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화 (130/131)

“생각하기 싫어.”

“구사월.”

“진짜 생각하기 싫어서 그래. 나 당분간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이안을 체포할 때 제복을 입은 크리먼들이 싸우는 모습이 생경했다. 현실 같지 않았다. 불길함의 상징인 검은 수정체를 과감하게 드러내고 피를 흡혈할 때만 사용해 온 이빨로 잔당을 처단했다.

나 또한 크리처화를 개방해서 날뛸 때 자유로움을 느꼈다. 가이드일 때는 느껴 보지 못한 긴장감과 피가 끓어오르는 느낌이 좋았다.

크리먼의 본능이 살생인 만큼 피가 흩뿌려질 때 고양감은 다른 만족감과 비교할 바가 못 됐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유건의 말처럼 내게 좋다고만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크리먼 팀은 당분간 많이 힘들 것이다. 시스템보다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상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크리먼 팀 캡틴이 방패막이가 되거나 혹은 대신 싸워 줘야 하는데 사람들은 내가 등급이 높고, 크리먼으로서 큰 이슈를 일으켰단 이유만으로 자리를 떠넘기려 했다.

그것도 나 또한 세상이 변화했으면 하니 하려면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불합리한 상황이 있다면 게이트든 방사 가이딩으로든 힘으로 찍어누를 능력도 있었다.

내심 게이트에서 싸우지 않기에 가이드를 얕잡아 보는 에스퍼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너무 지쳐 있었다. 크리먼인 사실을 숨기고 지내다가 센터를 나가기로 결정했던 일이 엎어지고 숨어서 지내다가 이안을 잡게 된 일까지.

뭔가 해결이 됐다는 생각과 함께 진한 무력감이 찾아왔다.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런 압박도 부담도 없는 생활을 해 보고 싶었다. 누군가의 기대 속에서 큰 책임감을 가지고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가이드로서의 내가 아니라 인간 구사월에게 휴가를 주고 싶었다.

“센터 안 돌아간다는 거지?”

“지금은?”

“그럼 내가 형한테 전달한다?”

“어.”

유건은 신나서 바로 한결에게 통화를 걸었다. 내가 그동안 벌어진 일로 긴장이 풀려서 아프다느니, 영원히 센터는 꼴도 보기 싫다고 했다느니 당사자를 두고 과장해서 전달했다.

“그래! 진짜야. 침대에서 지금 한 걸음도 못 나오고 있어. 아니? 올 필요는 없고. 내가 알아서 간호할게. 아니야, 형. 진짜 올 필요 없다니까?”

그러더니 전화가 뚝 끊겼다. 유건의 의도가 잘못 전달된 것 같았다.

“온대?”

“어. 내가 다시 오지 말라고 전화할게.”

“아니야. 내가 할게. 너 이상한 말 너무 많이 해.”

어차피 한결이 유건의 말을 믿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오랜만에 얼굴 보고 싶어서 오려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굳이 방에 들어가 한결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얘기를 할 거길래 나 없는 곳에서 전화하냐는 유건의 말이 뒤통수에 닿았지만 그대로 문을 닫았다.

“선배. 오늘 말고 다음에 봐요. 지국현 에스퍼랑 다 같이요.”

***

“구사월 가이드, 이제 영영 못 보는 줄 알았습니다. 제가 계속 물어보니까 구사월 가이드가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참 유치하지 않습니까?”

“남의 가이드한테 껄떡대지 마.”

“구사월 가이드가 백유건 에스퍼 것입니까? 각인이라도 하셨어요?”

“그건 아니지만… 곧 할 거야!”

“혼자만의 망상 아닙니까?”

우리는 프라이빗한 룸으로 이루어진 일식당에 왔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간 국현과 유건이 아웅다웅하며 소란을 떨었다.

한결은 그들을 보며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고, 나는 오늘따라 입맛이 돌아 회를 집어 먹고 있었다.

“너 오늘 왜 이렇게 많이 먹어? 하나 더 시킬까?”

“응. 오늘따라 잘 들어가네. 술도 한 병 더 시키자.”

날이 어두워질수록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대화의 주제는 대부분 그동안 있었던 오해와 진실에 대한 것이었다.

비밀을 숨기기 위해 아군끼리도 속고 속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우리는 이안을 잡는 데 꽤 먼 길을 돌아왔다.

“한결 캡틴이 구사월 가이드가 끝까지 크리먼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정황상 크리먼이 아닐 수가 없는데.”

“제가 그때 알아도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어요. 그동안 제 행동 때문에 혼선이 생긴 것 같아 죄송했습니다. 이안을 잡는 데 힘써 준 것도 감사하고요. ”

“사과받자고 한 말은 아니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구사월 가이드가 이대로 퇴직하는 건 아쉽다는 생각이 드네요. 센터로 돌아올 생각은 없으십니까?”

“가이딩 크리스탈이 아쉬운 건 아니시고요?”

“뭐, 겸사겸사?”

국현도 술이 들어가니 표정이 평소보다 다채로웠다. 여전히 단조로운 편에 속하지만 특유의 음침한 분위기가 나른하게 풀렸고, 눈을 접으며 웃기도 했다.

“이 자릴 빌어서 모두에게 그동안 감사하다는 말 전하고 싶었습니다. 다양한 인과관계가 얽혀있긴 하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일이니까요.”

나는 다소 딱딱한 어조로 말했지만 진심을 담았다. 어떤 식으로든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한결이 먼저 술잔을 건넸고, 네 개의 잔이 쨍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기분 좋은 술자리였다.

“저 근데 그건 어떻게 됐어요?”

“아, 그거. 아직 실험 중이긴 한데 대략적인 가닥은 잡혔어.”

나는 넌지시 운을 띄웠고, 한결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이 자리를 마련한 건 다른 목적도 있었다.

“그게 뭔데?”

유건은 모르는 얘기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이안에게 세뇌를 시켜 얻은 정보는 센터장뿐만이 아니었다.

“항생제.”

이전에 이안은 내게 항생제는 완성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한은 항생제를 복제한 걸 마시고 폭주했다.

마지막 공장에서의 대화에서도 이안은 자신은 완성품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럴 시간이 없어서 확인하지 못했는데 국현이 이안의 머리를 들여다보면서 이제는 진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일단 항생제는 미완성이 맞아.”

예상했던 전개이지만 씁쓸하긴 했다. 내가 술잔을 들어 한 번에 들이켜자, 한결 또한 착잡한 표정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게 크리먼이 된 지 얼마 안 된 경우에는 효과가 있는데 오래돼서 이미 크리먼의 몸에 적응된 사람한테는 부작용을 일으키더라고.”

한결은 에코팀에게 실험을 맡겼다. 아직도 실험 중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결과로는 크리먼이 된 당일에 마셔야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예전에 이안이 내 앞에서 보여 준 크리먼은 내게 항생제가 완성품이라고 속이기 위해 그날 크리먼으로 만든 것이었고, 지한은 크리먼이 된 지 오래돼서 폭주를 일으킨 거였다.

“그런데 그게 결과가 일정한 것도 아니야. 크리먼이 된 지 오래돼도 적응을 못 한 몸은 인간으로 되돌아오기도 해.”

“그럼 복불복이라는 거예요?”

“그것보다 확률 낮은 도박이라고 봐야지. 너는 크리먼이 된 지 오래돼서 나는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아.”

“…….”

여러 생각이 휩싸여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잘하면 인간이 될 수도 있다는 말 아닌가?’

한결이 위험성이 높다고 주의를 줬지만, 머리로는 내가 좋을 대로 해석하며 생각에 잠겼다.

“구사월, 너 왜 대답 안 해? 설마 시도해 볼 생각 있는 거 아니지?”

유건은 내 침묵이 불안했는지 손을 붙잡으며 물었다. 나는 일단 더 궁금한 점을 말했다.

“이안이 폭주하면 안정시키는 약물도 개발했다고 했잖아요.”

“어.”

“그럼 만약 잘못돼도 그 약물 맞으면 다시 크리먼으로 돌아올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이론상은 그런데 아직 실험 단계야, 사월아.”

내가 대놓고 관심을 보이자 한결 또한 타이르듯 말했다.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싸해졌다. 세 사람이 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알았어요.”

나는 다시 한 번 술로 입을 축였다. 그 후로 항생제에 대해 더 묻지 않았다.

전처럼 다른 이야기로 대화가 오갔지만, 유건은 유난히 말수가 적어졌다.

***

유건과 밤 산책을 나왔다. 유건은 아침에 못 뛰었으니 지금이라도 뛰고 오겠다며 호수를 한 바퀴 돌러 갔다.

나는 조금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걸어 다니다가 나무 아래 있는 벤치에 앉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산에서 볼 때처럼 별이 많지는 않았다.

너무 멀리 있어서 흐려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서슴없이 크리처화를 개방해서 다시 올려다보자 전보다는 선명하게 보였다.

주변에서 힐끗거리는 시선이 느껴지긴 했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가오면 좀 귀찮아질 테지만 그렇지는 않기 때문이다.

“뭐 해?”

“별 봐.”

“크리처화는 왜 개방했어?”

“잘 안 보여서.”

금세 호수 한 바퀴를 돈 유건이 내 옆에 앉아 내가 바라보는 방향을 올려다봤다. 갸름하게 눈을 좁힌 유건이 잘 보이지 않는지 인상을 찡그렸다.

“여기도 아래 지방인데 별이 별로 없네. 다음 주에 트리 하우스 가서 놀다 올까?”

“그래도 되고.”

별을 보고 싶다는 듯 말했으면서 심드렁한 내 대답에 유건이 의아한 눈을 했다. 그러나 굳이 내가 왜 이러는지 묻지 않았다

“백유건.”

“왜.”

“항생제 맞아 볼까?”

그는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돼.”

그럴 줄 알았다. 내가 이 질문을 했을 때 유건이 할 말은 이것밖에 떠오르지 않았었다.

“근데 내가 네 인생을 좌지우지할 권리가 뭐가 있어.”

나는 별을 보던 시선을 거두고 유건을 바라봤다.

“그럼 넌 괜찮다는 거야?”

“안 괜찮지만 네가 꼭 하고 싶다면 막지는 않겠다는 말이야.”

“오….”

“반응이 왜 그래?”

“완전 예상 밖의 말을 해서.”

유건이 눈썹 한쪽을 삐죽 올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했다. 유건은 나와 관계가 깊어지기 전에도 소유욕이 강했다.

다른 에스퍼와 가까이 있는 것조차 싫어하기에 이르렀고, 내가 이안에게 위험한 짓을 당하자 그 강박은 더 심해졌다.

나는 그런 유건을 예전에는 진저리쳤지만, 이제는 마음에 안 들어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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