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11/131)

“구사월 가이드.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세요.”

“사실 퇴직하기 전에 한번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우리 애들이 너무 유난을 떨길래 못 불렀습니다.”

그럴 만했다. 한결이 가족들이 있는 자리에서 폭탄선언을 했다고 들었으니.

“5년 전 사고로 인한 정신적 트라우마가 심해졌다고 들었는데, 그 부분 무척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 애들’ 얘기를 하길래 바짝 긴장됐었는데, 그 이후에는 내 건강과 관련된 이야기만 나눴다.

그동안 센터에 불만스러운 점은 없었는지, 건강이 나으면 센터로 다시 돌아올 생각이 있는지, 유건의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지부장으로서의 질문만 해 왔다.

“그럼 도움이 필요하다면 A지부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니, 언제든 요청해 주세요. 꼭 다시 볼 날이 있길 바랍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는 정말로 의례적인 인사만 하려는 생각이었는지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했다. 나도 이대로 센터를 나가면 그와 이렇게 대화할 일이 없을 것 같아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이전에 캡틴이 저와 관련된 일로 가족들에게 심려를 끼쳤다고 들었습니다.”

“그거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구사월 가이드의 의사가 반영된 게 아니었고, 녀석이 앞서간 것이었으니까요.”

“아니요. 제가 캡틴을 헷갈리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한결이 앞서간 건 맞지만, 그 당시 나는 누가 봐도 한결에게 호감이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좋아하면 안 된다고 체념한 마음이었지만, 유독 한결과 가이딩 하기를 바라기도 했고 내심 그가 나를 특별대우 하는 게 좋았으니까.

“아시다시피 캡틴과는 오랜 기간 알아 온 사이고, 저 또한 과거에 한결 캡틴을 좋아했었습니다. 캡틴도 저를 좋아했다고 나중에 들었는데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이유가 백씨 가문의 가풍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

백씨 가문에 대한 이야기가 내 입에서 나오자, 지부장의 표정을 눈에 띄게 굳었다.

“지부장님. 선 넘는 발언일지는 모르겠지만, 캡틴의 마음 상처가 깊습니다. 부디 헤아려 주세요. 백유건과 제가 떠나면 곁에 마음 터놓고 지낼 사람이 없습니다. 저희가 떠나고 남아 있을 캡틴이 걱정됩니다.”

만약 우리가 떠나고 그의 곁을 메꿀 사람이 있어야 한다면 그건 당연히 가족이어야 했다. 규현이 한결을 동경하는 마음이 커도 한결과 규현은 사회에서 만난 사이여서 그런지 내가 보기엔 뚜렷한 벽이 느껴졌다.

“그래서 웬만하면 나도 사월 양과 잘되길 바랐습니다. 녀석이 사월 양 앞에서는 꼭 제 엄마한테 하던 것처럼 따뜻하게 웃었거든요….”

지상은 순식간에 A지부 지부장에서 한결의 아버지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한결이는 제게 아픈 손가락입니다. 정략결혼을 해서 낳은 아이에게 애정이 없어 그 당시 아비 노릇을 제대로 못 했습니다. 재혼하고 나서는 관계가 불편해 한결이를 유건이에게 맡겼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다음에는 사월 양에게 맡기려 했었나 보네요. 내 아들이니 내가 챙겨야 하는 게 맞는데….”

그는 그동안의 잘못을 인정하듯 회한에 잠긴 표정이었다. 한결이 기댈 곳이 없으리란 건 짐작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로 통해 들으니 더욱 안쓰럽게 느껴졌다.

“조언 고맙습니다. 한결이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많이 늦은 것 같지만 아비로서 노력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부장님.”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예. 말씀하세요.”

내가 말을 얹지 않았다면 자리를 정리하려던 지부장이 돌연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유건이와는 가능성이 없는 건가요?”

“…….”

“불편하면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아비로서 유건이가 사월 양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지부장이 염려하는 부분을 알았다. 어떤 부모가 에스퍼인 아들이 가이드를 따라 센터를 나가서 같이 살겠다는데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나.

“…저도 백유건 에스퍼 좋아합니다.”

“오. 그렇군요.”

어차피 인간이 될 날이 머지않았고 유건의 부모님은 안심시켜야 할 것 같아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부장은 단조롭게 반응했지만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근데 백유건 에스퍼에게는 제가 한 말 비밀로 해 주십시오. 제가 다른 사정이 있어서 아직 말할 입장이 못 됩니다.”

“예.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비밀 꼭 지키겠습니다.”

지부장은 점잖은 체하려 하지만 삐죽삐죽 올라가는 입꼬리가 보였다. 표정을 못 숨기는 게 유건이 떠올라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본관 밖을 나오자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지부장실로 올라갈 때는 뭔가 불안했는데 막상 대화를 마치니 후련한 마음이었다.

“사월아, 잠깐.”

곧바로 다시 알파 팀 사무실이 있는 건물로 이동하려는데 익숙한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뭐예요?”

오전 반차를 냈던 지한이었다. 그는 원래도 아침잠이 많아 오전 반차를 내는 일이 빈번했다.

그래서 다른 팀원들은 그가 늦어도 그러려니 했다. 지한은 잠시 한적한 곳으로 나를 이끌더니 주머니에서 투명한 플라스크를 건넸다.

“이건….”

“성공했어. 항생제 복제.”

노란 형광빛의 액체였다. 분명 눈으로 보기에는 이안이 준 항생제의 색과 비슷해 보였다.

“정말요…?”

나는 좀처럼 믿기지 않아 눈만 휘둥그레 뜬 채 물었다. 내가 얼떨떨한 반응을 보이자, 지한은 굳어 있는 내 손에 직접 플라스크를 쥐여 줬다.

“그래. 어제 세뇌한 크리먼한테 실험도 했고 인간이 된 거 확인했어. 나도 오늘 아침에 마셨고 보다시피 핵도 사라졌고 말이야.”

지한과 내가 있는 곳은 센터 뒤쪽에 있는 소각장이었다. 주위에 사람이 없는지 살피고 조심스레 크리처화를 개방해서 지한의 몸을 주시했다. 명치 쪽에 검지만 하던 지한의 핵이 정말로 보이지 않았다.

정말 사람이 된 것이다.

“갈증도 안 느껴져요?”

“어. 그러니까 너도 한번 먹어 봐.”

나는 손에 쥔 플라스크를 좀 더 유심히 쳐다봤다. 세뇌한 크리먼에게도 실험했고, 지한도 핵이 없어진 게 맞았으니 복제에 성공한 게 확실할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직접 복제 과정에 참여한 것이 아니어서 그런지 찜찜하게 느껴졌다.

“저는 다음에 먹을게요. 이거 만약 잃어버려도 다시 만들 수 있는 거죠?”

“그럼. 혹시 내가 거짓말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건 아니고… 제가 한 번 더 확인하고 마시고 싶을 뿐이에요.”

“그래. 내가 한 짓이 있으니까 아무런 거리낌 없이 믿을 수는 없겠지.”

아니라고 말했지만, 지한에게는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는 조금 섭섭해하는 눈치였다.

나는 주머니에 다시 플라스크를 넣고 지한과 소각장에서 벗어났다. 곧 점심시간이어서 그런지 광장에는 사람이 많았다.

광장 한가운데 있는 수호 나무 아래를 지나자, 나뭇잎 사이로 흘러내린 빛줄기가 아름답게 땅을 수놓았다.

오늘은 센터를 나가는 날이고 마침 항생제도 완성됐다. 뭔가 퇴직 선물같이 느껴져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

“나가면 뭐 할 거야?”

“글쎄요.”

“나는 동네에서 정신과 차리려고. 센터는 역시 나랑 안 맞아. 나는 일반인들이랑 섞여서 사는 게 좋아.”

“선배, 그런 거에 관심 없었잖아요.”

“항생제 주고 나니까 다시 선배라고 불러 주네?”

나는 습관적으로 선배라고 불러 놓고 아차 싶었다. 지한도 과거에 크리먼이었던 만큼 센터가 불편할 테니 나가려는 것 같았다.

“그냥 한번 고난을 겪고 나니까 이대로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싶지 않아졌어. 내가 생각보다 삶에 미련이 많더라고. 센터에서는 대부분 정신계를 범죄자들의 비밀을 파헤치는 데 사용하잖아. 내 성향이랑도 안 맞고 능력을 쓴다면 누구를 구하는 쪽이 좋아.”

그런 사람이 그간 가이드를 습격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크리먼으로 만들었을까. 어쩌면 그런 짓을 해서 죄책감으로 비롯된 소망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미 숨을 거둬 버린 사람에게는 용서를 구할 수도, 사과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너랑 유건이 나가면 알파 팀 휑하겠네.”

“알파 팀 사람이 몇인데…. 아직 당신 용서한 거 아니에요. 저도 약점이 잡혀서 눈감아 주는 거지.”

“알아. 너한테는 항상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보지 말자.”

“누가 할 소린데요?”

그는 이전의 모습으로 조금 돌아온 것 같았다. 원래는 이렇게 허허실실 농담 따먹는 걸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그와 내 관계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된다면 굉장히 긍정적인 모양새였다. 나는 그를 어차피 영원히 용서할 수 없을 것이고, 그는 영원히 죄책감을 끌어안고 살 것이다. 그리고 이대로 다시는 보지 않는 것. 나도 그 정도면 만족했다.

이대로 사무실로 올라가면 유건이 내 짐을 정리해 놨을 테고, 오후 반차를 써 놨으니 사람들이 점심을 먹는 사이 나갈 생각이었다.

퇴근 시간에 나가면 꼴사납게 우르르 몰려나올 게 뻔했고, 그게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럼 가는 길에 에밀리 친구에게 항생제가 복제된 게 맞는지 건네 주고 이사한 집으로 가면 되려나….

오늘 유건과 새집에 처음 입주하는 날이어서 그런지 설레는 마음도 있었다. 유건은 며칠 전부터 신난 게 보였고, 나는 애써 숨겼었는데 오늘은 나도 모르게 계속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러다간 어차피 인간이 될 거니까 가는 길에 그에게 불쑥 사실 나도 너를 좋아한다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원래 이렇게 들뜨지 않았었는데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발걸음이 너무 가벼웠다.

“그럼 이안에게는 뭐라고 할 생각이에요?”

항생제를 복제했으니 더 이상 이안에게 피를 주지 않아도 됐다. 그는 이제 핵이 사라지기 직전인데 중단한다면 분개할 거고,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다행히 이안과 계약서를 쓰지도 않아서 거래를 취소해도 짊어져야 할 리스크가 없었다.

“지한 선배. 이안한테 뭐라고 할 거냐고요.”

“…….”

지한이 답이 없어서 다시 한번 물으며 고개를 돌렸는데 뭔가 이상했다. 지한이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선배…. 왜 그래요?”

그의 떨림은 점점 심해졌다.

“뭐야? 저 에스퍼 어디 아픈 거 아니야?”

“무슨 일이지?”

주변을 걷던 사람들도 한 번씩 쳐다볼 만큼 지한의 몸은 갑자기 발작이라도 하는 것처럼 툭툭 비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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