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6/131)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럴 줄은 알았지만 막상 닥치니 이런 짓까지 해야 하나 새삼 내 처지가 밑바닥으로 떨어진 것이 실감 났다.

하지만 크리먼인 게 밝혀진 마당에 앞으로 이보다 더 수치스러운 상황이 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물며 등급에 열등감이 있던 각성자들이 S급 가이드인 나를 얼마나 나를 꺾고 싶겠는가.

벌써부터 지칠 수 없었다. 여기 있다가는 온갖 고문과 실험을 당하다가 버려질 것이다. 내가 삶에 미련이 없을지언정 그런 짓까지는 당하기는 싫었다.

“보고만 있을 수 있어요? 만지고 싶진 않아요?”

문만 열고 접근하면 저 녀석 한 명쯤은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손이 묶여 있긴 하지만 내게는 이제 날카로운 이도 있었다.

교도관이 침을 꿀꺽거리는 소리가 내게 들릴 정도로 선명했다.

“에스퍼 여럿 홀렸다더니 장난 아니네, 이거?”

이윽고 교도관은 금방이라도 문을 열 것처럼 철컥거렸다.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내 몸을 직시했다. 그때였다.

“그러게요. 에스퍼 여럿이 이럴까 봐 가 보라고 하더군요.”

“앗, 지국현 에스퍼님. 안녕하십니까.”

문이 열리기 전, 국현이 찾아왔다. 이 상황에서 결코 반가운 손님이 아니었다.

“어느 팀 소속입니까?”

“저, 그게….”

“내 수용소에서 이딴 식으로 일합니까?”

그 교도관은 국현에게 한참이나 깨졌다. 교도관인데도 불구하고 징벌방으로 보낼 거라느니, 지하실로 보내서 사내구실 못 하게 잘라 버리겠다느니, 차마 내 입으로 다 말할 수 없는 잔인한 언사에 교도관이 연신 사죄의 말을 반복했다.

“죄송합니다.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한 번만 봐주십시오.”

“별 쓰레기 같은 것들이…. 일단 이 문 열어요. 당신은 차후에 제가 다시 부르겠습니다.”

“예!”

이윽고 수감실로 국현이 들어왔다. 그에게서 오늘도 향기로운 꽃 내음이 났다. 처음에도 든 생각이지만 무감정한 표정과 참 어울리지 않는 향이었다.

“구사월 가이드. 오랜만이네요?”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지금 한가롭게 인사나 나눌 상황인가.

내가 멀뚱히 쳐다만 보자 그가 문 쪽으로 고갯짓했다.

“나오십시오. 제 방으로 이동할 겁니다.”

그가 나를 찾아온 건 뻔했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심문을 시작하려는 것이다. 나는 긴 복도를 지나 국현의 방으로 향했다.

“구사월 가이드도 이런 식으로 교도관 자극하지 마십시오. 가이드가 겁도 없이.”

왠지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처럼 들려서 헛웃음이 흘렀다.

“아니, 크리먼이라서 겁이 없는 건가?”

그가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다면 제일 지하에 있는 국현의 방에서 고된 고문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느새 그의 방문 앞에 도착했고, 나는 그가 무슨 짓을 해도 한결과 유건에 대한 건 절대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편하게 얘기 나누십시오. 제 방은 함부로 도청기나 CCTV를 달지 못합니다.”

“……?”

그가 문을 열기 전, 이상한 말을 했다.

‘국현과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니었나?’

의문스러운 눈길을 보내는데 문이 열렸다.

“캡틴?”

그 안에는 한결이 있었다.

“두 분이 저를 심문하는 건가요?”

내 말에 두 사람이 묘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내 국현이 아무런 대꾸 없이 출입문 건너편에 있는 가장 최하층으로 이어진 문을 열었다.

“저는 내려가 있겠습니다.”

문이 닫히고 적막한 공기가 감돌았다. 심문한다기엔 분위기가 왠지 이상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테이블에 내 몫의 티가 마련돼 있었고, 한결은 오랜만에 만나 약간 어색한 것처럼 애매한 미소를 짓다가 내 팔목에 수갑을 풀어 줬다.

“이거… 풀어도 돼요?”

“그럼.”

수갑을 풀고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광장에서의 사고 이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뻣뻣하게 굳어 있던 한결의 얼굴이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많이 놀랐었냐는 말도, 그를 탓하는 말도 어울리지 않았다. 괜히 눈치를 보고 한결이 먼저 심문에 관한 말을 하길 기다리고 있는데 그가 의외의 말을 했다.

“한 번만 안아 봐도 될까?”

“네?”

한결이 내 팔을 끌어와 품에 폭 안았다. 시원한 풀 향과 함께 묵직하게 박동하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했지만, 왠지 그를 떨쳐 낼 수 없어 가만히 서 있었다.

“사월아, 미안해. 광장에서 아무것도 못 해 줘서.”

“…….”

“아니, 내가 그동안 배려해 준다는 핑계로 너를 혼자 내버려 뒀어.”

그에게 어떤 행동을 바란 건 아니지만, 그 상황 자체가 씁쓸하게 다가온 건 사실이었다. 꿈은 내 불안감에 기인했던 허상이었고, 그 예측이 들어맞아 버렸으니까.

“처음에는 네가 나한테 기회도 주지 않고 밀어내는 게 억울하다고 생각했어. 내가 먼저 네 비밀을 알았다면 네 옆에 설 수 있는 게 나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는 깊은 회한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그게 이제 아닌 걸 알았으니까…. 이 포옹을 마지막으로 정리할게.”

그는 그 상태로 한참을 안고 있었다. 정말 이걸로 마지막이라는 것처럼.

“저도 미안해요. 선배를 믿지 못해서.”

묵은 숨을 내쉬는 한결의 등을 가만히 다독였다. 그가 나를 외면한 것을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가 이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이유를 찾자면 나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내가 크리먼이란 걸 알게 되면 한결이 나를 혐오할 거라 지레 겁먹고 그를 믿지 못했다. 다가가지도 못할 거면서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우리는 서로가 너무 조심스러웠고, 서로의 치부가 상대방에게 해가 될까 항상 한 걸음 떨어져 있었다.

그러니 애틋했지만 관계가 발전할 수 없었고 서서히 멀어져 갔다. 이제는 설레던 감정은 추억으로 묻어 두고 앞을 향해 나아 가야 할 시기였다.

그를 안고 있으면서 나 또한 남아 있던 감정의 잔여물을 떠나보냈다. 미성숙했고 불안정했던 내 첫사랑이 이제야 완전히 마침표가 찍힌 기분이었다.

“죄수복도 잘 어울리네.”

“놀리지 마세요.”

이윽고 몸이 떨어졌을 때는 나와 한결 모두 어딘지 개운한 표정이었다. 그와 내가 비로소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센터에서 어떻게 나가게 될지 알려 줄게.”

한결은 유건과 약속했던 계획을 알려 줬다. 나를 괴롭히던 담당 교도관은 현재 국현이 세뇌 중인 각성자였고, 오늘 세뇌가 완료되니 오늘 밤에라도 나가려고 한다면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되도록 나는 네가 빨리 탈출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지금 지국현 에스퍼가 심문 일정을 미뤄서 아무런 지시도 내려오고 있지 않은데, 상부에서도 슬슬 조급해하는 눈치거든.”

교도관의 입으로 들은 파장 추출기에 대한 소문은 사실이었다. 상부에서는 인체 실험에 대한 승인이 이미 떨어졌다고 말했다.

나도 더 이상 센터에 오래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나가면 도망자 신세로 지내야 하겠지만 Z 지역처럼 게이트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자들이 밀집된 지역으로 가면 숨어 사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럼 오늘 밤에 나갈게요. 그렇게 진행해 주세요.”

“그래. 그리고 한 가지 더 전할 게 있는데….”

“네.”

한결은 이야기를 꺼내기 전 태블릿 피시로 문서를 띄웠다. 그 안에는 센터 각성자들의 프로필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센터 안에 크리먼과 관련된 사람 리스트야.”

“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에밀리를 통해 언론에 보도된 것보다 주위에 크리먼이 많이 숨어 살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건 수가 너무 많았다.

리스트는 한참을 넘겨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더 놀라운 것은 크리먼인 각성자 또한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C지부에서 가이드 습격 사건 조사를 방해한 사람이 센터장이란 걸 알아냈어.”

그 후에 이어진 진실은 이보다 더 심각하고 무거운 얘기였다. 센터장은 대체로 등급이 높고 ‘비페어주의’인 가이드를 크리먼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안에게 습격당한 가이드 또한 ‘비페어주의’ 가이드였다. 내게 하려던 짓처럼 이 리스트에 있는 가이드가 크리먼이라는 것을 하나씩 폭로하고 파장 추출기를 이용해 파장을 강제로 뽑아내려 한다는 얘기였다.

“나는 이번 기회에 센터장을 몰아낼 거야. 그리고 시스템을 바꿀 거야.”

“어떻게요?”

한결은 특유의 단호하고 확신에 찬 시선을 보냈다.

“크리먼을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센터 안에 크리먼 팀을 만들 거야.”

“그게… 가능할까요?”

‘크리먼을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한다니…. 그럼 크리먼에게도 인권도 주권도 생기는 건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어서 얼떨떨했다. 내가 인간이 되는 상상을 하는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미 오래전부터 크리먼이었던 각성자들이 많았고 그들이 아무런 무리 없이 센터에서 제 역할을 해낸 게 증명됐어. 하지만 크리먼의 위험성은 간과할 수 없으니 그에 맞는 시스템은 새로 구축해 나가야겠지. 그건 내가 다 생각해 둔 게 있어.”

왜 이 순간 아빠가 한 말이 떠오를까. 착한 크리먼들이 미움받지 않게 하려고 항생제를 만든다는 말이….

아빠는 사회가 편견에 사로잡혀 인식이 바뀌는 건 너무 힘들고 오래 걸리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인 항생제를 개발하려 했다.

그리고 에밀리의 친구는 크리먼의 갈증을 조절할 수 있는 약을 개발했다. 한결은 알파 팀 캡틴으로서 한결은 크리먼을 위해 시스템을 새로 구축하려 한다.

저마다 각자의 위치에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반면 나는 크리먼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세상 따위 없을 것이라 단정 지었다. 그래서 인간이 되려고 하기에만 급급했었다.

“저도 도울 수 있는 게 없을까요?”

그것이 옳은 길이라면 이제라도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소수의 사람이 권리를 인정받고 변화하려면 더 크게 소리 지르고 싸워야 한다.

나도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싶었다.

“안 그래도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얘기한 거였어. 네가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

그는 그 말을 하면서 강요하는 건 아니니 편하게 대답해 달라고 덧붙였다.

“센터장이 이안을 돕고 있다는 증거가 부족해. 그래서 센터장의 측근을 포섭하려고 하는데 경계심이 강해서 난항을 겪고 있거든. 사실 이건 이안을 잡아서 정신을 읽으면 끝나는 문제라서 유건이가 말해 준 이안의 연구소로 가 봤어. 근데 역시나 이미 자취를 감췄더라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