위력이 상승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용병기에 담긴 마력에 따라 위력이 좌우되었다. 대체로 여자보다 감응력이 떨어진다고 알려져 있는 남자들이 용병기사로 배치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 말은, 굳이 우릴 집어서 데려갈 이유도 없다는 뜻이었다.
아달베르토 집단지도자의 말문이 잠깐 막혔다. 델 중장이 헤드락을 건 팔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
“앞으론 루프트바페가 전쟁의 판도를 바꿀 거야. 오, 물론 육군에서도 해군에서도 새로운 무기가 나오겠지. 하지만 공중은 아직 미지의 세계. 적들이 드러누워 있는 동안 빨리빨리 하늘을 정복해야 한다고. 헤르만이 남자라서가 아니야. 우린 용기사가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해. 친위대에서 썩고 있기는 아깝지.”
“친위대의 일을 무시하지 마라.”
“응?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단지 우리 헤르만은 친위대보다는 루프트바페에 더 필요한 인재라는 거지.”
“그게 그거잖냐!”
그 뒤로 둘은 아달베르토 집단지도자의 사무실로 자리를 옮긴 뒤 한참을 더 다투었다. 한 시간의 입씨름 뒤 둘은 결론을 내렸다.
“남은 건 하나뿐이네?”
“좋다.”
“그럼, 반씩 나누어 가지는 걸로.”
!파라의 현자 솔라의 재판입니까? 그것보다, 반씩 나누면 죽는다고요?
두 사람이 잠시 협의를 하더니 델 중장이 즐거운 얼굴로 사무실을 나섰다.
“루프트바페가 된 걸 축하해, 헤르만 예거 대위!”
델 중장은 손키스를 날리는 시늉까지 한 뒤 문을 닫고 나갔다. 아달베르토 집단지도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감쌌다.
“예거 상급돌격지도자.”
“예!”
내가 묵직하게 대답하자 그가 말했다.
“넌 이제부터 루프트바페의 용기사다.”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나. 사실 우리도 루프트바페로 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친위대로 있으면 우리가 찾는 걸 수사하기가 더 쉽다. 하지만 루프트바페는? 그럴 시간이 있을까?
“하지만 친위대원으로서의 네 보직은 그대로 유지한다.”
우리는 그 말에 아달베르토 집단지도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자네는 내가 준 특별 임무를 띤 친위대원으로서 루프트바페의 용기사가 되어라. 육군 항공대와 해군 항공대는 단위 면적당 용의 개체수가 가장 많은 곳. 이제 그 둘이 루프트바페로 합쳐져 개편된다. 분명히 그들은 루프트바페를 노린다.”
“···계몽결사 말씀이십니까.”
아달베르토 집단지도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몽결사는 도이체스 제국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는 반정부단체였다. 이름에서 보다시피 주된 목적은 ‘계몽’이다. 아르모리카 왕국이 왕의 목을 단두대에서 자르고 프랑크 공화국이 된 것처럼, 이 도이체스 제국도 공화정으로 ‘계몽’하려는 것이다. 당연히 황실의 전복을 목적으로 하고 있고, 황실과 적대적이다.
그러나 한 단체가 무너뜨리기에는 이 제국이 너무나 컸다. 그렇기에 계몽결사는 용병기에 집착했다. 더 강력한 무기에. 현대 이전의 용병기 삼분의 이는 소실되었는데, 그것을 훔쳐간 세력이 계몽결사라고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고대마법, 즉 그다지 위력적이지도 정교하지도 않은 마법이 담긴 구식 용병기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절실한 것이다.
현재는 여러 군에 흩어져 있던 용기사들을 루프트바페라는 조직에 하나로 모으고 있다. 당연히 용도 거기에 모일 것이다. 계몽결사가 루프트바페를 노리는 것은 당연한 추론이었다.
“원래 자네는 계몽결사 추적 임무를 맡지 않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군.”
아달베르토 집단지도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시간부로 자네를 최상급돌격지도자로 임명한다. 계몽결사는 분명 루프트바페에 손을 뻗칠 거다. 찾아내.”
“네!”
아달베르토 집단지도자는 내가 어제 다시 달아놓은 상급돌격지도자 계급장을 떼더니 최상급돌격지도자 계급장을 손수 붙여 주었다.
“승진 축하하네, 예거.”
친위대원 보직을 잃지 않았다. 아직 끈을 남겨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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