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110/131)

“그렇다고 시간 질질 끌자는 얘기는 아니야. 무리 안 가는 선에서 피를 주겠다는 거지. 너도 최대한 빨리 핵이 사라졌으면 하잖아.”

“뭐, 그렇죠.”

이안이 싱겁게 답하더니 다시 팔에 이를 박았다. 이전과 확연하게 줄어든 세기 때문인지 약간 뻐근하다는 느낌 정도라 버틸 만했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유건의 피를 마시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말했었다. 유건이 안 마시는 것보다는 마시는 게 낫지 않겠냐는 말에 다시 입을 우물거리고 있었지만.

“이 진행 속도라면 천천히 해도 두 달 안에는 사라질 겁니다.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이안에게 피를 준 지 2주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헛된 짓은 아니었는지 이안의 핵은 이전보다 눈에 띄게 작아져 있었다.

그의 핵이 작아질수록 내가 인간이 될 날은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나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마 오랫동안 항생제에 대한 희망을 많이 내려놓은 상태였기 때문일 것이다.

센터에는 계획대로 에밀리 친구의 도움을 받아 정신적인 문제로 질병 퇴직 신청서를 상신했다. 한결과 의례적인 면담을 하면서 정해 놓은 거짓말을 늘어놨다.

그는 별다른 의심 없이 노트북에 사유를 타이핑했다. ‘그동안 수고했다’는 단조로운 말과 함께 면담은 끝났다. 내일이면 센터장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갈 것이다.

이안과 거래하기로 한 후부터는 순조롭다면 순조로운 흐름이었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계획대로 흘러간 적이 얼마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래서인지 조금 찝찝하게 느껴졌다.

사실 이안과 거래가 틀어질 것을 염려해 차선으로 지한에게 항생제 복제를 맡긴 거였다. 조금 삐끗한 게 있다면 지한 쪽은 생각보다 시일이 더 걸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곧 완성이라던 처음과 말이 달라져 혹시 딴생각하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이 상태라면 머지않아 이안과의 거래가 완료돼 항생제를 받을 것 같아 그렇게 조바심이 나지는 않았다.

어차피 지한이 항생제를 복제해 인간이 되나, 이안과 거래를 완료하고 항생제를 받아서 인간이 되나, 나는 그들을 센터에 넘기지 못한다.

우리는 서로의 약점을 공유한 셈이니 평생 무덤까지 비밀을 안고 가야겠지. 그건 분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내일은 퇴근하고 F 지역 집 보고 올까?”

흡혈을 마친 후 숙소로 돌아와 괜찮은 집 후보를 대강 추렸다.

“굳이? 주말에 가면 되잖아.”

“어차피 모레 토요일이잖아. 집은 저녁에도 보고 낮에도 봐야 돼. 밤에 가서 보고 거기서 한숨 잔 다음 낮에 또 보는 거지.”

유건은 내가 센터를 나가는 일에 대부분 적극적이지만, 유독 집 고르기에 열성적이었다.

“그럼 그냥 토요일 낮에 보고 밤에 보면 되잖아.”

“그 집 하나만 볼 거야? F 지역 근방 다 봐야지. C 지역이랑 E 지역도.”

“당장 길바닥에 나앉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촉박하게 집을 봐.”

유건의 말도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이렇게 급하게 진행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만약 좋은 집을 찾지 못하더라도 숙소는 늦게 나가도 되니 당분간 이곳에 머무를 수도 있었다.

“빨리 너랑 내가 살 집이 정해졌으면 좋겠어. 마음 같아선 내일 당장 도장 찍고 오고 싶은데….”

유건이 왠지 자신감 없는 표정이었다. 듣다 보니 이렇게 서두르는 것이 단지 나와 같이 나가서 살고 싶어서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말 바꿀 것 같아?”

“그건 아니야. 그냥 내 마음이 불안한 거지.”

유건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나는 이런 유건의 불안감을 잠재워 줄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한결이 신경 쓰이는 건 사실이지만, 내가 선택한 건 너라고. 나는 너를 좋아한다고.

네 옆에 언제나 있을 거라는 말을 하면 언제 울적했냐는 것처럼 밝게 웃어 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내가 인간이 되고 난 후에 할 생각이었다. 당장 말해 주고 싶었지만 참는 중이었다.

인간이 될 날이 머지않았고, 이 잠깐도 못 참을 정도로 나는 감정적이지 않았다.

그가 소중한 만큼 모든 것이 확실해졌을 때, 고백하고 싶었다.

“그럼 집 보고 오는 김에 근처 가구점도 들렀다 올까?”

“그럼 좋지.”

“나 인간 되면 고양이도 키우고 싶었는데 입양도 알아보고 오자.”

“고양이? 그럼 나랑 안 놀아 주고 고양이랑만 노는 거 아니야?”

“어. 그럴 건데?”

“그럼 싫어.”

우리가 함께할 미래에 대해서 말하는 것만으로도 미세하게 표정이 밝아졌다. 지금은 이 정도로밖에 그를 안심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동안 크리먼이기 이전에 가이드이고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센터라고 여겼다. 내가 크리먼이란 이유로 하고 싶은 걸 그만두는 게 자존심 상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유건과 함께한다면 그런 가시밭길을 걷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가이드 일을 계속하고 싶지만, 이제 혼자가 아닌 만큼 비밀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여러 에스퍼의 가이드가 아니라 유건 한 사람만의 가이드라면… 그거 하나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어느덧 시간은 흘러 센터에서 복무하는 마지막 날이 됐다. E지부에 적당한 집을 찾았고, 계약도 마쳤다. 짐을 미리 보내 놔서 몸만 가면 되는 상황이었다.

알파 팀 팀원들과는 며칠 전부터 작별 인사를 나눴고, 오늘은 다른 팀 팀원들이 찾아왔다. 나는 원래도 교류하던 각성자들이 별로 없었기에 대부분 유건을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

“와,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구사월 가이드 퇴직하는 것까지 따라가? 진짜 미친놈. 둘이 살림 차리는 거야?”

“헛소리할 거면 가라. 바쁘다.”

“바쁘긴 뭐가 바빠. 그래서 어디로 가는데? 놀러 가면 재워 주냐?”

“혼자 사는 것도 아닌데 너를 어떻게 재워 줘.”

유건과 대화하고 있는 사람의 목에 걸린 각성자 카드를 보니 ‘브라보 팀 김한솔’이라고 쓰여 있었다. 왠지 이름이 낯익었다.

유건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장난을 치는 모습이 제법 친해 보였다.

“이야. 이거 은혜도 모르는 녀석이네. 내가 너를 몇 번이나 재워 줬는데.”

“그 얘기 하지 마. 또 열 받으니까.”

“구사월 가이드. 저 알죠? 예전에 제가 백유건 제 숙소에 있다고 연락드렸었는데.”

“아, 네.”

나는 자리를 정리하다가 대놓고 말을 걸어서 마지못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그 당시 백유건의 친구란 녀석이 유건의 위치를 불었었다.

알려 준 곳으로 가보니까 없어서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던 모양이었다.

“저 가면 안 재워 줘요? 뭐든 물어보면 다 대답해 줄 자신 있는데.”

“은근슬쩍 구사월한테 말 걸지 마. 너 구사월 모르잖아.”

“A지부 여왕님을 왜 몰라. 구사월 가이드도 저 알죠? 저 자연계 A급인데?”

“저 면담이 잡혀서 가 볼게요. 잠시만요.”

나는 지부장 비서실에서 온 메시지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틈을 비집고 빠져나가 사무실 문을 열려는데 유건이 붙잡았다.

“면담 누구?”

“지부장님.”

“지부장님이 왜?”

“퇴직하니까 그냥 인사 겸 부르시는 거겠지.”

퇴직한다고 모든 각성자가 지부장과 인사를 나누진 않는다. 유건은 그래서인지 심란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높은 등급 각성자는 종종 이렇게 불러서 인사를 나눴기에 그렇게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공과 사는 구분하자. 별 얘기 안 하실 거야.”

혹여 따라가겠다고 떼를 쓸까 봐 단속하듯 주의를 줬다.

“너희 가문이랑 가족은 생각이 다르다며?”

“그렇긴 한데….”

“그만 떠들고 할 거 없으면 내 짐이나 대신 정리해 줘.”

유건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유건에게는 별 얘기 아니라고 말했지만 긴장되는 게 사실이었다.

어릴 때도 지부장님을 본 적 있었고 무서운 분이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그가 유건과 한결의 아버지라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두 남자를 의도치 않게 한 번씩 좋아했고 이제 갓 에스퍼가 된 막내아들을 센터에서 나가게 한 가이드다.

그들이 내게 원하는 게 있어서 허락했다고 하나, 내 행동이 못마땅하긴 할 것이다.

“어디 가?”

“아… 캡틴. 지부장님 면담이요.”

“그래? 나도 올라가야 하는데 같이 가자.”

한결은 자연스레 같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지부장실은 A지부 본관 최고층에 위치해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올라가는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오늘이 센터 마지막이고 그렇다면 한결도 당분간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내가 나가려는 이유에 한결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것도 있으니 그가 만나자고 해도 왠지 나는 그를 피할 것 같았다.

“이사는 어디로 가기로 했어?”

“E지역이요.”

“내가 놀러 가도 안 재워 줄 거야?”

한결도 사무실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한솔이 했던 말을 따라 하며 장난스레 물었다.

아무렇지 않게 장난을 쳐야 할 타이밍인데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난감한 표정만 짓고 있는데 한결의 목소리가 뚝 떨어졌다.

“모른 척 넘어가면 너도 속았다고 여기고 얼굴 마주한다고 하지 않았나?”

순식간에 차게 식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고개를 떨구고 있어서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데도 상처받은 얼굴이 그려졌다.

“선배. 저는….”

“지부장님이랑 면담 잘해.”

어느새 한결이 내리는 층에 도착했고, 그는 오늘도 아무렇지 않게 엘리베이터를 나갔다. 홀로 남은 엘리베이터가 유난히 적막하게 느껴졌다.

그제야 왜 순조롭게 흘러가는 상황이 찝찝했는지 알게 됐다. 내 입장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거였지만, 한결을 고려하지 못했다.

한결은 나와 많이 닮은 사람이었다. 과거의 상처로 인해 곁에 사람을 잘 두지 않았고 예민했다.

한번 정을 주면 쉽사리 관계를 끊어 내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에게 나와 유건은 그나마 가까운 사람일 것이다.

유건의 친모와 사이가 좋을지 안 좋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남이었고, 아버지와는 한결의 어머니 일로 별로 좋지 않은 관계라고 들었으니.

그런 한결이 우리가 떠나고 어떤 심정일지 외면한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심란해하는 사이 어느덧 최고층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 내리자, 비서실이 보였다.

“지부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받아 지부장실로 들어갔다. 지부장님은 통유리로 되어 있는 창 너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소리에 느리게 뒤를 돌아보고는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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