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화 (121/131)

“센터에 있는 크리먼들 의견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들이 이렇게 모인 건 그간의 진행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밖에서는 이안을 잡기 위해 그 방안을 마련하는 데 집중하고 있고, 안에서는 반란에 필요한 명분을 착실히 쌓고 있었다.

“크리먼을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게 된다면 정체를 밝히고 싶은 의향이 있는지 센터 내에서 확인된 18%의 크리먼과 연관된 사람들에게 은밀한 방법으로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중 78%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높은 확률이었다. 센터에 복무하는 크리먼을 대상으로 하니 바깥에 있는 크리먼보다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리라는 건 예상했지만, 78%라면 예상보다도 많은 숫자였다.

“다행이네요. 당사자들이 원하지 않는 세상이라면 의미 없는 짓이니까요.”

만약 반대가 많았다면 이 대의는 사월을 센터에 다시 데려오고 싶어 하는 한결의 욕심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센터 내부에 18%의 사람들이 크리먼과 연관이 있다는 것과 그들 중 78%의 지지율이 있었다는 걸 그들에게 전부 전달했습니다. 대의에 참여할 생각이 있다면 때를 기다리라는 메시지도요.”

“수고하셨습니다.”

크리먼과 관련된 사안은 센터에서 예민한 문제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다. 함께하는 동료가 많다는 걸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다면,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필요할 때 주저하는 시간이 짧아질 것이다.

변화를 이렇게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그들은 이렇게 나서서 세상을 바꿔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크리먼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도 당장은 이 변화에 거부감이 들 테지만, 국가를 수호하는 센터의 각성자 중 많은 인원이 크리먼인 게 밝혀진다면 무분별한 비난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크리먼을 무서워하는 이유는 살육만을 목적으로 하는 크리처와 동일시하기 때문인데, 그들은 이미 그런 본능을 절제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에 녹아든 걸 증명한 셈일 테니.

높은 등급의 각성자가 국력이 되는 세상에서 검증된 인력을 배제하는 건 멍청한 일이고, 처음 일반인이 에스퍼로 각성했을 때도 이와 같은 상황을 겪었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능력은 경외심과 함께 미지의 두려움을 가져왔다.

에스퍼가 파장이 낮아졌을 때 이성을 잃는 건 크리먼과 비슷한 점이 있었다. 그러니 에스퍼처럼 크리먼도 공격성을 제어할 시스템만 구축한다면 안전하다는 걸 사람들에게 인식시킨다면 충분히 크리먼이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안만 잡으면 될 것 같은데. 사월이한테 믿고 맡겨도 될 것 같으냐.”

“잘할 겁니다. 일이 꼬여도 동료가 많이 생겼으니 저희 쪽에서 움직여도 될 일이고요.”

거기서 더 나아가 다른 각성자처럼 능력 있는 크리먼은 영웅이 될 수 있다고 한결은 믿었다. A지부의 각성자들은 모두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은 각성자이고, 이안을 잡는 데는 크리먼인 그들이 활약해야 더 좋은 그림이 나올 것임이 자명했다.

“사실 이 일은 내가 진작 처리했어야 할 일인데 면목이 없구나. 뒤늦게 도와주려고 온 것인데 네가 다 준비를 철저하게 해 놔서 도와줄 게 없어.”

“지부장님이 뜻을 같이해 준다는 것 자체가 도와주시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를 전한다기엔 부자지간에 다소 딱딱한 말투였지만 지상은 기분이 좋아졌다. 동시에 자신이 못 한 일을 해내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자랑스럽다는 마음마저 들었다.

***

오랜만에 비가 내렸다. 바람 없이 조용히 내리는 부슬비가.

빗줄기가 지붕에 닿는 소리가 토도, 도독 일정한 박자로 떨어졌다. 비에 젖은 나무 냄새가 살에 눌어붙듯 진하게 느껴졌다.

“빗소리 좋다. 예쁘게 내리네.”

트리 하우스의 창은 침대 헤드 쪽에 있어서 비 오는 풍경을 보려면 반대로 누워야 했다. 쿠션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는데 샤워를 마친 유건이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어내며 말했다.

“좋은 냄새 나.”

그는 머리카락을 어느 정도 말리고 자연스럽게 내 머리를 들어 쿠션 대신 자기 어깨를 베게 했다. 막 씻고 와서 그런지 그에게서 부들부들한 비누 향이 났다.

좀 더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특유의 달콤한 냄새가 스며들었다.

“피 마실래?”

“아니.”

입을 달싹이는 걸 들켰는지 유건이 넌지시 물어 왔다. 거절하긴 했지만 습도가 높아서 그런지 유건의 단내가 더 짙게 느껴져 참기 힘들었다.

“준다고 할 때 마시지?”

“너 방금 씻었잖아.”

“안 흘리고 마시면 되지.”

나는 대답 대신 그의 몸에 올라탔다. 내가 뭘 하려나 지켜보는 시선에는 장난기가 다분히 묻어 있었다.

고개를 내려 쇄골 위를 잘게 깨물자 단맛이 났다. 유건이 아이스크림이나 사탕도 아닌데 왜 살에서 단맛이 나는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평화롭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다 거짓말 같아.”

유건이 나직하게 읊조리며 후우, 하고 더운 숨을 내뱉었다. 그는 이제 흡혈을 당하면서도 꽤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가끔 이대로 너랑 여기서 갇혀 지내고 싶단 생각 들어. 너 하나만 있으면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누구 마음대로.”

먹다 말고 반문하자, 유건이 옅게 웃었다. 어림도 없다는 듯이 말했지만 이곳이 편안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여기는 내 피를 노리는 사람도 파장을 노리는 사람도 없었다. 크리먼인 걸 들켜서 언제 사살당할까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아침을 맞이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이렇게 비가 오면 운치 있는 풍경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그동안 너무 쫓기듯이 살아서인지 이 순간이 더 소중하게 와 닿았다. 어서 이 시기가 지나갔으면 하면서도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든 작전을 성공시켜야겠다는 의지는 잦아들지 않았지만, 실패했을 때의 경우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 마무리되면 어떻게 할 거야?”

유건이 옷 위로 허리를 부드럽게 매만지며 물었다. 옷이 점점 밀려 올라가 그의 손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숨이 더워졌다.

“모르겠어.”

한결은 크리먼을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게 하고 센터의 시스템을 새로 구축한다고 했다. 그 시스템 중 가장 메인이 되는 것은 크리먼 팀을 결성하는 거였다.

취지는 좋지만 큰 변화에는 당연히 어려움이 따른다. 애써 쌓아 온 기존의 기반을 버려야 하는 위험한 도전이다.

게다가 크리먼은 게이트가 인류에 출현했을 때부터 절대적인 악으로 치부됐다. 합리적인 시스템을 구축한다고 해도 오랜 시간 형성된 고정 관념이 족쇄로 작용할 것이다.

내가 크리먼인 게 밝혀졌을 때, 각성자들이 나를 어떤 눈으로 바라봤는지 나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강렬한 장면이겠지.

놀라움과 혐오, 두려움과 살기, 불안함과 섬뜩함. 어느 것 하나 긍정적인 기억이 없다. 그들이 그렇게 반응하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당사자인 나는 견디기 힘든 것도 사실이었다.

만약 팀이 결성되면 센터의 크리먼들은 그 같은 시선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그 냉소적인 시선을 견디고 묵묵히 전진해야 한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지 감히 내가 예상할 수조차 없었다.

생존을 위해 끝없이 싸워 왔을 그들이 잘 해내리라곤 믿지만 내가 그 무게를 평생 견뎌 낼 수 있을까?

지금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분명해서 움직이는 이유가 컸다. 크리먼의 최소한의 권리가 인정된 사회에서 내가 앞장서고 싶은지는 아직 확답할 수 없었다.

“나는 네가 하자는 대로 할 거야. 부담 가지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 봐.”

“장래가 촉망되는 S급 에스퍼의 미래가 내 손에 달렸는데 어떻게 부담을 가지지 말래.”

“그런 거 신경 썼었어?”

“당연하지. 난 항상 네 발목 붙드는 느낌이라 너 밀어냈던 거야. 내가 센터로 안 돌아가도 너는 돌아갔으면 좋겠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왜 말이 안 돼? 계획이 잘 풀리면 내가 혼자 있다고 위험해질 일도 없는데.”

이안이 사라지면 유건이 굳이 나를 경호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너 핵 없다는 거 퍼지고 네 피 노리는 크리먼이 얼마나 많아 졌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야?”

“아, 게네들도 있었네. 게네들은 뭐… 어떻게 되지 않을까? 아님 너 말고 경호 에스퍼 몇 붙여 놓으면 되지.”

크리먼에게는 파장이 통하지 않아서 기절시킬 수 없지만, 나는 크리먼일 때 A급이었다. 크리먼 중에는 S급이 없는 거로 알았기에 최고 등급인 것이다.

작정하고 숫자로 밀어붙이면 모를까 별로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집 주변에 경호 에스퍼 몇 명 붙여 놓는 정도면 예방할 수 있겠지.

유건이 센터까지 그만둬 가면서 내 옆에 붙어 있지 않아도 됐다. 무엇보다 평생 그가 자기 일도 마음 놓고 하지 못할 정도로 내게 붙어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너 은근 안전 불감증이야. 스스로를 너무 믿는 건지….”

“네가 분리불안 있는 건 아니고?”

“이런 말 안 하고 싶었는데 해야겠어. 너 평생 조심하면서 살아야 돼.”

“알아. 나도 안다고.”

그의 잔소리가 심해질 것 같아 나는 적당히 하라는 듯 수긍했다.

“후…. 그러니까 내 옆에 꼭 붙어 있어.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너 험한 꼴 당하게 안 할 테니까.”

유건은 내 위험에 대해서 굉장히 예민했다. 아마 그 기점은 이안에게 피 칠갑을 한 채 쓰러진 장면을 목격하고 난 후 같았다.

그는 그때 큰 충격을 받았다. 내 품에 안겨 울면서 제발 위험한 일 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할 정도로.

그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유건에게 안 좋은 트라우마를 심어 준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았다.

“나는 내가 험한 꼴 당하는 것보다 이제 네가 죽는 게 더 무서운데?”

유건이 울적해지는 것 같아 새침을 떨며 말했다. 꽉 다물린 입술이 점점 허물어지더니 웃음기가 퍼졌다.

“방금 죽을 뻔했어. 심장 떨어져서.”

그가 자기 심장을 움켜쥐며 나보다 더 오버를 했다.

“나 왜 이렇게 네가 나 좋아한다는 게 실감이 안 나지. 적응이 안 되네.”

“그래 보여. 30배 어쩌고 하더니 손가락 하나도 안 잡는 거 보면.”

“내가 또 언제 손가락 하나도 안 잡았다고. 비약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내가 과장해서 말한 거긴 했다. 유건의 손은 지금도 어느새 옷 속을 파고들어 척추뼈를 느리게 쓰다듬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