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화 (128/131)

떨떠름하게 대꾸했지만 속으로는 그를 너무 우습게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심하다가는 정말 파장을 사용하지 못하는 에스퍼에게 질지도 모른다.

나는 정신을 다잡으며 일단 투시로 핵의 위치를 파악해 급소를 노렸다. 빠른 스피드에 대처하지 못하고 크리먼들이 차례로 무릎을 꿇었다.

“단 두 명인데 뭘 그렇게 쩔쩔 매! 한꺼번에 덤비자!”

그러나 그들도 점점 전투에 적응해 갔고, 공격이 아니라 붙잡는 것에 중점을 두며 다가왔다.

하나가 신체를 잡으면 우르르 몰려와 몸을 깔아뭉개듯 짓눌렀다. 이에 날카로운 손톱과 이빨로 이곳저곳을 할퀴고 찔렀다.

“크윽….”

금세 옷은 너덜너덜해지고 몸이 피투성이가 됐다. 우리는 치열하게 싸우고 있지만, 점점 체력이 고갈되어 갔다. 이내 유건과 내가 코너에 몰려 더 이상 도망갈 수 없게 됐다.

크리먼들 사이로 이안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꽤 오래 버티시네요. 근데 여기까지인 것 같죠?”

그가 다시 내 피를 마시려는 듯 입을 달싹거렸다. 유건이 팔을 가로로 뻗으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어디 폭주할 때까지 쳐 보던가.”

“어린놈이 겁도 없네. 쇼 그만하지?”

엉망이 된 꼴을 하고선 버티는 유건을 보고 크리먼들이 조롱하듯 휘파람을 불었다. 여기 있는 대부분이 그가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쳐보라고.”

그러나 나는 유건이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건의 몸은 뛰어난 재생력을 가졌다. 에스퍼는 파장을 쓰지 않아도 상처를 회복하는 것만으로 파장이 줄어든다.

유건의 몸이 계속 타격을 받으면 파장률은 낮아질 거고, 공장 안에서 그가 폭주했다가는 다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

웃음기 하나 없이 대답하는 유건을 보고 크리먼들이 저들끼리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이곳에 있는 크리먼은 센터 각성자처럼 전문적인 전투 훈련을 받지 않아서인지 여러모로 어설픈 구석이 보였다.

쉽게 동요하고 전투도 근본이 없었다. 크리먼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자 이안이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더니 앞장섰다.

“구사월 가이드가 그 꼴을 보고 있을까요?”

이안은 유건과 내 관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눈치가 빠른 녀석인 만큼, 내가 그런 상황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힘 빼지 말고 스스로 나오세요, 구사월 가이드.”

이안은 사뭇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나는 이제 선택을 해야 했다.

“백유건.”

나는 유건에게만 들리게 작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너 아무 말도 하지 마. 안 들을 거니까.”

그는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내가 할 말을 예상하고 있다는 것처럼 잘라 냈다.

“나 어차피 안 죽잖아.”

“네가 그 말 할 때 제일 열받는 거 알아?”

그가 그렇게 얘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어코 말을 꺼냈고 유건은 분노했다. 그는 내가 죽지 않으니 이런 것쯤은 별거 아니라는 태도를 보일 때마다 이런 반응을 보였다.

내 몸을 함부로 여기는 행동이니까.

“그때 한 말 그냥 말한 거 아니야. 난 이제 내가 다치는 것보다 네가 죽는 게 더 무서워.”

그건 지금 나도 마찬가지였다. 유건이 제 몸을 소중히 여기길 바랐다. 무엇보다 다치는 건 언젠가는 회복될 수 있지만 죽음은 돌이킬 수 없었다.

“나도 그냥 한 말 아니야.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너 그런 꼴 당하게 안 해.”

“…….”

“내가 죽길 바라지 않는다면 제발 내 뒤에 있어. 나를 좋아한다면 나한테 그런 모습 보여 주지 말라고.”

그의 말은 모순투성이였다. 유건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지만 떨림이 느껴졌다. 그가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과거의 악몽이 반복될까 봐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눈앞에 크리먼들은 견고하게 우리 앞을 막아섰고, 이안은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눈을 빛내며 관망하고 있었다.

이러다간 유건이 나 때문에 넝마가 될 것이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 상처 입는 건 물론이고, 그의 고집대로라면 정말 폭주할 때까지 내 앞을 막아서고 있을지도 몰랐다.

“찍.”

어쩌지 못하고 갈등하고 있는데 크리먼 사이에서 조그만 생물체가 뾱, 하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씨, 뭐야. 거슬리게.”

한 크리먼이 발로 회색 쥐를 툭 밀어냈다. 쥐는 데굴데굴 굴러 유건의 발치까지 옮겨 왔다.

유건이 잠시 고개를 내려 쥐를 살펴보자, 쥐는 유건이 하는 양을 따라 하듯 두 발로 서서 양팔을 뻗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쟤 뭐야?”

그 모습을 신기하게 보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 어이없다는 반응이었다. 내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서걱.

동시에 공장의 한 면이 대각선으로 길게 빗금이 갔다.

서걱, 서걱, 서걱.

직선의 금이 연이어 그어졌다. 틈이 벌어지며 눈부신 빛이 공사장 안으로 침투했다. 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꿈쩍도 안 하던 벽이 손쉽게 조각나고 있었다.

이내 한 면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한 남자가 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A 지부 크리먼 팀 첫 번째 임무입니다.”

날카로운 발놀림으로 풍파를 일으킨 한결이 먼지 묻은 옷을 털어 내며 낮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가이드 습격 사건의 주동자인 이안과 잔당들을 체포하세요.”

그의 뒤에는 수많은 크리먼들이 있었다. 센터 제복을 입은 크리먼들이.

“도, 도망쳐!”

이안의 편에 섰던 크리먼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쿠구궁….

아군이 움직이기 전에 공장 안의 컨테이너들이 중력을 거부하고 허공에 떠올랐다. 바깥의 공기 때문에 제어가 풀린 유건의 파장이 넘실넘실 흘러나왔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한 사람이었다.

“죽이는 건 안 됩니다. 제 몫도 남겨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흉흉한 기세를 풍기는 유건에게 국현이 말했다. 유건은 듣지 못했다는 것처럼 그대로 이안을 향해 모든 물체를 떨어뜨렸다.

***

제목 : 센터장 쉽색기 심문 영상 봄?

웬만하면 나라 여러 번 구했던 영웅이니까 쉴드쳐 주고 싶은데 저건 구제 못 할 쓰레기던데;;;

지금 상황이 크리먼 안 받아 줄 수 없는 것 같던데 무슨 저주를 내리는 것도 아니고

크리먼들 신나서 다 물고 다니면 어떡함?

하;;;나는 모르겠다

(댓글)

- 익명: 진짜 극혐임 눈탱이 맛 간 거 너무 소름이야ㅠㅠㅠㅠㅠ

- 익명: 할아범 눈깔을 왜 그러케 떠요???

- 익명: 저 할아범 예전부터 쎄했음

- 익명: 무슨 약 하는 거 아니야?;;;그게 아니고서야 입으로 저렇게 똥을 쌀 수 있나?

- 익명: 그나마 이안인가 뭐싱가가 크리먼한테 물리면 안정화시키는 약물 개발했다잖아. 죽지는 않을 듯

└ 익명: 그리고 센터 공지 보니까 크리먼들은 한동안 귀 뒤에 전부 칩 박을 거래 지들도 살고 싶으면 그렇게 막 나가진 않겠지

- 익명: 이게 진짜 맞는 거냐??? 난 존나 모르겠는데

└ 익명: 네가 모르면 어쩔거야ㅋㅋㅋㅋㅋ이미 센터는 크리먼팀 창설됐고 여기저기 크밍아웃하고 난리 났는데

- 익명: 네 엄마도 크리먼일지도 몰라 확인해 봐

└ 익명: 가족은 건들지 말자

└ 익명: 장난같냐ㅋㅋㅋㅋ우리 엄마 오늘 크밍아웃했다 웃프네ㅠㅠ

└ 익명: ㄹㅇ?;;;;;;;

- 익명: 그럼 구사월 가이드도 다시 A 지부 복귀하는 거임?

└ 익명: 그러지 않겠냐ㅋㅋㅋㅋㅋ저거 터뜨린 사람이 알파 팀 캡틴이랑 지부장이라던데

└ 익명: 구사월 가이드 손절한 센터놈들 오금 저리겠네 가서 관전하고 싶다

└ 익명: ㄴㄷ

└ 익명: ㄴㄷ2222222

└ 익명: ㄴㄷ333333333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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