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117/131)

한결은 내가 수용소에 갇혀 있는 동안 많은 것들을 진행하고 있었다.

“네가 밖에 나가면 이안은 아직 네 피가 필요하니 언젠간 찾아올 거야. 위험하긴 하겠지만….”

“할게요.”

나는 한결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답했다.

“할 수 있어요. 제가 밖에서 이안 끌어들여 볼게요.”

“근데 지한이 크리먼으로 변하는 순간 네가 옆에 있었어. 둘이 같은 패로 봐서 이안은 네가 일부러 접근하면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이전보다 훨씬 위험 요소가 많을 거야. 그래도 할래?”

“네.”

한결이 이 임무의 위험성을 충분히 알렸지만 내 의지는 변함없었다. 내 행동에 가장 큰 제약은 언제나 내가 크리먼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밝혀졌고 나는 이제 숨길 필요가 없었다. S급 가이드라고 얌전히 지켜져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니 크리먼이라는 이점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다.

내 피를 원하는 이안은 언젠가는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니 이 작전에 나만 한 적임자가 없었다.

“그래. 근데 너 혼자만 움직이는 건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아서 같이 행동할 사람을 구했어.”

“누구요?”

마침 문이 열렸다. 상대의 얼굴을 보자마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대단한 사람이라도 붙여 주는 줄 알았더니 또 얘예요?”

“구사월!”

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유건이었다. 나는 괜히 너무 반갑다는 표정을 한 것 같아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내게 폭삭 안겼다.

“숨 막혀. 떨어져.”

그 반동에 몇 걸음 뒷걸음질 치며 앓는 소리를 냈다. 누가 보면 죽다 살아난 사람을 만난 줄 알 것이다. 고작 며칠 보지 않았으면서 이렇게 유난을 떠는 게 어이없으면서 귀엽게 느껴졌다.

가만히 등에 손을 얹으려는데 유건이 불현듯 코를 킁킁거렸다. 이윽고 몸을 떨어뜨리며 한결과 나를 노려봤다.

“뭐야? 왜 한결 형 파장이 느껴져?”

“그러게. 왜 그럴까?”

“그러게. 나도 모르겠네.”

한결은 장난스럽게 픽 웃었고 나도 유건의 반응이 웃겨서 맞장구쳤다. 유건의 미간에 점점 더 깊게 골이 패였다.

“다 모였으니까 오늘 탈출 작전 상세하게 브리핑해드릴게요.”

가장 최하층으로 내려갔던 국현이 우리가 모인 걸 어떻게 알았는지 타이밍 좋게 등장했다. 도청기나 CCTV가 없다더니 왠지 속은 기분이었다.

***

우리 넷은 탈출 작전뿐 아니라, 광장에서의 사고에 관한 이야기도 공유했다. 일단 지한이 왜 갑자기 변했는지에 대해 물었고, 항생제 복제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했다.

“그럼 너한테도 그 용액이 있단 말이야?”

“근데 그때 넘어지면서 옷 속에서 깨졌어요. 있어도 어차피 미완성이거나 실패한 것으로 보이니까 쓸모없는 일이죠.”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이 있긴 했다. 지한이 전날 세뇌시킨 크리먼에게 먹였을 때는 분명 성공했다고 했는데.

지한은 먹은 지 몇 시간이 흐른 후에 폭주했다.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에 지한이 굳이 거짓말을 할 것 같지 않아 찝찝했다.

“근데 복제에 실패한 게 맞을까?”

한결 또한 뭔가 이상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원래 항생제가 미완성 아니야?”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강지한도, 이안이 크리먼한테 먹여서 사람 되는 걸 보여 준 장면도 잠깐뿐이었으니까요.”

항생제의 행방은 다시 미궁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이안밖에 알지 못했다.

우리는 조금 더 의견을 나누다가 크리먼을 인간으로 되돌리기 위해 이안을 잡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일단 미뤄 두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밤, 탈출 작전이 시작됐다. 사실 국현이 ‘작전’이라고 했지만 그렇게 복잡하진 않았다.

세뇌당한 교도관은 퇴근했다가 잊은 게 있다며 새벽에 사복을 입고 수용소로 들어와 내 문을 열어 줬다. 파장 제어 장치가 있는 수갑까지 풀어 주었고 나는 그와 옷을 바꿔 입었다. 수용소 입구를 지키던 경비 에스퍼는 방사 가이딩으로 기절시켰다.

조금 극단적인 방법이지만 조용히 빠져나오려면 이 방법이 가장 깔끔하고 효과적이었다.

그렇게 센터 뒤쪽 공원에 가서 비밀 통로로 센터를 나왔다. 신호등 앞에는 유건의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별일 없었어?”

오다가 술 취한 에스퍼들이 말을 걸어서 기절시킨 것 말고는 변수는 없었다.

‘도합 5명 정도 기절시키고 온 건가….’

한 손가락이 넘는 숫자도 아니고 경보가 울리지도 않았으니 내 기준에서는 별일 없었다고 보는 게 맞았다.

“응.”

선뜻 고개를 끄덕이니 유건이 잘했다는 것처럼 머리를 쓰다듬었다.

“근데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이제 우리는 내일부터 센터에 쫓기게 될 것이다. 해가 뜨면 센터에 한바탕 난리가 날 테니 당분간은 조용히 지낼 생각이었다.

오전에 논의 중에 다행히 유건은 갈만한 곳이 있다고 말했고, 한결은 미리 유건에게 들었는지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한결이 뭐라고 하지 않은 걸 보면 믿을 만한 곳 같긴 한데….

“너희 별장 중 하나는 아니지?”

“별장? 그게 별장으로 취급되나?”

“그런 곳 가면 금방 잡힐 거야. 그리고 들키면 너희 가족들한테도 피해가 갈 거고.”

“부모님이 허락했어.”

“뭐? 진짜 별장이야?”

한결에게 지부장이 우리의 편에 서 준다는 것은 이미 들었다. 지부장이 허락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우리가 갈 곳이 별장이라는 듯한 내 예측이 맞는 것에 더 놀랐다.

유건의 별장이라면 관리인이나 사용인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언질을 준다 해도 소문이 새어 나갈 확률이 높았다.

“아니. 별장이라고 하기엔 허름하고 텐트라고 하기엔 갖출 거 다 갖춘 곳.”

유건은 마치 수수께끼를 내는 것처럼 빙빙 돌려서 말했다. 내가 모르겠다는 듯 인상을 구기자 프스스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걱정 마. 거기 아무도 못 찾아오니까.”

뭔가 미심쩍지만 일단 그를 믿고 따라갔다. 유건의 차는 한참을 운전해 D 지역까지 건너갔다. 점점 으슥한 곳으로 빠지더니 금세 높다란 산에 올랐다.

“여기서부터는 내려서 조금만 올라가면 돼.”

그러고선 느닷없이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등산하자고 말했다. 유건이 생각한 장소가 산속에 있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어두운데 산을 어떻게 타.”

유건이 에스퍼고 내가 크리처화를 개방시키면 산 오르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어두운 시야는 문제였다.

“걸어서 올라간다고는 안 했는데.”

뭐라고 묻기도 전에 유건이 예전에 염력으로 공중에 떠서 이동할 때처럼 내 몸을 들어 올렸다. 익숙하게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 상태로 하늘과 가까워지자 사방이 그렇게 어둡게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오늘은 달이 밝았고 산이어서 그런지 별이 밤하늘을 빼곡히 수놓았다.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느껴졌다.

처음 내렸을 때는 약간 으스스한 것 같다고 여겼는데 금세 낭만적인 풍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내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자 유건이 내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별 보는 거 좋아해?”

“그런 것… 같아.”

사실 좋아한다 싫어한다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하늘을 보며 감상에 젖을 성격도 아니었고 A 지역은 유독 별이 없는 지역이었으니까.

그나마 어릴 때는 가끔 하늘을 바라보곤 했는데 그때도 이렇다 할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좋다고 느끼는 걸까. 왜 밤하늘에서 눈을 못 떼겠지?

“이제야 알았네. 좀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걸.”

“왜?”

“진작 보러 왔으면 좋을 뻔했잖아. 너랑은 편하게 밖에서 놀러 다닌 적도 없어.”

그렇긴 했다. 유건과의 관계는 계속 친구와 동료 사이에 애매하게 걸쳐 있었고, 가이드 습격 사건의 피해자가 된 이후로는 집중 보호 대상이 되어 센터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앞으로 자주 나오면 되지.”

“그럴 수 있을까….”

유건이 평소답지 않게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또한 자신 있게 말했지만 확답할 수 없는 문제인 건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제 길거리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었다. 내가 이안을 잡고 나라에서 크리먼의 처우를 개선해 주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둘 사이에 끼고 싶진 않은데….”

“둘 사이라니?”

당연히 우리의 계획이 실패할 경우를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유건이 의아한 말을 했다.

“아니야. 아무것도.”

유건이 쓴웃음을 짓다가 표정을 갈무리했다. 나는 뒤늦게 그 둘이란 게 나와 한결을 말하는 것이란 걸 깨달았다.

“백유건. 내가 그때 말했다시피….”

“다 왔다.”

해명하려는데 유건이 급하게 말을 돌리며 하강했다. 유유히 떠다니다가 급격히 내려가는 느낌에 본능적으로 그의 목에 둘러맨 팔에 힘이 들어갔다.

내려갈수록 커다란 나무들이 시야를 가렸고 유건이 가볍게 내 몸을 지상에 내려 줬다. 내려온 곳은 특별한 것 없는 숲속이었다.

지반이 평평하긴 했지만 집은 보이지 않고 텐트마저도 없었다.

“야, 백유건 여기 아무것도….”

유건에게 따지려는데 등 뒤로 반짝하고 빛이 쏟아졌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자 커다란 고목 위에 집이 있었다.

3층 높이 정도 돼 보였고 올라갈 수 있게 나무로 계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앙증맞은 트리 하우스였다.

***

유건이 마련한 장소는 좁긴 했지만 아늑하고 안전했다. 높이는 높되 크기는 작아서 누군가 주변을 지나가도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다.

산을 내려가면 유건의 별장이 있었고 이 트리 하우스는 유건이 등산을 좋아해서 부모님이 산 중턱에 만들어 준 거라고 했다.

내부는 에스닉한 침구가 깔린 침대가 있었고 건식 화장실과 철제 싱크대, 테이블까지 유건이 말한 대로 생활에 필요한 건 거의 다 갖춰져 있었다.

첫날에는 집 구경을 조금 하다가 쌓아 둔 갈증을 채우고 곧바로 잠들었고 둘째 날도 별다른 일은 없었다. 조금 불편한 게 있다면 아침에 새소리 때문에 깨야 하는 것과 따스한 햇살이 낯설다는 것 정도.

쉬는 날이면 늘어지게 늦잠을 자는 나에게는 반갑지 않았다. 정신이 들고 나면 사방을 메우고 있는 나무 냄새와 풀냄새가 좋다고 느꼈지만 그것도 3일이 안 갔다.

자유롭게 밖을 나가지 못한다 생각하니 갑갑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크리먼이란 사실이 밝혀진 사건은 역시나 사람들에게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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