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화 (113/131)

“어서 말 안 해?”

“크, 크리먼 발견 즉시 사살해야 한다는 조항입니다. 크리먼을 도와주는 행동 적발 시 공범으로 간주해 크리먼과 함께 즉결 처분당합니다.”

정말 말하지 않는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기세에 각성자가 얼굴이 백지장이 된 상태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나도 즉결 처분해야겠네. 나는 너희가 사살하려는 저 가이드를 어떻게든 지킬 테니까. 나도 공범이잖아.”

“백유건 에스퍼….”

“근데 너희가 나를 처분할 수 있어?”

그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걸렸다. 동시에 쩌적, 하고 주변의 가로수가 갈라지고 바닥이 흔들렸다.

“이, 이게 뭐야!”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떨리자 사람들이 우왕좌왕했다. 광장에서 사람들이 쉬는 벤치가 허공에 둥실 떠올랐고, 바닥의 대리석, 건물의 파편 따위가 과자 부서지듯 어이없이 쪼개졌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몰라! 이게 무슨…!”

“꺄악! 사람 살려!”

식물, 건물, 인간 가리지 않고 중력을 거부한 알 수 없는 인력이 그들을 끌어당겼다. 사람들은 생전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혼비백산이었다.

“처분한다며. 공격해. 나를 죽여야 너희가 말하는 크리먼을 죽일 것 아니야.”

“사, 살려 주세요! 백유건 에스퍼!”

“태세 전환 참 빠르네. 날 죽인다더니 이제는 살려 달라고 하고. 가이드일 때는 손을 건네다가 크리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총을 겨누고.”

그들이 대화하는 사이 각성자의 몸이 아주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거꾸로 매달아서 얼굴에 피가 몰려 새빨개졌으며, 이윽고 일반인이라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높은 위치까지 다다랐다.

“제, 제발…!”

“근데 미안해서 어쩌지. 나는 한번 결정하면 좀처럼 마음이 안 바뀌어서.”

절박한 매달림에 유건이 냉담하게 대꾸하며 그대로 각성자를 떨어뜨렸다.

“아악!”

각성자가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중심을 잡으며 착지하려는 것 같은데 염력으로 제어해서인지 계속 머리가 바닥을 향한 채 추락하고 있었다.

탁.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중간에 한결이 낚아채 각성자는 무사할 수 있었다.

“백유건. 그만해.”

“형도 나랑 싸우려고?”

두 사람의 눈빛이 거세게 맞부딪쳤다. 유건은 한결이라고 봐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결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피해자 나오면 수습 힘들어. 여기서 멈춰.”

“그래서 구사월한테 총 쏘는데 보고만 있었어?”

유건은 염력으로 띄우고 있던 벤치 하나를 한결에게 날렸다. 한결이 팔을 뻗어 내려치자 벤치가 이쑤시개 부러지듯 단번에 두 동강 났다.

“정신 안 차려?”

“내가 지금 정신 차리게 생겼냐고!”

그다음부터는 난투극이었다. 한결은 유건이 날리는 물체를 최대한 부수고 피하며 거리를 좁혔다. 근접하면 자신이 불리한 걸 알기에 유건이 허공에 부유해 염력을 사용했다.

한결은 유건이 떠올린 물체들을 디딤돌 삼아 높게 점프했다. 유건이 어쩔 수 없이 사람들과 다른 물체들도 바닥에 다시 내려놓고, 공격할 사물만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투가 길어지다 보니 광장은 쑥대밭이 되었고, 더 이상 시야에 커다란 물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됐다.

내가 보기엔 사실 한결이 마음만 먹으면 유건을 떨어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육체계이긴 하나 풍파를 일으켜 원거리 공격도 가능했다.

그러나 풍파는 어떤 단단한 물건이든 조금만 닿아도 썰려 나가는 능력이었고, 한번 방향을 잡으면 컨트롤할 수 없었다.

혹여 유건이 피하지 못해 다칠까 봐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 그만해. 더 이상 던질 것도 없잖아.”

둘 다 헉헉 소리를 내며 숨을 몰아쉬었다. 염력은 파장을 많이 소모하고 한결은 몸을 너무 많이 움직였다.

유건이 주위를 한번 둘러봤다. 그들의 싸움을 멀찌감치 떨어져 관망하는 각성자들을 흝고 아직도 광장 한가운데 앉아 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눈빛이 짙게 얽히는가 싶더니 내 몸이 점점 공중에 떠올랐다.

“둘이 도망이라도 가려고?”

한결의 말과 동시에 두두두, 하고 커다란 굉음이 들렸다. 하늘에 순식간에 헬리콥터가 깔렸다. 폭격이 가능한 군용 헬리콥터였다.

그들이 싸우는 동안 센터도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진 않은 것이다. 유건이 염력을 사용하니 헬리콥터도 움직일 수 있을 테지만, 그렇게 되면 분명 큰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헬리콥터에는 분명 사람이 타고 있을 테고, 자칫 잘못하다가는 인명 피해가 생길 테니까.

“백유건. 내 말 잘 들어.”

한결이 유건의 주의를 집중시키더니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아 입만 뻥긋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유건은 마치 한결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표정을 굳혔다가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다가 한결처럼 입 모양으로 말했다.

나는 그들이 하는 행각을 보고 뒤늦게 깨달았다. 아마 둘 다 S급 에스퍼이니 다른 각성자들보다 청력이 좋을 것이다.

두 사람은 자신들만 들리는 데시벨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크리먼화를 개방했을 때 A급일 테니, 내게 들리지 않는 걸 보면 여기서 누구도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없을 터였다.

“항복.”

그러다 돌연 유건이 두 손을 얼굴 양옆으로 올리며 바닥으로 내려왔다.

“뭐 하는 거야?”

“뭐 해. 구사월 너도 항복해야지.”

“미쳤어? 나는…!”

“무사히 센터 나갈 수 있어. 일단 내 말대로 해.”

내가 자리를 박차고 무슨 짓이라도 하려고 하자, 유건이 급하게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곧바로 한결을 응시했다. 한결은 잠잠한 시선으로 우리를 쳐다볼 뿐이었다.

이렇게 얘기하는 걸 보니 한결과 어떤 거래를 한 것 같은데….

“하…. 못 나가기만 해 봐. 너 평생 저주할 거야.”

“나 못 믿어?”

“내가 이런 상황 닥치면 나 버리랬잖아.”

“이런 상황 안 만들겠다는 조건이었잖아.”

“내가 이렇게 만든 거냐고.”

“그러게 왜 나 없이 움직였어.”

그것이 유건과의 마지막 대화였다. 우리는 차례로 지하 수용소로 이동했다. 당연히 그가 있는 곳은 알지 못했고, 어두컴컴한 일인실에 가둬졌다.

창문조차 없는 공간은 적막하고 황량했다.

***

A지부는 각 팀의 팀장들과 부장, 임원진까지 모아 긴급 대책 회의에 들어갔다. 사망한 사람은 없었지만, 17명의 각성자가 다쳤다.

게다가 건물 외벽이 손상되고 조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A지부 광장이 쑥대밭이 됐다. 지한이 수호 나무 쪽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오래된 고목이 뚝, 하고 부러져 버렸다.

사람이 다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몇백 년 된 수호 나무가 쓰러진 건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충격을 가져왔다.

“한결 캡틴. 두 사람 다 알파 팀에서 오래 근무했고, 사적으로도 친밀한 관계라고 들었는데 정말 구사월 가이드가 크리먼인 걸 몰랐습니까?”

“몰랐습니다.”

센터는 이전에 유건과 사월이 페어를 취소하려고 벌인 일로 이미 한 차례 한결에게 책임을 물었었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 S급이라는 사실 때문에 어물쩍 넘어갔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센터에서 가장 예민해하는 ‘크리먼’에 대한 일이다.

아무리 S급이라도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구사월 가이드는 핵이 없는 특이 케이스라고 하나, 강지한 에스퍼는 아니었습니다. 강지한 에스퍼가 정신계 C등급이어서 한결 캡틴은 세뇌도 당하지 않았을 텐데 정말 몰랐다고요?”

“예.”

“백유건 에스퍼는 그들이 크리먼이란 걸 알고 있던 것 같은데 가족끼리 정보를 나누진 않았나요?”

“총무부장님이 크리먼이라면 친밀한 사이라고 그 사실을 공유할 것 같습니까? 그것도 직속 상사한테요. 이 의미 없는 질문 계속 받아야 합니까?”

“이게 어떻게 의미 없는 질문입니까? 한결 캡틴, 대답을 회피하시는 건가요?”

한결은 계속되는 같은 질문에 염증이 났다. 총무부장은 돌림 노래처럼 했던 질문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는 언뜻 알파 팀에게 책임을 물으려는 것 같지만, 그들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사월이 크리먼이란 사실이 명백한 가운데, 유건이 나타나 각성자들을 막아섰다. 게다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염력을 써서 각성자들을 위협했다.

그들이 원하는 대답은 유건이 크리먼과 공범이라는 것, 그리고 알파 팀의 캡틴인 한결까지 한패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알파 팀 전체를 끌어내릴 수 있을 테니까.

“그만 하세요. 알파 팀 캡틴까지 공범으로 간주하는 건 상상력이 과합니다. 한결 캡틴은 도주하려던 백유건 에스퍼와 구사월 가이드를 막았고, 각성자들을 위협하는 백유건 에스퍼를 제압했습니다. 한결 캡틴한테 책임을 묻는 건 옳지 않습니다.”

공격적으로 질문하는 총무부장의 말을 지부장이 막았다.

“제가 괜히 심문하는 게 아닙니다. 이전에 낯 뜨거운 스캔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한결 캡틴이 몰랐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유건과 사월이 페어를 취소한 이유가 한결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 후에 아쿠아리움에서 사진이 찍히기도 했다.

백씨 가문에서 사월을 한결의 신붓감으로 찍었다는 소문은 여기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다시 유건과 관계가 호전돼 소문이 무마되었지만 한결 또한 사월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건 자명했다.

“센터장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대회의실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눈치를 보고 있는데 센터장이 도착했다. 센터장은 최근 건강이 악화돼 잠시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안이 결코 가볍지 않은 사안인 만큼,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병원에서 발걸음했다.

“다들 앉게. 오랜만에 이렇게 바쁜 얼굴들을 보는군.”

센터장이 들어오자 장내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기립해 고개를 숙였다. 센터장은 사람 좋은 인상을 하며 친근하게 웃었다.

“센터장님. 소식 듣고 괜찮으셨는지요. 이런 일로 부르고 싶지 않았는데…. 상황이 이렇게 돼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곧바로 총무부장이 굽신거리며 말을 얹었다.

“그래, 그래. 그래서 이야기는 어디까지 진행됐는가?”

“한결 캡틴 또한 알파 팀에서 벌어진 사건이 근래 적지 않은 만큼, 그에 따른 책임은 불가피해 보입니다.”

센터장의 질문에 총무부장은 한결을 공범으로까지 몰고 가려던 의견은 싹 무르고, 팀원 관리 능력 부족을 들먹여 어떻게든 한결에게도 피해를 주겠다는 정도만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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