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기다려야 하나?”
“바로 나올 거란 생각도 안 했어.”
유건과 나는 벽에 기대어 섰다. 가로등이 워낙 띄엄띄엄 있어서 사위가 어두웠다. 혹시 유건도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나.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유건까지 없는 건 내 안전이 너무 위험했다.
만약 유건이 있어서 이안이 나타나지 않는 거라면, 이 방법은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이쪽도 그다지 아쉽지 않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한 시간만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30분이 되기 전에 멀리서 사람이 걸어왔다. 학생으로 보이는 키가 작은 남자였다.
“이안 찾아왔죠?”
“네.”
“둘 뿐입니까?”
“네.”
그는 허락 없이 우리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더니 누군가에게 전송했다. 이안의 심부름꾼 역할을 맡은 사람 같았다.
뭐 하는 거냐고 한 소리 하려다가 말았다. 어차피 다 가리고 있어서 어디 유출되더라도 우리를 알아보긴 힘들었다.
“가기 전에 확인 좀 하라고 해서요. 팔 벌리고 서주시겠어요?”
그러더니 가방에서 손바닥 크기의 봉을 꺼냈다.
“그게 뭡니까?”
그 물건의 정체를 알 수 없어 나는 한 걸음 물러섰다.
“금속 탐지기요.”
“나 먼저 할게.”
유건이 먼저 확인하라는 듯 앞장섰다. 당당한 태도와는 다르게 탐지기가 그의 어깨에 닿자마자 삐빅, 소리가 났다.
남자가 뭐냐는 듯 눈을 치켜뜨자, 유건이 방긋 웃었다.
“들켰네.”
그러곤 겉옷을 벗어 어깨에 붙어 있던 위치추적 장치를 떼어 냈다. 그다음에는 팔뚝, 배, 어깻죽지와 엉덩이, 허벅지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남자는 도중에 짜증이 났는지 어차피 다 들키니까 빼라고 말했다. 유건은 꿋꿋이 이제 없다고 하면서 계속 발각되었고 걸린 것만 빼냈다.
“하, 진짜 짜증 나네.”
그다음은 내 차례였다. 남자는 같은 행동을 반복해야 하는 것에 살짝 열이 오른 것 같았다. 그가 인상을 굳히며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이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얼마 안 가 부르르, 진동이 울리며 답신이 도착했다.
“스스로 빼세요. 이제 걸리면 이 거래를 무효로 하신답니다.”
나는 유건이 어느 부위에 위치 추적기를 달았는지 알고 있었다. 옆에서 본 바로 저 봉은 감쪽같이 위치 추적기를 잡아냈다.
어차피 숨겨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내가 유건과 비슷한 양의 추적기를 쏟아 내자, 남자는 바닥에 쌓인 추적기를 보며 질린다는 표정을 했다.
봉으로 다시 한번 확인했고, 내 몸에서는 삐빅, 하는 경고음이 울리지 않았다. 다만 배 부근에서 봉이 깜빡거렸다.
“이게 왜 이러지.”
남자가 봉을 툭툭 두드리고 다시 몸에 가져다 댔다. 사실 오기 전에 몸수색을 당할 것 같아 새끼손톱만 한 위치 추적 장치를 먹었다.
센터에서도 임무 중에 사용하는 것이기에 몸에 들어가도 무리가 없었다. 이것도 걸리면 정말로 거래가 취소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갑시다.”
다행히 그것까지는 걸리지 않았고 남자는 그제서야 앞장서 우리를 이끌었다. 학생인 줄 알았던 남자는 갓길에 세워 놓은 차에 올라탔다.
이로써 내 위치가 한결에게 실시간으로 전달될 것이다. 예전처럼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게 안대를 착용시켰고 내려서도 안대를 벗을 수 없었다.
그때와 다른 건 계단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주위에 다른 인기척이 느껴지는지 주의를 기울였다.
사람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어느 공간에 들어서자 발걸음 소리가 미세하게 울려 퍼졌다. 굉장히 넓은 공간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았다.
“이제 벗으셔도 됩니다.”
안대를 벗었을 때는 눈앞에 기다리던 사람이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이안이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누가 보면 우리가 무슨 절친한 친구 사이인 줄 알 만큼 한가로운 인사였다.
“뭘 그렇게 철저하게 검사를 해? 어차피 내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건 알지 않나?”
우리가 도착한 곳은 넓은 공장 안이었다. 주변에 컨테이너가 쌓여 있었고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지 군데군데 먼지가 깔려 있었다.
“네. 여기저기 떠들썩하더라고요. 이전에도 스타긴 했지만, 이제 슈퍼스타라고 해야 할까요?”
나는 평소처럼 질문을 건넸고 이안 또한 평소처럼 재미없는 농담을 건넸다. 허튼짓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경고한 사람답지 않게 여유로운 태도였다.
내가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듯이 이안 또한 뭔가 숨기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대화하면서 가운데에 있는 간이 베드에 어서 누우라는 듯 손짓했다.
“잠깐. 흡혈하기 전에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나는 눕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는 듯 운을 띄웠다. 한결에게는 바로 미행하면 걸릴 수도 있으니 위치가 한동안 바뀌지 않으면 그때 움직이라고 했었다.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것이 중요했다.
“강지한이 항생제를 복제했다면서 마셨어. 알다시피 뭐가 잘못됐는지 폭주해 버렸고. 나는 그 녀석 말을 못 믿어서 안 마셨는데 다행이었지. 근데 네가 내게 준다던 항생제가 원래부터 미완성이 아니었는지 의심이 들더라고. 항생제가 정말 완성된 게 맞아?”
내가 지한과 완전히 한패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면서도 충분히 궁금증을 품을 수 있을 만한 질문을 했다. 이안은 살짝 난감한 듯 이마를 문지르더니 입을 열었다.
“음, 이걸 어떻게 확인해 드려야 할까요? 저 사람을 크리먼으로 만들었다가 항생제로 사람으로 되돌리면 증명이 될까요?”
그는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온 남자를 손짓했다. 남자는 이런 상황이 올 줄은 몰랐는지 몸을 움찔 떨며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강지한도 몇 시간은 인간이 된 것 같았어.”
“저는 구사월 가이드가 원한다면 시간과 관계없이 완전히 사람이 된다는 걸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전처럼 시간이 많았다면요.”
그렇다면 원래 크리먼이던 사람을 데려와서 확인시켜 달라고 하려고 했다. 그렇게 하면 시간을 몇 시간이고 끌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이제는 안 됩니다. 저는 오늘 만남을 마지막으로 저희의 거래를 끝낼 생각이거든요. 저도, 구사월 가이드도 길게 끌면 안 좋은 상황 아닙니까?”
이안과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애초부터 견고하지 않았다. 거래에 응한 것도 오고 가는 게 분명하기에 수락했었다.
한 번 삐끗한 거래는 오래 지속될수록 불안정해지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내 목적은 이제 항생제가 아니라 이안을 잡는 것이기에 나는 상관없다고 하면 될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눈치 빠른 녀석이 내게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을 살 수도 있는 노릇이라 선뜻 그럴듯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구사월 가이드가 선택하십시오. 제 말을 믿고 피를 줄 건지, 아니면 이대로 거래를 중지할 것인지.”
“내 피를 포기하겠다고? 네가?”
나는 내 피를 얻기 위해 그동안 이안이 무슨 짓을 했는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못 믿어도 상관없습니다. 어서 선택하십시오.”
내 목적이 항생제라면 분명 거절할 제안이었다. 이안의 태도는 무조건 제 말을 믿어 달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하지만 이제는 내 목적이 변했기에 적당히 고민하는 척 시간을 끌다가 입을 열었다.
“좋아. 하지만 거래가 완료되고 내가 항생제를 마신 다음 6시간 동안 인간 상태를 유지하는지 확인할 때까지 너는 이 자리에서 못 벗어나는 걸로 하지.”
“좋습니다. 그럼 하던 대로 누워 볼까요?”
6시간이면 시간은 충분했다. 정말 이안의 핵이 사라졌을 때 그가 내 약속을 지켜 준다면.
웬만하면 핵이 사라지기 전까지 한결이 나타나 주길 바랐다. 핵마저 사라져 버린 후에는 이안이 어떻게 행동할지 몰랐다.
그가 다른 크리먼과도 접선했다는 정보는 아무리 유건이 있더라도 불안 요소였다.
“오늘은 조금 더 아플 겁니다. 저에게도 마지막 만찬이 되겠군요.”
이내 내가 베드에 누웠고 유건이 내 근처에 가까이 다가왔다. 이안은 아까부터 잠잠한 유건에게 한번 눈길을 주더니 입맛을 다시다가 보란 듯이 내 목덜미를 물었다.
그동안은 유건이 이상한 억지를 부려서 팔만 물었기에 불시에 습격을 당한 것처럼 몸이 움찔 떨렸다. 이안의 이런 행동은 유건을 도발하는 것인지, 많은 양의 피를 흡혈하려는 것인지 의도가 불분명했다.
유건 또한 멈칫했지만, 양손에 주먹을 쥐며 참아 내려는 것처럼 보였다. 괜한 분란을 일으켰다가는 일을 그르칠 수 있었다.
흡혈 과정은 이안에게 물렸던 어떤 날보다도 가장 압박과 고통이 심했고, 몸속의 피가 모조리 빨려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내 입에서 차마 억누르지 못한 신음이 터질 때마다 유건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구사월. 내 손 물어.”
“아니… 읏, 됐어.”
나는 최대한 정신력으로 버텼다. 이를 하도 세게 깨물어서 턱이 뻐근했다. 크리처화를 개방해서 이안의 몸을 살피니 핵의 크기가 줄어드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로 변형되는 속도가 빨랐다.
그동안의 흡혈 덕분에 원래도 얼마 안 남았었고, 이대로 가다간 순식간에 핵이 사라질 것 같았다.
“윽….”
“잠깐. 이안, 멈춰.”
괴로워하는 내 모습을 보다 못한 유건이 이안의 어깨를 붙들며 제지했다. 나는 현기증이 난다는 듯 이마를 감쌌고, 이안은 잠시 입을 떼더니 서늘한 눈길로 유건을 바라봤다.
“기절시킬 셈이야? 오늘 안에만 끝내면 되는 건데 왜 이렇게 급하게 진행하는 거야?”
무슨 의도가 있는 게 아니냐는 듯한 의심스러운 말에 이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냉담한 눈을 풀었다. 그러곤 옆에 있는 수건으로 입술을 닦았다.
잠시 휴식할 때 이안이 하는 행동이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확인했다. 손목시계를 보니 채 10분이 지나지 않았다.
한결이 언제 올지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이 정도 압박이라니…. 이안이 그동안 나를 봐줬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