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3/131)

“나 애주 단지처럼… 모실 거라며.”

“그러려고 했는데 뚜껑 열어서 향기 맡고 한 방울 맛보니까 못 참겠는 거 있지.”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엄청난 존재감이 느껴졌다. 단번에 목 끝까지 차오르는 압박감에 숨이 막혔다.

“백유건, 이거 너무… 으으.”

말도 안 된다고 그만하자고 말하려고 했는데 점점 커지는 압박감에 앓는 소리만 났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는 안 된댔잖아. 이렇게 하면 너 아프다고.”

원래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아픈가? 몸이 둘로 쪼개지는 것 같았다.

왜 그가 도구가 꼭 필요한 것처럼 말하는지 알 것 같긴 했지만, 그게 있어도 드라마틱하게 괜찮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

유건이 내 몸을 부드럽게 건드릴 때는 더 큰 감각이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애가 달았는데 이건 상상과 너무 반대됐다.

‘대체 인간들은 이걸 왜 하려고 하는 거지?’

너무 놀라서 나오던 파장도 쏙 들어갔다. 유건 또한 고통스러운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흐으, 아파…. 이거 아닌 것 같아.”

“어. 이거 아닌 것 같아.”

계속 느껴지는 압박에 물러나지 않을 줄 알았더니 그가 가볍게 수긍하며 허리를 물렀다. 오늘은 왜 여기서 하면 안 되는지 알려 줬다고 치고 다음으로 미루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유건의 파장 특유의 몽글몽글한 기류가 짙어지더니 몸 위로 뭔가 흘러내렸다.

“이거로 대체 됐으면 좋겠는데.”

알 수 없는 말을 해 놓고는 다시 몸을 붙인 후 움직였다.

“흐응, 읏.”

느릿하게 계속되는 행위에 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아직도 빠듯했다.

“사월아. 못 참겠으면 내 어깨 물어.”

그가 몸을 가까이 붙여 목을 가져다 댔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콱 깨물었다.

웬만하면 정신을 유건의 피 맛에 집중하려 했다. 달콤한 피가 입 안에 맴돌다가 식도로 떨어지자 이전보다 참을 만한 것 같았다.

흡혈을 멈추면 다시 고통이 찾아올까 봐 인정사정없이 삼켜 내고 있는데, 순간 찌릿하고 오싹한 전율이 일었다.

몸 전체의 근육이 잔뜩 쪼그라들었다가 모래성이 허물어지듯 서서히 쓸려 나갔다.

“하아… 이거 미치겠네.”

생전 처음 느낀 감각에 어안이 벙벙한데, 유건이 크게 탄식했다.

“좋을 거라고는 예상했는데 이건 진짜….”

그는 목울대를 크게 움직이며 억눌린 숨을 내뱉었다. 키스를 하며 혀에 힘을 빼고 부드럽게 입 안을 헤집었다.

반면 몸의 움직임은 점점 성이 난 것처럼 거칠어졌다. 잔잔한 해변에 파도가 밀려오듯 유연하게 움직이면서도 긴장이 풀린 틈을 귀신같이 알아내 금세 해일처럼 덮쳐들었다.

“흐응, 흣… 조금만… 천천히.”

“미안. 조절, 하고 싶은데… 잘, 안 돼.”

내가 힘들어 보였는지 그가 계속해서 얼굴 위로 입맞춤을 내렸다. 절절 끓는 눈빛이 애절하면서도 열기를 못 견뎌 했다.

“너무 좋아, 구사월. 나 뼈째로 삼켜 줘.”

정말 그를 삼켜 낼 것처럼 몸이 단단히 조여들었다. 유건이 성난 맹수처럼 몰아붙였다.

두 사람이 조금의 틈도 없이 밀착해 하나처럼 흔들렸다. 오래된 매트에서는 녹슨 쇳소리가 났고, 창에 떨어지는 빗줄기는 점차 굵어져 우리의 비밀스러운 행위를 감춰 줬다.

한계까지 차오른 숨에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심장에 닿는 펄떡거림이 내 것인지 그의 것인지도 분간이 안 갔다.

붉은 피와 파장, 두 사람의 땀 냄새가 엉망으로 뒤엉켰다. 몇 번인지도 모를 열락에 취해 연신 야릇한 신음이 입 밖으로 튀었다.

접합부가 얼얼할 정도로 궁지에 내몰려 골반을 뒤틀자, 유건이 허리를 다시 끌어와 내 몸에 뿌리를 박을 것처럼 깊게 들어왔다.

걷잡을 수 없는 쾌락이 몸 곳곳을 난사했다. 눈앞이 하얗게 번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아, 후으….”

유건이 이마를 맞대며 참아 왔던 숨을 몰아쉬었다. 내 코와 광대뼈, 언제 물기가 어린지 모를 눈매까지 부드럽게 입술을 문대고는 깊게 입을 맞췄다.

“이대로 네 안에서 살고 싶어.”

그는 끝났음에도 좀처럼 나갈 생각을 안 했다.

“네 혈관에 흐르는 피가 전부 내 걸로 이루어졌으면 좋겠어.”

“이게 사랑 고백인지 노예 선언인지 모르겠네….”

온몸에 힘이 빠져 늘어진 채 대꾸하자, 유건이 햇살처럼 웃었다.

“둘 다 아닐까?”

유건이 나를 좋아하는 건 알았다. 얘는 마음을 고백한 이후로 나를 한 번도 헷갈리게 하지 않았다.

말로, 몸으로, 눈빛으로 모든 감각을 동원해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가끔 그 정도가 너무 무겁고 크게 느껴져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하지만 버거울 정도로 쏟아지는 애정이 좋았다.

그에게 나는 크리먼이든, S급 가이드든 중요하지 않았다. 유건 앞에서는 크리먼으로서 갖게 된 죄책감도 S급 가이드로서 짊어져야 할 무게도 필요 없었다.

그는 그런 식으로 어느새 불안정한 내 삶의 버팀목이 되어 있었다. 유건 앞에서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도 되는 게 나를 숨 쉬게 했다.

***

“너 그거 들었어?”

“뭐?”

한적한 골몰길에 와인 바. 이곳은 크리먼의 비밀 기지 중 하나였다.

“탈옥한 구사월 가이드 말이야. 핵이 없대. 그 사람 피 마시면 핵이 아예 사라진다던데?”

“영화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야? 핵이 어떻게 사라지냐?”

“아니야. 그래서 가이드 습격 사건 범인이 그 사람 쫓고 있었던 거래. 등급 높은 가이드의 피를 마실수록 핵이 작아진다는 거는 다른 크리먼들 통해서 검증된 거잖아.”

“그렇긴 하지만… 핵이 사라지면 그럼 어떻게 돼?”

“안 죽는 거지. 불사. 대박이지.”

남자는 영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은 친구를 보며 점점 심각한 표정으로 변했다.

“미쳤네. 구사월 가이드 어디 있대?”

“난들 아냐.”

사월에 대한 비밀은 크리먼들의 입에서 입으로 계속 퍼져나가고 있었다. 비밀을 알게 된 자들은 대부분 그다음으로 사월의 행방에 대해 궁금해했다.

이 소문이 진실인지 알고 싶어 했다.

“그래서 말인데 내 친구의 친구가 사람을 모으고 있대. 구사월 가이드 찾으면 알려 주기로.”

“알면 뭐 하게?”

“뭐하긴. 언제까지 이렇게 언제 들켜서 죽을까 전전긍긍하면서 살 거야. 너는 핵 없애고 싶지 않아?”

“없어지면 좋기야 하겠지. …나도 끼워 줄 수 있어?”

“당연하지. 너 등급 높으니까 애들도 좋아할 거야. 또 낄 만한 아는 크리먼 없어?”

“있어. 잠깐 기다려 봐. 여기로 부를게.”

그들에게 ‘불사’란 굉장히 매혹적인 먹이였다. 자신도 그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눈을 번뜩였다. 가이드이자 크리먼이니 피를 나눠 먹을 필요도 없었다.

핵이 없는 크리먼은 척박한 사막에서 줄어들지 않는 물통과도 같았다.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 주고 끝없이 재생되어 그들에게 ‘불사’를 가져다줄 것이다.

“안녕하세요. 재밌는 얘기를 하는 것 같던데 저도 들어 볼 수 있을까요?”

그들이 분주하게 다른 크리먼 지인에게 이 사실을 메시지로 전하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가 다가왔다. 모자를 푹 눌러 쓴 채 마스크와 안경까지 착용한 모습이었다.

아무리 크리먼만 이용 가능한 와인 바라도 비밀스러운 정체인 만큼 이 정도 변장은 빈번했다. 하지만 비밀을 공유하려면 서로의 얼굴 정도는 공개하는 것이 관례였다.

마스크만 벗어보라는 듯이 입 주변을 손가락질하자, 다가온 남자가 마스크를 턱 끝까지 내렸다. 잘생긴 외모에 저절로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어떤 게 궁금하십니까?”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20평 남짓한 와인 바가 크리먼으로 가득 찼다. 그들은 그날 밤, 긴 이야기를 나눴다.

오랜만에 떠들썩한 소리는 밖에서 들으면 파티라도 열린 듯한 분위기였다. 그들은 해가 뜰 때쯤 즐거운 대화였다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흩어졌다.

남자는 다시 마스크를 눈 아래까지 덮어쓰고 더욱 외진 골목길로 들어섰다. 와인 바에서부터 남자를 주의 깊게 지켜보던 추격자는 은밀하게 따라붙었다.

거리의 소음이 멀어지고 오로지 남자의 발소리만 터벅터벅 들려왔다. 추격자는 작지만 날렵하여 자기 신체를 이용해 몸을 숨기며 접근했다.

바스락.

그때 마른 낙엽을 밟은 추격자가 후다닥 몸을 숨겼다. 남자가 미세한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다가 눈치채지 못했는지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한시름 놓으며 추격자가 남자가 꺾은 코너를 돌아섰을 때였다.

“쥐 새끼가 숨어들었네.”

남자와 추격자가 맞닥뜨렸다. 쥐 새끼란 비유가 아니었다. 정말로 새까만 눈을 한 회색 쥐가 두려움에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찍….”

남자는 어느새 안경과 모자를 벗어 은색 머리칼을 휘날리고 있었다. 꼬리가 잡힌 추격자는 남자의 손에 거꾸로 매달려 버둥거렸다.

“어느 쪽인가…. 센터? 아니면, 구사월 가이드?”

이안은 가이드 습격 사건의 범인이란 것이 밝혀진 이후로 줄곧 센터에 쫓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있기 전, 누군가 사라진 연구원을 꾸준히 찾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혹시 안전에 위험이 될까 상대를 역으로 파헤쳐 보자, 평범한 크리먼이었다. 아니, 평범하지는 않은 건가.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는 평범하다기엔 많이 특별한 능력이었다.

그 추적은 이안이 사월과 접선한 후로 뚝 끊겼다. 그래서 이안은 애니멀 커뮤니케이터가 사월 쪽 사람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센터 쪽에도 오스카 팀에 같은 능력을 쓰는 에스퍼가 있기에 사월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이 깜찍한 쥐의 배후가 누구인지 알아내야 했다.

“찍찍… 찍….”

대화도 통하지 않는 이 쥐에게 어떻게 배후를 알아낼지 고민하는 사이, 뒤에서 다른 쥐의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살짝 틀자 수십 마리의 쥐가 골목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안이 크리먼화를 개방했기에 겁에 질려 있으면서도 그 쥐를 놓으라는 듯 앞을 가로막았다.

“친구야? 와, 멋진 친구들이네.”

이안은 한가로운 어조로 말했다. 이안의 손에 잡혀 있던 쥐의 발버둥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친구들이 그를 도와주리라 믿는 것이다.

“근데 너희가 뭘 할 수 있어?”

이안의 날카로운 손톱이 단숨에 쥐의 심장을 할퀴고 지나갔다. 눈앞에서 동료를 잃은 쥐들이 멈칫거렸다.

“너희가 모여 봤자 뭘 할 수 있냐고.”

이안은 붉은 피가 흘러내린 손바닥을 혓바닥으로 길게 핥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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