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다른 약속 있습니까?”
내가 시계에 눈을 떼지 못하고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자 이안이 물었다.
“위치 추적 장치를 덕지덕지 붙이고 왔다던데. 어떤 분한테 전달될 정보였죠?”
말투에는 날이 서 있지 않았지만 예민한 문제였다. 왜 이걸 이제야 묻는지 의아할 정도로.
“나도 네가 내 피만 먹고 나르면 억울하잖아. 대비는 해 놔야지.”
“그럼 좀 더 철저하게 하시지 그랬습니까?”
그는 내 위치 추적 장치가 모조리 들킨 줄 알았다. 내가 눈을 흘기는 척하자, 이안이 웃음기를 머금더니 다시 흡혈을 시작하려 했다.
“사적인 질문 하나 하고 싶은데.”
나는 억지로 다른 주제를 꺼냈다. 이안은 흡혈을 재개하려다가 말하라는 듯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왜 불사가 되려는 거지?”
“죽는 게 두려우니까요.”
“…….”
애써 끄집어낸 주제는 한마디로 일단락됐다. 어쩌면 너무 쉬운 질문을 했을지도 몰랐다.
“왜 갑자기 그런 게 궁금하십니까.”
바로 다시 흡혈하려는 줄 알았는데 이안이 왠지 차분한 눈으로 물었다.
“강지한이 너는 삶에 미련이 없어 보인다고 했는데 이렇게까지 핵에 집착하는 게 이상해서.”
지한은 분명 내게 그렇게 말했었다. 괜히 이안을 공격해서 항생제를 얻어낼 생각을 말라는 듯이.
크리먼에게 핵은 생명과 직결된다. 핵에 집착하는 이안이 삶에 미련이 없다는 건 예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해 왔다.
“핵이 없는 게 아니면 살 만한 삶이 아니었으니까요.”
이안의 입에서 의미 모를 말이 튀어나왔다.
“좀 더 듣고 싶은데.”
“저희 거래와 관련이 있습니까?”
내가 이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자 이안은 평소답지 않게 선을 그었다.
‘핵이 없는 게 아니면 살 만하지 않은 삶이라….’
항상 여유만만하던 이안의 표정에 미세하게 딱딱하게 굳었다. 본능적으로 그의 역린을 건드렸다는 걸 눈치챘다.
“네가 나 때문에 불사가 돼서 세계 정복이라도 하고 싶다고 한다면 곤란하잖아.”
나는 이전에 이안이 크리먼이 인류의 최종 지배자가 될 수도 있지 않냐고 주장했던 말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제 와서 따지는 게 웃기긴 한데 굳이 듣고 싶다면 말해 드리죠.”
그는 제대로 대답하겠다는 듯 몸을 완전히 물렀다.
“인간일 때는 두려움에 떨다가 결국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체념했습니다. 이렇게 살 바엔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거죠. 크리먼이 되고 몸이 튼튼해지니 다시는 그런 감정을 겪고 싶지 않게 됐습니다. 다행히 제게서 죽음을 완전히 지워 버릴 방법을 찾았고, 두려움을 안고 사느니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을 뿐입니다.”
그는 시간을 끌기 위해 던진 질문에 제법 진지하게 대답해 줬다. 그가 살아온 배경을 잘 모르기에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인간일 때 많이 힘든 삶을 살아온 사람 같았다.
“그럼 불사가 안 되면 죽겠다는 소리야?”
“아마 제 트라우마를 스스로 견디지 못하지 않을까요. 어차피 크리먼이 돼도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아 버렸으니까요.”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그러나 자신은 불행한 사람이고, 이 삶이 가치 없으니 차라리 죽어 버리겠다는 말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핵이 사라져 죽음에서 벗어난다고 과연 행복할까?
“구사월 가이드는 목숨을 끊고 싶었던 적 없습니까?”
“있긴 하지만… 그런 이유는 아니었어.”
내가 목숨을 끊고 싶던 이유는 크리먼의 야만적인 본능, 그리고 사회적인 인식 때문이었다. 크리먼이란 사실은 내게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 같은 비밀이었다.
나는 이런 두려움을 안고 사느니 목숨을 끊고 싶을 정도로 무서워했다.
“그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두려움의 객체가 저는 죽음 자체이기 때문이라고밖에 설명해 드릴 수 없겠네요.”
내게는 크리먼에 대한 사회 인식이 두렵게 다가왔고, 이안에게는 죽음이 그 정도의 공포를 야기한 것 같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인데 그의 태도가 너무 극단적이란 생각도 들었다.
“구사월 가이드에게는 백날 얘기해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이 얘기는 그만하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이안이 픽 웃고는 대화를 종료했다.
“그럼 반대로 말하면 죽음 말고는 두려운 게 없다는 소리인가?”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였건 이미 선을 넘었고, 범죄를 수도 없이 저질렀다.
“하긴, 그러니 이렇게까지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거겠지.”
대놓고 비난하는 말에 이안은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목에 이를 박고 강하게 흡입했다. 눈앞이 핑 돌 정도로 강한 압박이었다.
애써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안의 핵이 실눈을 떠야 보일 정도로 작아진 상태였다. 그 순간 어떤 타이밍이라도 엿보는 것 같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공장 안에 우리 말고 누군가가 더 있었다.
“너는 그 생각을 후회하게 될 거야.”
쉭!
나는 이안의 얼굴을 가격하려고 주먹을 뻗었다.
“위험하지 않습니까, 구사월 가이드.”
이안이 재빠르게 몸을 물렀고 그사이에 날카로운 칼날이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조금만 느리게 움직였다면 내 얼굴에 꽂혔을 것이다. 던진 방향을 확인하자 처음 보는 사람이 서 있었다.
아니, 검게 물든 수정체를 보니 처음 보는 크리먼이었다. 세뇌도 폭주도 하지 않은 이성이 있는 크리먼.
“이 사람들은 뭐지?”
그 밖에 컨테이너 사이로 다른 크리먼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이내 우리 주변을 가득 에워쌀 정도로 수가 많아졌다.
“먼저 공격하셨으니 저도 당할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임기응변이라기엔 약속된 사이 같은데.”
“먼저 배신한 쪽은 그쪽 같은데요. 구사월 가이드 배 속에 있는 위치 추적 장치. 몰랐을 거라 생각했습니까?”
그는 숨겨 놓은 위치 추적 장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과 편을 먹었는지는 모르지만 오지 못할 겁니다. 몇 분 후 수신이 끊기게 했거든요.”
어쩐지 시간을 끌었는데도 한결이 너무 늦어지고 있었다.
“더불어 백유건 에스퍼도 능력을 사용하지 못할 겁니다. 이 공간 군데군데 파장 제어석을 박아 놨습니다.”
등 뒤에 유건을 쳐다보자 그게 사실인지 인상을 구기고만 있었다. 크리처화를 풀고 내 파장을 밖으로 내보내려 했지만 역시 되지 않았다.
파장 제어석은 센터 수갑에도 사용되는 물질이었다. 이 정도 공간에서 이용하려면 그 비싼 제어석을 수백 개를 박아야 하지만 이안은 그 미친 짓을 한 것 같았다.
“조금의 인내심만 가지면 끝나는 일인데 마지막에 와서 참지 못하시네요. 제가 결국 나쁜 마음을 먹게 하셨어요.”
“넌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잖아.”
이안의 핵이 사라지기 전, 나는 분명히 인기척을 느꼈다. 그들은 이안의 핵이 사라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안은 이들에게 핵이 사라지면 나를 넘길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그러니 6시간이라는 터무니없는 조건도 받아들인 것이겠지. 내게는 핵이 사라질 때까지가 리미트였고, 위치 추적 장치는 이안의 훼방으로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한결을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우리가 대화하는 사이 크리먼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캬악!”
이내 서로 눈짓하더니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몸으로 덤비는 걸 보니 대부분 육체계인 것 같았다. 최대한 공격을 피하며 유건과 등지고 반대편에서 싸웠다.
수적으로 열세이기도 하고 이러다간 답이 없을 것 같아서 바닥을 튀어 올라 벽 쪽으로 돌진했다. 벽을 부수면 공기의 흐름 때문에 파장 제어가 풀릴 것이다. 그러나 깡, 하고 둔탁한 소음만 날 뿐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어떤 물질로 만들어졌는지 경도가 높았다. 안에서 하는 공격이 모조리 막혔다.
“잡았다.”
그때 뒤늦게 내게 달려온 크리먼이 허공에 있는 내 발목이 잡았다. 그대로 몸이 쭉 당겨졌다. 바닥에 끌리며 속수무책 끌려갔다. 수많은 눈동자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구사월!”
고함과 함께 철제 컨테이너가 내 쪽으로 날아왔다.
“뭐야, 피해!”
커다란 부피감에 크리먼들이 반사적으로 넓게 퍼지며 공간이 생겼다. 나는 정면으로 날아오는 컨테이너를 내 발목을 붙잡았던 크리먼 쪽으로 찼다.
크리먼이 윽, 소리를 내며 저 멀리 날아갔다.
“괜찮아?”
멀리서 달려온 유건이 나를 부축했다.
“너무 내 쪽으로 던진 거 아니야? 내가 맞을 뻔했잖아.”
“아, 미안. 그 정도 반사 신경도 없을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했네.”
나는 그의 가슴을 퍽 쳤다. 유건은 이 상황에서도 장난을 치는 듯 입매에 웃음기를 머금은 채였다.
“여기 있는 컨테이너 다 던져 봐. 다 쳐낼 수 있으니까.”
승부욕이 생겨 씩씩거리자 유건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그럼 내기 하나 할까. 누가 더 많이 해치우는지.”
“너 염력도 못 쓰잖아. 당연히 내가 이기지.”
염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유건은 육체계로 따지면 C급과 비슷할 것이다. 이건 누가 봐도 내가 이기는 싸움이었다.
“대신 너는 현장 경험이 부족하잖아. 싸움은 능력보다 노련함이지.”
노련함을 논하기엔 유건은 센터 생활이 채 6개월도 되지 않은 신입이었다. 그러나 나는 현장을 나가지 않기에 유건보다 경험이 적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내가 불퉁한 표정을 지으며 노려보자 유건은 보란 듯이 근처에 차곡차곡 쌓인 커다란 컨테이너를 사람이 많은 쪽으로 휙휙 던졌다. 그 밖에 낡은 기계나 나무판자, 바닥에 있는 모래 같은 온갖 잡스러운 것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뿌리고 무기로 썼다.
“악! 내 눈!”
유건이 달려드는 상대의 눈을 찌르고 고간을 발로 차고 마지막으로 머리를 내려쳤다. 크리먼 일당은 어이없이 당한 크리먼을 보고 다시 유건을 바라봤다. 하나같이 쟤는 대체 뭐냐는 눈빛이었다.
“봤지?”
유건은 기세등등하게 내게 말했다. 약간 동네 골목길 잡배에게서 볼 법한 치졸한 방법이지만, 싸움에 익숙하지 않은 크리먼들에게 먹히는 것 같았다.
“어…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