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도 주저하고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내면 그녀가 더 불편해할까 봐 말해 주길 기다렸다. 이제와 보니 그건 배려가 아니라 그만큼 절박하지 않은 것이었다.
어릴 때의 사월이 그랬던 것처럼 넘어지면 가장 먼저 한결을 찾아올 것이라 믿었다. 늘 그랬던 대로 자신이 그녀의 우선순위일 거라 생각했다.
오만했던 것이었고 겁쟁이 같은 짓이었다. 한결은 그래서 그에게 주어졌던 수많은 기회를 잃은 것이다. 결국 기회를 차 버린 건 자신이었다.
반면 유건은 주저함이 없었다. 그의 눈에 사월밖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곧바로 그녀 앞에 섰고 그녀를 지켜 냈다.
뒷일은 생각 안 하는 막무가내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사월에게는 그렇게 조건 없이 자신을 믿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자신이 크리먼이란 것이 밝혀졌을 때 일말의 고민 없이 그녀를 선택할 사람이.
그 찰나에 사월을 도왔을 때 따라올 이목과 결과적으로 어떤 것이 사월에게 나은 선택일지 고민하는 자신 같은 사람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한결이 사태를 수습하고 사월이 나갈 방도를 모두 설계했지만 그녀는 분명 상처받았을 것이다.
자신이 사월의 비밀을 늦게 알아채서 억울하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자신의 수많은 주저함이 그녀를 잃게 만든 것이다.
사월이 유건을 선택한 이유를 인정해야 했다.
똑똑.
“네.”
긴 복도를 지나 끝에 있는 방에 들어섰다. 안에는 국현이 있었다.
“회의는 어땠습니까?”
“어차피 죽지 않으니 파장 추출기로 구사월 가이드의 파장을 뽑아낸다고 하더군요.”
“파장 추출기라면… 이안이 만든 거 아닙니까?”
국현이 다소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파장 추출기는 대외적으로 A지부 에코팀 팀장이 발명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이안이 C지부에 있을 때 발명한 기계였다.
이안이 A지부로 오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공을 넘긴 것이라 여겼는데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맞습니다. 물증이 잡힌 거죠.”
가이드 습격 사건 임무를 방해한 건 센터장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이안과 거래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었다.
센터장은 이안에게서 이득이 되는 어떤 것도 받아 낸 것이 없었고, 이안이 발명한 기계가 한둘이 아니었으며, 파장 추출기를 저런 식으로 사용할 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이상하다고 여겼던 퍼즐의 조각들이 차근차근 맞춰지고 있었다.
“이안에게 가이드를 팔고 파장 추출기를 얻은 거네요.”
그리고 파장 추출기를 사월에게 사용하려는 걸 보니 센터장의 목표가 뚜렷하게 보였다.
센터장은 사월이 S급 가이드로 발현했을 때부터 그녀를 눈여겨봤었다. 백씨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한결과 이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상황은 센터장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유건과 페어 중에 한결과 스캔들이 나고 다시 페어를 취소하는 등, 백씨 형제 에스퍼들이 가이드 하나에 휘둘리고 있다는 소문이 났다. 센터장은 그녀가 백씨 형제 중 누구와도 이어지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S급 가이드를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할 방법을.
“센터장은 에스퍼 뜻대로 되지 않는 가이드를 크리먼으로 만들어서 이를 빌미로 강제로 파장을 추출하려는 겁니다.”
한결은 긴급 대책 회의가 끝난 뒤 곧바로 센터장의 데스크에 있던 가이드 리스트를 훑어봤다. 역시나 그들은 ‘비페어주의’를 주장하는 가이드였고, 등급이 높았다.
가이드 습격 사건의 피해자 역시 모두 ‘비페어주의’ 가이드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등급이 높으니 자연히 에스퍼들이 가이드에게 매달렸고, 그게 아니더라도 페어를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센터장의 눈 밖에 난 것이다.
“근데 구사월 가이드까지 이안에게 팔았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건 저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센터장이라도 S급 가이드를 이안에게 넘길 리 없습니다. 그리고 이안과 거래할 시기에는 구사월 가이드가 크리먼인 것도 몰랐을 겁니다. A17 구역에서 구사월 가이드가 첫 번째 습격을 당했을 때, 그때가 아마 이안과 관계가 잠시 틀어졌던 시기겠죠.”
파장 추출기를 발명한 시기는 이안이 A등급 가이드까지 습격했을 때였다. 센터장으로서는 파장 추출기를 받은 후부터 더 이상 이안이 가이드를 습격하는 걸 눈감아 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완성한 시기가 딱 맞아떨어지니 애초에 거래도 A등급까지였을 것이라 추측됐다. 그리고 그때는 한결과 사월이 사이가 지지부진하긴 했지만 집안 어른들은 그 둘을 짝으로 점찍어 둔 시기였다. 센터장은 사월이 크리먼이란 걸 몰랐다가 나중에 이안을 통해 알게 돼서 버리는 선택을 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이런 사고가 없었더라도 센터장은 언젠가는 사월이 크리먼이란 사실을 터뜨렸을 것 같았다. 그동안 기다렸던 건 이안과 우호적인 관계여서 이안이 센터장에게 핵이 사라질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물증이 잡히긴 했지만 이안이 센터에 있을 때 만든 것이라 센터장과 연관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렇긴 하네요. 그리고 그 공을 온전히 에코 팀 팀장에게 넘겼으니 발 뺄 수도 있고요.”
물증이 잡혔고 아귀도 맞지만 이안은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을 다 설계해 놨다. 정말 주도면밀한 녀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거래를 알고 있는 누군가를 찾으면 될 일이었다. 센터장은 몸이 불편하니 이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를 도울 인물이라면 센터장 옆에 항상 붙어 다니는 비서와 총무부장 그리고 브라보 팀 캡틴과도 연관이 있을 수 있었다.
국현에게 정신을 읽게 해서 정보를 빼내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에스퍼다. 가이딩을 핑계로 파장에 노출시킬 수는 없었다.
뒤에서 구린 짓을 하는 것인지 항상 국현을 경계했고 직급이 높아서 접근하기 힘들었다. 대의를 이루는 데 한걸음 가까워졌다고 여겼건만 다시 한번 난항을 겪고 있었다.
“그럼 이건 어떱니까?”
국현은 한결과 함께 머리를 맞대다가 떠보듯이 물었다.
“구사월 가이드에게 이안을 잡게 하는 겁니다. 어차피 이안만 잡으면 다른 것들은 다 엮여 올 거고, 모든 게 다 밝혀진 시점에서는 구사월 가이드가 가장 절박할 테니까요.”
한결은 선뜻 좋은 방법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안은 이 반란에 가장 필요한 핵심 인물이고 사월에게 비정상적인 집착을 보여 왔다.
사월을 이용하는 게 이안을 잡는 가장 빠른 방법인 것은 자명했다. 그래서 한결 역시 이 방법을 떠올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사월이 크리먼이기도 하고 그녀를 움직이는 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이전에 국현과 논의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지금도 이안같은 범죄자와 맞닥뜨리는 건 그녀가 크리먼인 것이 밝혀졌대도 위험 부담이 있는 게 사실이었다.
“이번에도 감싸고 도실 겁니까?”
한결이 주저하는 기색을 알아챘는지 국현이 말을 덧붙였다. 이전에 한결은 국현에게 사월이 크리먼이 아니라고 보고했고 그가 거짓말한 것이 밝혀졌다.
그게 아니더라도 국현은 그동안 다 알면서 넘어갔을 수도 있었다. 한결이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이상하다고 여긴 위화감을 국현이 눈치채지 못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아닙니다. 제가 따로 전달해 보죠.”
국현의 말마따나 지금 상황에서 가장 절박한 사람은 사월일 것이다. 그녀는 하루아침에 S급 가이드에서 크리먼으로 지위가 곤두박질쳤고, 수용소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동시에 크리먼이라는 비밀을 감춰야 한다는 족쇄가 풀린 시점에서 그녀는 거리낄 게 없을 것이다.
“구사월 가이드는 이 제안을 무조건 수락할 겁니다.”
이 반란에는 센터장을 몰아내는 것뿐 아니라 크리먼을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려면 크리먼이 이 반란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공헌도가 중요했다.
그녀가 맡은 역을 잘 수행한다면 크리먼뿐 아니라 본인의 지위를 다시 끌어 올릴 중요한 발판이 될 것이다. 이건 한결도 유건도 아닌 사월 본인이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
드르르륵.
쇠창살에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아침잠을 깨웠다.
“예쁜아. 일어나.”
밖에서만 열 수 있는 눈만 보일 정도의 틈으로 교도관은 하루에 세 번, 내 동태를 살폈다.
“안 일어나?”
좀처럼 잠기운이 달아나지 않아 꾸물거리고 있는데 드르륵거리는 소리가 또 한 번 들렸다. 눈을 홱 째며 노려보자 교도관이 징그럽게 눈을 휘었다.
“오늘도 예쁘네. 간밤에 오빠 꿈은 꿨고?”
‘미친 새끼….’
다른 수감자들한테도 이쯤 되면 일어나라고 하긴 하지만 나를 담당한 교도관은 내가 잠기운이 완전히 달아날 때까지 나를 괴롭혔다. 크리먼인 게 밝혀지니 별 시답잖은 날파리가 꼬이는 기분이었다.
‘시간관념이 흐려지긴 했어도 거의 일주일가량 흐른 것 같은데….’
처음에는 유건이 한 말이 있으니 기다렸다. 그가 무슨 해결책이 있는 것처럼 말했으니까.
하지만 밖에서 아무런 지시도 들려오지 않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뭔가 일이 잘못됐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저 교도관에게 전해 듣길 무슨 파장 추출기로 내 파장을 뽑아낸다던데. 핵이 없어서 죽지 않으니 파장이 나오는 도구 정도로 사용할 생각인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현장에 있을 때 방사 가이딩이라도 해서 기절시키고 도망갈걸….’
지금은 손목에 채워진 파장 제어 장치 때문에 파장도 방출하지 못했다.
“재미없네. 필요한 거 있으면 불러. 예쁜이 부탁이면 뭐든 들어줄게.”
교도관은 내가 계속 무시하자 제풀에 지쳐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정말 내키진 않지만 저 덜떨어진 녀석을 이용해서라도 나갈 계획을 세워야 할 것 같았다.
“저기요.”
“왜?”
간다던 녀석이 부르자마자 바로 틈으로 눈을 비췄다.
“저 커피 마시고 싶은데… 그것도 줄 수 있어요?”
갑자기 문을 열어 달라고 하면 열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일단 사소한 부탁을 했다.
“당연히 줄 수 있지. 근데….”
녀석의 눈빛이 한결 더 느물느물해졌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어떻게 이렇게 조금도 예상과 틀려먹지 않는지. 지루할 지경이었다.
“뭘 원하는데요?”
“글쎄. 뭘까?”
그의 눈이 내 몸을 음험하게 훑었다.
“옷이라도 벗어보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