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이번에 너한테 한결 형 파장 느껴지는 것 보고 싸웠다가 화해한 것 같길래 나는 이제 진짜 틀렸나 싶었지. 네 비밀도 밝혀졌고 두 사람 사이에 장애물을 이겨 낸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때 마지막으로 관계 정리한 거였는데. 마지막이니까 포옹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유건은 그때 한 번 더 오해한 것이다. 유건의 반응이 재밌어서 한결과 그를 놀린 건데 그를 심각한 고민에 빠뜨린 계기가 됐다.
“그래서. 나 포기하려고 했어?”
“너 여기 오자마자 피 먹인 거 보면 몰라?”
나는 수용소에 있느라 오랫동안 피를 마시지 못해 트리 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그만큼 부족한 양을 채웠다. 그러고 보니 첫날은 그렇다 치더라도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유건은 제 손가락을 굳이 내 입에 물리면서 피를 마시라고 종용했다.
“단둘이 있게 된 김에 너 완벽하게 중독시켜서 형이랑 이어져도 나 못 버리게 만들려고 했는데?”
“…지독해.”
절로 혀가 내둘러졌다. 장난기 있는 목소리였지만 아예 장난으로 한 말은 아니리라.
만약 내가 계속 한결을 좋아했더라면 셋이서 더럽게 얽혀 버렸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네가 나를 좋아해서 다행이야. 나 나쁜 놈 안되게 해 줘서 고마워.”
“모르겠어. 내가 너를 좋아한 게 정말 다행일까. 이게 최선인지 갑자기 혼란스럽네.”
“혼란스러워하지 마. 너한테는 내가 딱 맞아. 나이도 딱이고 매칭률도 딱이잖아. 파장도 딱 맞고, 피 냄새도 딱이야. 너를 위한 종합 선물 세트 같은 사람이지. 너는 최고의 선택을 한 거야.”
그가 내 귓가에 주문을 외우듯 같은 말을 반복했다. 사실이라기보다는 주입에 가까웠다. 이제 무를 수 없다고 종지부를 찍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질린다는 표정을 하자 입에 따스한 입술이 닿았다.
***
유건과 트리 하우스에 온 지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바깥 상황은 잠잠해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금껏 센터에서 우리를 못 찾은 걸 보면, 이 장소가 안전하다는 건 어느 정도 검증된 사실이었다.
우리는 이제 슬슬 이안을 찾을 계획을 세워야 했다. 유건과 나는 어떻게 이안을 찾을지 고민하다가 에밀리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내가 자주 만나는 지인이 별로 없었고, 센터에서 에밀리를 예의주시하고 있을지 몰라서 그녀에게 연락을 하기 전에 한결을 통해 센터 상황을 파악했다. 역시나 센터에서는 에밀리에게 내 일로 조사 협조 요청을 했다.
하지만 담당자가 국현이라서 그녀에게 만나고 싶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월아!”
에밀리는 나를 보자마자 반갑게 달려와 안겼다. 그녀를 마중 나갔던 유건이 뒤따라왔다.
“걱정돼서 죽는 줄 알았잖아. 왜 이제야 연락했어.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왜 이런 통나무집에 있는 거야?”
그녀는 트리 하우스 외관이 많이 낡아 보였는지 걱정스러운 눈을 했다.
“들어가면 생각보다 괜찮아. 밥 먹었어?”
“응! 근데 주면 또 먹을 수 있어!”
“그럼 백유건한테 만들어 달라고 하자.”
“그래!”
오랜만에 발랄한 에밀리를 보니 기분이 좋았다. 유건도 과묵한 편이 아니고 잘해 주지만, 여자 친구와 있을 때 느껴지는 편안함과 친밀감이 있었다.
“센터 사람들 어떻게 너한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미친 거 아니야? 내가 다 물어뜯어 줄까?”
“아니, 이제 내가 물어뜯으려고.”
“아하하. 그래. 이제 다 밝혀졌으니까 그래도 되겠다.”
그 때문인지 에밀리와 있으면 평소보다 말을 많이 하게 되고 즐거웠다. 우리가 수다를 떠는 동안 유건은 숲에서 바로 구할 수 있는 신선한 재료로 음식을 해 줬다.
자연산 과일과 나물에서 숲의 향취가 물씬 느껴졌다.
“에밀리. 사실 내가 너를 이렇게 부른 건 부탁할 게 있….”
“좋아! 뭐 하면 되는데?”
밥을 다 먹을 때쯤 본론에 들어가려는데 에밀리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탁을 수락했다. 되려 내가 당황해 말을 덧붙였다.
“아니, 생각 좀 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나 이제 지명 수배자고 네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이야.”
“걱정 마. 내 몸을 내가 지킬 정도는 되니까. 그리고 나 조심성 많은 거 알지? 절대 안 들킬 테니까 괜찮아!”
그녀는 동물과 소통할 수 있는 희귀한 능력을 지닌 크리먼이다. 그녀가 직접 나서지 않고서도 정보를 모을 수 있었다.
능력의 특수성 때문에 들키지 않을 거라고 자신만만할 것일 테지만, 그녀는 이 일이 아니라도 항생제에 그다지 흥미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몇 년간 같이 찾아 줬다. 언제나 내 부탁을 선뜻 들어 줬다.
이런 처지에 놓이니 그 변함없는 모습이 더 미안하면서도 고맙게 느껴졌다.
“내가… 너한테 진짜 잘할게. 항상 고마워.”
왠지 먹먹함이 올라와 속으로 감정을 추슬렀다. 옆에서 지켜보던 유건이 내 어깨를 지그시 다독였고, 에밀리는 언제나처럼 밝게 웃었다.
“우리 겨울에 여기 또 오자. 쫓겨서가 아니라 놀러 오는 걸로. 눈 내리면 예쁠 것 같아.”
“그래.”
나는 다시 한번 우리의 계획을 꼭 성공시킬 거라 다짐하며 에밀리에게 한결과 국현의 계획을 공유했다.
에밀리는 센터장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때는 놀란 표정이긴 했지만 심각하다는 것에 더 가까운 반응이었다. 또, 센터 내에 국현이 알고 있는 크리먼과 관련된 각성자 수와 센터장의 리스트를 총합하면 18%가 크리먼이거나 혹은 크리먼을 숨겨 주고 있다는 말에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번쩍 뛰었다.
“정말? 그게 사실이라고?”
“어. 지국현 에스퍼가 정신을 읽은 거니까 확실할 거야.”
“세상에…. 사회에 생각보다 크리먼이 많은 건 알았지만, 어떻게 그 많은 크리먼들이 센터에 숨어서 복무할 수 있었던 거지?”
“일단 이안이 가이드를 습격한 후부터 급격하게 많아졌대. 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안이 개입한 것 같아. 그리고 크리처화를 개방하면 핵을 볼 수 있잖아. 서로를 알아보고 살아남을 방법을 같이 모색한 것 같아. 정신계 하나만 있어도 진단원은 속일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식이면 어렵지 않았겠지.”
“하긴, 크리먼들은 소수라서 단합력이 좋으니까.”
에밀리는 이해가 간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 뭘 해야 돼?”
“이안을 찾는 거. 내가 이안을 다시 만나서 거래를 할 수 있게 중간 다리 역할만 해 주면 돼.”
“그래? 이안과 관련된 물건이나 사진 같은 게 있으면 훨씬 수월한데. 뭐 없을까?”
에밀리가 동물들에게 수색을 맡기려면 그 사람의 체취가 묻어 있는 물건이나 외형을 알아볼 만한 사진을 보여 주는 게 좋았다.
이전에 사라진 연구원을 쫓을 때는 아예 실마리가 하나도 없어서 힘들었지만, 이제는 내가 이안과 마주한 적이 있으니 묻는 것 같았다.
“사진은 없고 외양 묘사로는 안 될까? 본모습이 조금 특이한 행색이거든.”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안이 허술하게 그런 물증을 내게 남겨 둘 리 없었다.
“뭔데?”
“은발에 온몸에 마법진같이 보이는 타투가 있어. 안경을 쓰면 타투가 다 없어지고 카키색과 가까운 머리카락이야.”
“확실히 특이하긴 하네.”
“근데 그 안경이 외모는 바꾸지 않지만 머리카락 색은 바뀌게 할 수 있는 것 같아서 충분한 정보가 안 될 것 같긴 하다.”
“그럼 어쩌지?”
에밀리와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에밀리가 활용할 수 있는 눈과 귀가 아무리 많아도 상대가 다양한 방법으로 변장하니 어떤 정보를 기준으로 잡아야 할지 곤란했다.
“이안한테 바다 냄새 같은 게 난다고 하지 않았어?”
그때 지켜만 보고 있던 유건이 말했다.
“그 시험관 용액 냄새 같은 거 난다고 했잖아. 그 냄새 좀 독특하니까 그거로는 안 되나?”
확실히 이안은 외양이 변해도 항상 같은 냄새를 풍겼다. 그 냄새 때문에 나도 이안의 정체가 밝혀지기 전 불길함을 느꼈었고, 이안은 자신에게 그런 냄새가 나는 걸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거면 될 것 같아. 외양은 일단 경우의 수를 여러 개 두고, 그 냄새를 중점적으로 추적하기로 하자.”
“우와. 유건이 똑똑하다. 한 건 했네?”
우리는 추적할 기준을 정하고 논의를 일단락했다. 에밀리가 유건에게 대단하다며 엄지를 들어 올렸다.
“내가 할 땐 하지. 나 빨리 칭찬해 줘. 잘했지.”
유건이 자기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는 듯 들이댔다.
“어. 잘했어.”
스스로 강아지이길 자처하는 녀석이 귀여워 보여서 흔쾌히 기대에 부응해 줬다.
***
- 그래서 에밀리가 도와주기로 했어요. 원래 이안 연구소였던 곳 가서 용액 채취하고 추적해 보려고요.
“잘했네. 힘들면 도와주려고 했는데 알아서 잘하고 있었네.”
- 선배는 센터에서 할 일 많잖아요. 거기에 집중해 주세요.
“예. 구사월 가이드님.”
- 저 가이드 때려치웠는데요? 이제 크리먼 구사월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뉴스에서도 다 그렇게 부르던데.
오랜만에 듣는 사월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무척 밝았다. 스스로 크리먼이라고 불러 달라는 듯한 말에 한결이 웃음을 흘리자, 옆자리에서 회의 중이었다는 걸 일깨워주듯 큼, 하는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래. 크리먼 구사월 씨. 내가 회의 중이라서 끝나고 다시 걸게.”
- 아, 네. 죄송해요. 회의 중인지 몰랐어요. 그럼 전화 기다리고 있을게요.
- 기다리긴 뭘 기다려. 보고할 거 다 끝났잖아. 형, 전화 다시 안 해도 돼. 안녕!
- 야, 백유건! 휴대폰 이리 안 내…!
중간에 끼어든 유건이 사월 대신 인사를 하며 다급하게 통화가 종료됐다. 목소리가 너무 커서 한결 옆에 있던 A지부 지부장, 지상도 들었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둘이 잘 지내고 있나 보구나.”
“같이 다니더니 서로 조금씩 닮아가는 것 같아요.”
“사랑하면 서로의 모습을 닮아가기 마련이지.”
그런 점에서 둘은 서로 좋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인간관계에서 염세적이던 사월은 어느새 사람에 대한 믿음이 싹터 그들과 협력하며 일할 줄 알게 되었고, 타고난 능력은 갖췄으나 다소 욕심이 없어 보이던 유건은 근성과 집념이 생겼다.
“큼, 내가 말실수했군.”
“지부장님. 그 말을 하면 한결 캡틴이 더 어색해지십니다.”
잠시 생각에 잠긴 한결의 모습에 기분이 좋지 않게 보였는지 지상이 눈치를 보며 말을 물렀다. 건너편에 앉아 있던 국현이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웃음기를 머금으며 말했다.
“저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결이 괜찮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물론 완전히 사월에 대한 마음을 정리했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사월과 유건, 그 둘은 한결의 인생에서 그를 가장 많이 웃게 해 주었고 누구보다 아끼는 사람들이었다.
남아 있는 미련에 슬퍼하기 보다는 그들의 행복을 빌어 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