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119/131)

우리 사이에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눈치를 보던 아주머니께서 다급하게 집을 나섰다. 아주머니가 나가며 유건의 등을 떠밀었고 그가 방으로 들어오는 쿵 소리와 함께 비로소 우리 둘만 남았다는 것이 실감 났다.

“…너 씻을 거야? 안 씻을 거면 나 씻고 나온다.”

“잠깐만.”

뒷말은 듣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렇지 않은 척 샤워실로 도피하려는데 유건이 내 팔목을 붙잡았다.

“아니지?”

“뭐가?”

“방금 들은 거.”

“…….”

일말의 희망이 조각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우리의 대화를 모조리 들은 것 같았다.

“무슨 그런 재미없는 농담을 해. 어른들 놀리면 못써.”

“…그러게. 아니라고 말할 타이밍 놓쳐서 농담이라고 말 못 했네. 다음에 말씀드려야겠다.”

도저히 표정 관리가 안 될 정도로 당황했으면서 입은 생존 본능과도 가까운 기지를 발휘해 거짓말을 술술 읊었다.

“근데 너 왜 내 눈을 피해?”

“피하긴 무슨. 이거 놔. 씻고 나올 거야.”

“너 농담 같은 거 잘 안 하잖아. 몇 번 보지도 않은 사람이랑 그런 농담을 한다고?”

“네가 말했잖아. 재미없는 농담하지 말라고.”

“네가 너무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니까.”

“그러니까 농담이라고.”

“아니, 근데 분위기가 이상하잖아.”

그러나 유건은 나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내 입에서 그가 원하는 답을 나오게 하고 싶어 했다.

“너…. 나 좋아해?”

그 말에 따끔, 흡사 양심에 찔리는 것처럼 날카로운 것이 닿는 느낌에 몸을 움찔 떨었다.

“말하기 부끄러운 거면 고개만 끄덕여.”

“부끄러운 거 아니야!”

“그럼.”

3일의 고민이 무색하게 내 계획은 순식간에 전복되어 버렸다. 현장을 들켜 버린 시점에서 빠져나갈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말하기 싫었어.”

“그럼 어쩌려고 했는데.”

내 얼굴에 점점 그늘이 드리웠다. 반면, 유건의 얼굴은 점점 햇볕이 스며든 듯 온기가 퍼져나갔다.

“다이아 반지나… 하다못해 꽃 한 송이… 근사한 말 한마디라도…. 내가 며칠 전부터 고민해 봤는데… 마땅한 게 잘 안 떠올라서… 야, 너 지금 웃어?”

고해 성사를 하듯 침울하게 주절거리는데 유건이 입가를 손바닥으로 가리며 참다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 잠깐만 기다려 봐.”

잠깐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 나서는 숨기지 않고 푸하하 웃었다. 좁은 트리 하우스를 가득 메우고도 남아 저 멀리 숲속에 있는 새들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크게….

너무 수치스러웠다.

“웃지므르.”

“너무 웃기잖아. 너답지 않게 왜 그런 고민을… 아니, 뭔가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 미치겠다.”

이를 꽉 물며 위협적인 목소리를 내 봤지만, 그는 웃음이 멎지 않았다. 눈물까지 나오는지 얼굴 전체를 감싸고 입은 헤벌쭉한 상태였다.

“안 부끄럽다는 거 취소.”

“어딜 가.”

도저히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어서 뒤돌아서며 도망가려 했다. 유건이 팔을 끌어와 몸을 빙글 돌려세우더니 내 양 뺨을 손으로 고정시키며 얼굴을 마주하게 했다.

“나 진짜 좋아해? 정말로?”

“그렇다니까!”

얼굴이 눌려 화내 봤자 우스워 보이기만 할 것이다. 유건의 만면에 퍼진 미소는 오늘 아침 내 잠을 깨운 햇볕보다도 따스하고 반짝거렸다.

“에이, 화내지 말고. 백유건 사랑한다고 해 봐.”

“사랑까지는 아니야!”

“그럼 한 번만 좋아한다고 해 봐.”

“안 놓으면 창문으로 뛰어내릴 거야!”

“안 놔줄 건데 어떻게 창문으로 가.”

모든 것이 허망하고 허탈해져 눈가를 찌푸리며 울상을 했다. 유건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금세 눈가가 촉촉해졌다. 내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내리곤 품에 안으며 작게 속삭였다.

“나도 좋아해, 구사월.”

유건에게 처음 듣는 말이 아닌데도 무언가 육중한 무게가 내 심장에 내려앉는 것 같았다. 동시에 조금 버겁게 느껴질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고백하는 데 이 말 빼고 뭐가 더 필요해. 특히 너는 내가 그 말 기다렸던 거 뻔히 알면서….”

그의 손길이 닿는 머리와 등, 어깨 모든 곳에서 설레는 떨림이 묻어났다. 그의 애틋한 감정까지도. 마주한 가슴에는 유건 역시 더 이상 숨기지 않아도 돼서 신난 어린아이 같은 열띠고 순수한 박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가 내 말 안 믿을 거 같았단 말이야.”

“응. 아직도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긴 하는데.”

갑자기 산통을 깨는 말에 몸을 떨어뜨리며 노려봤다.

“왠지 듣는 순간 이건 진심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심장이 너무 뛰어서.”

“그게 뭐야….”

“만져볼래? 진짜 엄청 뛴단 말이야.”

“알아. 안고 있을 때 다 느껴졌어.”

그는 그럼 더 느껴 보라며 숨이 막힐 정도로 꽉 안았다.

“너무 좋아. 꿈만 같아.”

모든 계획이 엉망이 되어 버렸지만 사실 처음부터 아무래도 좋았던 것 같았다.

유건에게 중요한 건 고백의 방법이 아닌 내 진심 그 자체였고, 그는 이 순간을 오래전부터 묵묵히 기다려 왔다.

나는 그런 그가 고백받고 조금 더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골몰했다. 저마다 서로를 좋아하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가 웃는 모습을 보니까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던 마음 한구석이 빠듯하게 채워진 기분이었다. 기분 좋은 충만감이 몸 안 가득 퍼져 나갔다.

그날 하루 유건과 나는 좁은 침대에 꼭 붙어 누워서 못다 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유건은 그다지 나에게 해명할 게 없었지만, 나는 무척 할 말이 많았다.

“너랑 그때는 별 사이 아니었으니까 선배랑 약속한 데이트 얘기는 안 한 거야. 그 후에는 네가 너무 내가 선배를 좋아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어서 얼마나 답답했다고!”

“에구, 그랬구나.”

“그래서 마지막 데이트 때도 너 아픈 것 같아서 저녁도 안 먹고 온 거고 미안하고 좋아하니까 잘해 주려고 죽도 하고 옆에 있어 주려고 한 건데 너는 내가 또 뒤통수치려고 하는 거 아니냐는 것처럼 말했잖아!”

“그게 서운했었어? 내가 잘못했다, 그치?”

‘아니, 이게… 이게 아닌데….’

분명 이 대화의 요지는 오해를 풀자는 거였는데 왠지 계속 투정을 부리는 모양이 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원래는 ‘이러이러해서 내가 미안했었다’로 끝내려고 했는데 계속 마지막에는 유건을 탓하고 있었다.

“아니, 내가 잘못한 거지…. 그땐, 내가 미안했어.”

뒤늦게 수습하자 유건의 입에 물든 미소가 더욱 진한 선을 그렸다.

“우와, 구사월이 사과를 하네. 사랑에 빠지니까 되게 안 하던 짓 한다.”

“사랑까지는 아니라니까? 그리고 원래 잘못한 건 사과 잘하거든?”

“계속 이성과 감정이 싸우는 것 같은데 불쑥불쑥 원래 성격이 나와서 웃긴 거 알아?”

“…….”

“원래대로 해. 나는 너 착해서 좋아하는 거 아니야.”

나도 자기 객관화는 할 줄 알았다. 그것도 꽤 정확하게. 사회 통념상 착하다고 여겨지는 기준에 부합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게 착하다는 말은 바보, 혹은 호구 같은 느낌이었고 긍정적인 이미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내게 착하지 않다고 말하면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았었다.

그런데 유건에게 듣는 ‘착하지 않다’는 말은 묘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그럼 뭐가 좋은데.”

내가 유건을 좋아하고 나서 하는 ‘안 하던 짓’은 그저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해 주고 싶은 마음과 칭찬을 듣고 싶은 마음에 기인했다.

유건이 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게 매력을 느끼는 부분일 테니, 굳이 못 하는 걸 단련하기보다는 잘하는 걸 발전시켜서 유건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유건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너무 생각이 길어져 혹시 생각해 보니 없는 건가 싶을 정도로….

나는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기분이 나빠졌지만 인내했다.

“예뻐서?”

“…….”

그러나 인내해서 얻은 답변은 무척 가볍고 속물적이었다.

“그럼 내가 못 생겨지면 안 좋아해?”

“아니지. 너는 나랑 무려 89%의 매칭률을 자랑하는 가이드잖아.”

진짜 죽여 버리고 싶었다.

“저리 꺼져. 아, 짜증 나.”

“아니, 장난. 장난이야. 삐지지 마. 이리 와.”

몸을 반대로 돌려세우며 그의 팔을 쳐 대자, 그가 다시 등 뒤로 몸을 맞붙였다.

“이유가 너무 많아서 못 고르겠는데. 네가 짜증 부리는 것도 좋고, 내 피에 정신 못 차리는 것도 좋고, 은근 게으른 것도 좋고, 입맛 까탈스러운 것도 좋아.”

“…그거 안 좋은 점 아니야?”

“네 자체가 좋은 거지.”

“…….”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무척 멍청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는 크리먼인 내 모습마저 품어 줬다.

나 또한 유건의 장점만 보고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그 사람 자체가 좋았고 보고 있으면 금세 화사한 감정이 퍼져 나갔다.

그를 보면 웃음이 났다.

“처음에는 동정이 먼저였던 것 같은데….”

그는 혼잣말하듯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유건은 내가 크리먼인 걸 알게 된 후, 나를 감시한다는 명목하에 페어를 하며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크리먼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질수록 나를 애잔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동정으로 시작한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 당시에는 유건이 짜증 나고 이상한 놈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서서히 변해 갔다. 나를 불쌍히 여겨 곁에 있으려 하는 유건을 불쌍해했다.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사는 내게서 멀어지지 못하는 녀석이 안타까워 눈길을 주고 곁을 내주다가 그것이 이제 단지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그의 온기에 기대며 옆에서 살아 숨 쉬고 싶었다.

“어느 순간 네가 크리먼이어도 상관없다는 감정이 들더라고. 그때가 시작이었으려나.”

“그게 언젠데?”

“내 숙소에서 네가 흡혈하고 나서 앞으로 주기적으로 피 바치라고 했을 때.”

이제 와서 그의 입으로 들으니 너무 흑역사처럼 느껴져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냥 주고 싶던데? 별로 아깝게 느껴지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았어. 피 하나만으로 관계 유지할 수 있으면 나한테 이득인 것 같은 생각까지 들었었지.”

‘아니, 그때 그런 생각을 했다니….’

나는 페어를 취소할 요량으로 한 극단적인 행동이었는데 그는 그걸 피라는 조건으로 나를 옭아맬 수 있다는 희망으로 받아들였다.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내 생각보다 더 오래전부터 미친 상태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