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1화 (131/131)

그것도 유건의 모습 중 하나라고 여기면 그렇게 나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너는 항상 항생제 찾아서 인간 되고 싶어 했잖아. 연구를 계속 진행한다고 해도 언제 완성될지 모르고. 이안에게 피를 줘 가면서까지 인간이 되고 싶었던 넌데 기회가 있을 때 안 해 보면 계속 생각날 거고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를 것 같았어.”

그는 내가 항생제에 관심을 보인 후로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실제로 나는 요새 머릿속에 항생제 생각뿐이었다.

지금은 크리먼으로서의 나를 많이 받아들이고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태였지만, 만약 크리먼과 인간 중 고를 수 있다면 주저 없이 크리먼을 선택할 수 있을지 확답할 수 없었다.

그렇다기엔 너무 오랫동안 인간이 되기를 염원해 왔기 때문에. 내게 항생제를 얻어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건 저 하늘의 별 같은 것이었다.

어딘가에는 있지만 너무 멀어 절대 손이 닿지 않을 것 같은 존재. 하지만 이제 가능성이 있었다. 그 기적 같은 일이 어쩌면 일어날 수도 있다.

예전에는 인간이 되면 막연히 내 우울했던 과거가 씻겨 내려가리란 희망을 품었다. 지금이야 현재에 만족하고 행복하기에 그렇게 절실하지는 않지만, 안 하면 계속해서 눈에 밟힐 것 같았다. 내가 눈을 감기 전에 겁 먼저 먹고 물러난 것을 후회하리라는 예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래서 나는 확률이 낮더라도 시도는 해 보고 싶었다.

“넌 그리고 내가 안 된다고 해도 하고 싶으면 어떻게든 하잖아.”

“네가 싫다면 안 하려고 했는데?”

“그럼 하지 마. 싫어.”

“이미 지나갔어. 너 괜찮다고 한 거야.”

것 봐. 유건은 토라진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근데 만약 잘못돼도 안정제 맞으면 돌아올 수 있는 거 확실한지 한 번 더 확인해 보고.”

“내가 선배한테 여러 번 물어봤어. 이론상으로는 오차의 범위도 없대.”

“둘이 나 몰래 연락하고 있었네….”

선선한 바람이 나뭇잎을 타고 불어왔다. 사람들의 발소리와 일상적인 소음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5년 전의 나는 내게 닥쳐 올 수많은 가정을 했지만 이런 미래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크리처화를 개방해도 사람들이 내게 총을 겨누지 않고, 센터를 나와 가이드 일을 하지 않아도 마음이 편안하고, 누군가와 같이 잠자리에 들어도 불편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일의 연속이었지만 나는 지금 누구보다 행복했다.

“근데 인간이 안 돼도 너무 상심하지는 마. 난 그게 좀 걱정돼.”

“상심 안 해. 난 지금도 좋아.”

쪽.

그의 입술을 습격하듯 입을 붙이고는 재빨리 떨어졌다. 유건이 잠깐 스치고 지나간 촉감을 되새기듯 자기 입술을 매만지다가 내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밤공기 너무 춥다. 빨리 들어가자. 역시 이불 밖은 위험해.”

나는 키득거리며 그와 함께 우리의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

내가 센터에 오는 날을 어떻게 알았는지, 차에서 내리자마자 각성자 여럿이 우리를 맞았다.

“안녕하세요, 구사월 가이드.”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제복으로 보아 에스퍼 같고. 각성자증에는 크리먼 팀이라고 쓰여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지 마십시오. 어떤 용건입니까?”

나 대신 유건이 살짝 내 앞을 가로막으며 용무를 물었다. 올 때부터 빠르게 에코팀 실험실로 가자더니 어느 정도 이런 상황을 예상한 것 같았다.

“저희 캡틴이 되어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저희 잘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이런 날이 아니면 나를 볼 일이 없기에 절박함이 묻어났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상태를 보니 파장이 많이 떨어져 보였다.

“사월아, 오랜만이다.”

저들의 상황이 어떻든 조금 무례하다 느껴져서 무시하고 갈까 생각 중이었다. 사람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걸어왔다.

“지수야.”

“잠깐 시간 돼? 커피 한잔 마시자.”

지수의 각성자증에도 크리먼 팀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지수는 센터장이 ‘비페어주의’ 가이드를 크리먼으로 만들 때 생긴 희생양이었다.

그녀는 크리먼이 된 지 얼마 안 됐다고 들었다. 나는 유건을 힐끔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는 본관 앞에 있는 룸으로 되어 있는 카페에 들어섰다. 유건과 지수는 계산대 앞에서 여기는 뭐가 제일 맛있다느니 별로 중요하지 않은 주제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그들은 아메리카노였고, 내 것은 초콜릿 프라페에 휘핑이 잔뜩 올려진 음료였다.

“너 연락처 바꿨어? 통화가 안 되더라.”

“센터 나갈 때 바꿨지. 궁금하면 백유건한테 물어보지.”

“이 녀석 절대 안 알려 주던데? 무슨 내가 너한테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니고. 과보호 아니야?”

“얘가 좀 그런 편이지.”

우리는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지금 연락처를 알려 달라길래 선뜻 알려 줬다. 유건은 이번엔 막아서지 않았다.

“내가 너 부른 거 예상했겠지만 크리먼 팀 때문이야.”

지수는 앞에 있는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쪼록 빨아들이며 말했다.

“당분간은 돌아오지 마, 사월아.”

당연히 방금 맞닥뜨린 에스퍼처럼 크리먼 팀을 맡아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지수는 의외의 말을 했다.

“왜?”

“문제가 많은데 한 사람한테 기대서 해결하려고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한결 캡틴이 시스템 새로 구축한다고 했잖아. 그 안에서 해결해야지 한 사람한테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게 하는 건 불공평하잖아.”

“에스퍼들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던데.”

“그것도 매칭팀에서 해결할 거야. 솔직히 며칠 전만 해도 잘만 가이딩 했으면서 크리먼이란 거 알았다고 가이드들이 가이딩 거절하는 게 웃기지.”

“캡슐이 보통 2인만 들어가서 불안하긴 할 거야. 크리먼 에스퍼 가이딩 할 때는 경호 에스퍼 항상 대동해서 하는 게 어때?”

“그것도 좋은 방법이네. 캡틴한테 말해 볼게. 그리고 우리도 아무나 물지는 않잖아? 각자 피 취향도 있는 건데 난 그런 거 보면 김칫국 들이마시는 것 같더라.”

잔웃음이 터졌다. 지수와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누는 게 신기했고 정말 센터에 크리먼을 위한 팀이 생겼다는 게 실감 났다.

“그런데 오늘 항생제 투여받고 네가 여전히 크리먼이든 인간이든 나중에는 다시 센터로 복귀했으면 좋겠어. 우리 아직 젊고 할 수 있는 게 많잖아.”

내가 인간이 되면 크리먼 팀은 갈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돌아오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크리먼이 아니라 가이드로서 다시 돌아와도 상관없지만… 왠지 이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어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멀리서 응원할게, 사월아. 성공을 빌어.”

지수와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유건과 에코팀 실험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한결이 미리 도착해 있었다.

“컨디션은 어때?”

“좋아요.”

옷을 갈아입고 수술대에 누웠다. 양옆에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한결과 유건이 지키고 서 있었다. 내가 폭주하게 되더라도 그 둘이면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자 실험실 특유의 알코올 냄새가 느껴졌다. 이런 비슷한 공간에서 크리먼이 됐었다.

인간이 되지 못할 확률이 높기에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폭주한 크리먼이 될지도 모른다는 건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두려움이 앞섰다.

만약 다시 눈을 떴을 때 연구실이 엉망이 되어있다면… 여기저기 피가 튀고 내 옆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면….

가만히 누워있으려니 부정적인 생각들이 샘솟았다.

“선배는 제가 어느 팀에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딱 하나만 고르자면요.”

에코팀 연구원이 곁으로 다가와 팔에 주사기를 꽂았고, 나는 넌지시 한결의 의견을 물었다. 다른 생각이라도 해야 이 상념을 지워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알파 팀이지. 나랑 페어할래? 이번에 다시 돌아오면 아예 나만 가이딩할 수 있게 꽉 붙들어야지.”

“형!”

한결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고, 옆에 있던 유건이 크게 반발했다.

“구사월, 센터 안 돌아갈 거야. 내 옆에만 있을 거잖아. 그치?”

유건이 대답을 종용했다. 옆에서 에코팀 연구원이 마음 편하게 먹고 한숨 잔다고 생각하라며 우리의 대화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처럼 자못 친절하고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한결과 유건 덕분에 긴장이 풀려서인지, 갑자기 이 상황이 갑자기 웃기게 느껴지면서 두려움이 완전히 달아났다. 내가 스르륵 눈을 감자, 유건이 나를 내 어깨를 잘게 흔들었다.

“구사월, 대답은 해 주고 잠들어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가 지켜 줄게. 걱정 마.”

다시 눈을 떴을 땐 우리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같은 장면이 보였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나는 3시간 32분 후에 폭주했고 곧바로 심장에 안정제를 주사했기에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윽고 이번엔 알코올 냄새가 아니라 목 주변에서 느껴지는 단 향에 인상을 찌푸렸다. 처음 크리먼이 됐을 때처럼 그 향은 강렬하게 찾아왔다.

“냄새… 나.”

처음 크리먼이 됐을 때처럼 혈 향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알코올 냄새 사이로 목 주변에서 느껴지는 단 향에 인상을 찌푸렸다.

고개를 내리자 붉은 보석이 달린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유건의 피 향이 났다.

“내가 냄새 말고 향기 난다고 하라고 했지.”

유건이 질책하며 내 몸을 끌어안았다. 다디단 향이 내 몸에 흘러내렸다. 나른하게 몸이 풀어진 반면 흡혈 욕구는 부글부글 끓었다.

오른손은 유건이 잡고 있었고 반대편 손을 한결이 잡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내게 닥친 시련은 내게 많은 것을 빼앗았고, 다시 가져다줬다.

내 옆에 엄마와 아빠는 없지만 이제는 새로운 버팀목들이 있었다. 유건의 몸을 안는 척 그의 목에 이를 박았다.

유건이 예상치 못했다는 듯 몸을 움찔거렸고 입술 사이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기분 좋은 충만감이 몸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여실히 느껴졌다.

비로소 진정으로 크리먼으로서 즐기며 살 수 있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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