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화 (114/131)

“그리고 브라보 팀 에스퍼들이 현장에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구사월 가이드가 크리먼인 걸 알고 가장 먼저 사살하려고 했던 것도 브라보 팀 에스퍼이고요. 현재는 백유건 에스퍼 때문에 다쳐서 의무실에 있다고 합니다. 선두에 서서 크리먼을 제압했다는 공로는 크게 치하해야 마땅합니다.”

총무부장이 이끄는 팀은 브라보 팀이었다. 알파 팀 다음으로는 델타 팀의 입지가 크지만, 델타 팀은 본래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해서 팀플레이가 불가능했다.

A지부의 가장 중요한 업무가 게이트 파훼인 만큼, 최근 능력이 출중한 신입 에스퍼를 많이 영입한 브라보 팀이 이번 기회에 알파 팀 자리를 넘보려는 수작이었다.

“그래. 브라보 팀이 이번 사고에 큰일을 했군. 그럼 백유건 에스퍼는 어떻게 하기로 했나?”

센터장은 누가 이 사고에 주역이었는지 관심 없었다. 그는 오로지 자기 핏줄인 백유건 에스퍼. 장래가 촉망되는 백씨 가문 S급 에스퍼의 징계가 궁금해서 온 것이다.

“저 그게… 아무래도 크리먼을 도왔고 각성자들을 위협한 만큼 힘들 것 같습니다.”

“힘들다?”

“예. 군법에 의거해 처벌해야겠지요.”

군법에 의거해 처벌한다면 유건은 사월과 같이 사살령에 내려진다. 유건은 사월이 크리먼이란 사실을 함구한 것도 모자라, 각성자들을 위협했다.

“백유건 에스퍼는 구사월 가이드 외에 매칭률이 50%가 넘는 가이드가 없는 특이 케이스라고 알고 있네.”

센터장은 여유롭지만 무게를 담아서 얘기했다.

“여기 있는 에스퍼라면 이 사실이 어떤 의미인지 충분히 알 수 있겠지.”

사월이 없다면 생존이 힘들 거라는 말이었다. 실제로 사월과 페어를 취소했을 당시 유건은 20명 이상의 가이드와 가이딩 하는, 센터에서 이례적인 일이 발생했다.

그렇게 가이딩 하고도 파장률이 오르지 않아 애를 먹었었다.

“자신이 이 가이드가 없으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뻔히 보고만 있을 에스퍼가 몇이나 있겠는가.”

“하지만 센터장님…. 행동이 과했습니다. 그리고 구사월 가이드는 처분을 피할 수 없어 이제 가이딩 하기 힘들 테니 어차피 살아남기 힘들 겁니다.”

유건이 살아남기 힘들 거라는 말을 들은 센터장의 눈이 날 서게 올라갔다. 총무부장은 말실수했다고 여겼는지, 눈을 내리깔며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작년에 A지부 에코 팀에서 개발한 유용한 기술이 있지.”

센터장이 에코 팀 팀장을 눈짓했다. 자신이 말하는 걸 얘기해 보라는 눈치였다.

“혹시… 파장 추출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파장 추출기는 말 그대로 파장을 억지로 추출하는 기계였다. 처음 일반인이 가이드로 발현했을 때, 가이딩을 제어하지 못해 줄줄 흘리고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파장을 방출하는 방법을 몰라 몸 안에 쌓이는 경우가 있었다.

그 기계는 후자일 때 사용하라고 만든 기계였다.

“어차피 구사월 가이드는 핵이 없는 크리먼이라고 들었으니 죽이지도 못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센터를 위해 이바지하는 게 낫겠지.”

얼음물을 끼얹은 듯 장내에 적막이 감돌았다. 센터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백유건 에스퍼와 89% 매칭률의 S급 가이드라면, 한번 뽑을 때마다 10년은 살아남을 수 있는 양을 뽑아낼 수 있을걸세. 아니, 한 지부의 에스퍼 파장을 관리하고도 남을 양이 나오겠지. 에코 팀은 구사월 가이드가 핵이 없는 특이 케이스니 이 현상을 충분히 살펴봐 주길 바라네.”

대놓고 인체 실험까지 감행하라는 말이었다.

“윤리적 문제가 발생할 겁니다. 그리고 가이드에게 그런 식으로 사용하면 가이드들에게 큰 반감을 살 겁니다.”

아무도 함부로 말을 얹지 못하고 있는데 지부장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반문했다.

“윤리는 무슨. 괴물 새끼한테 무슨 윤리를 따지는가.”

센터장은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센터에서 크리먼은 크리처로 간주한다. A지부에서 오랫동안 복무한 S급 가이드라도 그 사실은 변함없었다.

“이 결정에 반기를 드는 사람은 오늘부로 크리먼을 옹호하려는 것으로 알겠네.”

그 말에 사람들은 눈만 굴리며 아무런 말도 못 했다.

“그럼 난 그렇게 알고 이만 가지.”

센터장은 자신이 할 말을 모두 마쳤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센터장이 나가고 난 후에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역시 센터장님이네요. 크리먼한테는 가차 없으세요.”

“그래도 오랫동안 복무한 S급 가이드한테 저런 처사는 좀…. 구사월 가이드가 큰 게이트 출연 때마다 센터를 몇 번을 구했는데요.”

“그러든 말든 이제 크리먼이면 역적이지. 자기 손자들 엮으려고 안달복달할 때는 언제고 이렇게 손절하는 거 소름 끼치네.”

“저는 제 자식들이 가이드 되면 어떻게든 퇴직시킬 겁니다. 가이드 인권이 이렇게 바닥이어서야….”

그들은 입 모아 지독하다며 혀를 내둘렀다. 이번 일은 사월이 크리먼이기 때문에 더 잔인한 처사였지만 그게 아니어도 센터장은 가이드를 에스퍼의 파장을 충전시켜주는 도구로밖에 보지 않았다.

구시대적 마인드였다. 요즘에는 에스퍼보다 소수인 가이드들이 제 권리를 찾아가는 시대였다. 그러나 센터장은 여전히 가이드를 에스퍼를 위한 존재쯤으로 여겼다.

“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래.”

잠잠히 자리를 지키던 한결이 일어났다. 옆자리에 있던 지부장 지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상은 이 상황이 난감하고 착잡했다. 그 사고가 일어나기 전, 사월과 깊은 대화를 나눴었다.

사월이 마지막에 말한 ‘아직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사정’이란 ‘본인이 크리먼인 것’일 터였다.

그리고 한결과 관계가 발전하지 못한 것 또한 한결의 친모가 크리먼이었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을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았다.

센터장이 사월에게 내린 처사가 과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크리먼인 사월을 편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결과 유건은 사월과 가까운 사이였다. 한결이 센터장의 말에 끼어들지는 않았지만, 지부장은 그의 아들이 얼마나 지금 상황을 못마땅해하고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

위협을 넘어 살기를 담은 파장이 풍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별다른 말 없이 자리를 뜬 것이 이상했다.

‘이 자리에서는 이야기가 나오진 않았지만, 유건과 대치 중에 무언가 대화를 나눴다고 하던데….’

한결은 친모가 세상을 떠난 뒤 센터장과 지부장을 원망하고 미워할 법도 했는데 한 번도 그들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그 모습이 마치 조용히 살기를 죽이고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느껴졌다.

사냥의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첫 균열은 이전에 본가에서 사월에 대한 폭탄 발언을 했을 때였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서까지 가문으로부터 사월을 지키려 했다. 이번엔 어떤 방법을 쓰려는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제 아들이 이렇게 물러날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다.

한결은 이제 힘을 키울 대로 키웠고 어떻게든 제 사람은 지킬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부장 또한 그가 더 이상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도록 이번에는 한결의 편을 들어 주고 싶었다.

***

한결은 회의실을 나와 곧바로 지하 수용소를 찾았다.

‘여기가 사월이가 있는 곳인가….’

방 안에 방이 있는 구조라서 앞을 지나가도 사월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예쁜아. 뭐해?”

그때 교도관 하나가 방에 들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오빠가 말했던 거 생각해 봤어?”

딱 봐도 치근대는 말이었다. 그 말에 사월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붙여도 뭐 저런 걸….’

한결이 유건에게 말한 센터를 나가게 해 준다는 말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국현이 그들을 풀어 줄 것이다.

국현의 세뇌는 3일이면 가능했고, 저 교도관은 현재 국현에게 면담을 핑계로 일정한 파장에 노출돼 세뇌 중이었다.

매일 저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치근대니 몰래 밤에 문을 열었다가 놓쳤다고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국현도 의심받을 일 없고 사월을 놓친 책임은 저 교도관이 모조리 뒤집어쓰게 될 것이다.

“피해자 나오면 수습 힘들어. 여기서 멈춰.”

“그래서 구사월한테 총 쏘는데 보고만 있었어?”

사고 수습 중에 나눴던 유건과의 대화가 뇌리에 깊게 박혀 계속해서 맴돌았다. 유건이 오해한 것도 아니었고 피치 못할 사정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A지부의 각성자들이 사월을 둘러싸고 서늘한 총구를 겨냥했을 때, 한결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 투명한 눈동자가 도와 달라는 듯 한결만을 응시하는데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너무 많은 생각들이 범람해 되려 행동이 완전히 멈춰 버렸다.

결국 그 자리에서 사월을 구한 건 유건이었고 한결은 또다시 기회를 놓친 기분이었다. 어쩌면 마지막이었을지도 모를 기회를.

돌이켜 보면 유건이 사월의 비밀을 알기 전, 한결에게는 수많은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한결은 그때마다 주저했고 갈등했다.

백씨 가문 사람들이 제 어머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사월을 괴롭힐 것 같아서, 사월은 아직 어리고 앞날이 창창한데 그가 기회를 가로막는 것 같아서, 결국 돌아가신 어머니와 같은 길을 걷게 될까 봐.

과거의 기억 때문에 한결은 보기보다 비틀려 있었고 늘 안으로 화를 삼키며 살아왔다. 백씨 가문을 향한 분노가 언젠가는 터질 것이다. 그때 사월이 옆에 있으면 그 불똥이 그녀에게 튈까 봐 두려웠다.

사월이 방출 게이트 사고의 후유증으로 자신뿐 아니라 사람 자체에게 거리를 두고 나서는 거의 체념하는 단계였다. 제가 사월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을까. 오히려 자신이 그녀에게 안 좋은 영향은 끼치게 되진 않을까. 그렇게 사월의 상황을 핑계로 현실에 안주하려 했다.

그때 유건이 나타났고 그제야 한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애매한 관계에 만족한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녀 옆에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가 서 있는 게 불쾌하고 보기 싫었다. 어떻게든 다시 되찾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자신이 손을 뻗으면 닿을 위치에 있지 않았다. 한발 물러서 그를 경계하는 눈길을 보냈다.

어딘지 불안하고 불편해 보였다. 한결은 그때 기다려야 할 게 아니라 나서서 물어봤어야 했다.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자신에게는 뭐든 말해도 괜찮다고 신뢰를 주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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