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09/131)

“알았어.”

별다른 방법도 없기에 수긍하자 유건이 말을 이었다.

“이안이랑 거래는 계속할 거야?”

“해야지. 나가도 인간이 되는 편이 나을 테니까.”

진지하게 대답하던 유건이 돌연 내 얼굴을 유심히 쳐다봤다. 내가 뭔가 말을 잘못했다는 듯이 시선이 직선적으로 다가왔다.

“왜?”

“아니야. 나 먼저 잘게.”

“어.”

유건은 사뭇 애매한 미소를 짓더니 게스트 룸으로 들어갔다. 내가 요새 기분이 좋지 않은 탓에 유건과의 접촉이 눈에 띄게 줄었다.

그동안 눈만 마주치면 입술을 붙인 것이 무색하게 어색한 기류마저 흘렀다. 내 옆에 항상 붙어있으니 내가 이상해진 걸 가장 먼저 알아챘을 텐데 분위기를 풀어 보겠다고, 혹은 내 고민을 들어 주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나 스스로 한결을 정리하길 바라서일 것이다.

한결을 향한 마음이 뜨겁지는 않았지만 오래된 감정이고 얕지 않았던 만큼 이런 시간이 언젠가는 찾아왔을 것이다. 나 또한 필요한 과정이라 여겼다.

센터에 나가 한결과 관련된 것들과 한동안 거리를 두면 일렁이는 감정들이 제자리를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 내 옆에는 유건이 있으니 되도록 이 기간을 오래 끌고 싶지 않았다.

***

“오셨습니까.”

한결은 늦은 새벽, 국현의 연락을 받고 지하 수용소를 찾았다. 국현이 익숙하게 한결의 몫의 차를 내어 테이블에 올렸다.

그들은 여러 차례 이런 식의 은밀한 만남을 가졌다. 처음은 국현이 가이드 습격 사건 범인으로 의심돼 한결이 그를 찾아왔을 때부터였다.

그들은 오해를 풀었고 이해관계가 맞아 그 후로 범인을 같이 쫓고 있었다.

조사는 가이드 습격 사건 임무가 왜 C지부에서부터 진전이 더딘 것인지, 누군가 개입돼 있는 건 아닌지, 그렇다면 그게 누구인지부터 시작됐다.

A지부에서는 한결이 사월을 생각해 방해했다지만 C지부에서 이렇다 할 성과 없이 질질 끈 것은 이상했다.

조사는 오랫동안 이어져 왔고 꼬리에 꼬리를 물어 드디어 원인을 알게 됐다. 그 사람은 놀랍게도 한결의 조부인 센터장이었다.

“뭔가 알아냈습니까?”

“네. 공통점을 찾아내긴 했습니다.”

“뭡니까?”

한결은 크리먼이 되어 자신을 공격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지만,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들었던 조부에 대한 증오가 더 강렬했다.

한결의 조부인 센터장은 가이드를 아이를 낳는 기계처럼 여기고 도구처럼 생각했다. 그의 세계에는 오로지 에스퍼밖에 없었다.

옛날에는 에스퍼가 가이드를 함부로 대해도 그들이 크리처로부터 가이드를 지켜 주니 당연히 에스퍼에게 파장을 줘야 한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요즘 각성자들은 각자 역할이 다를 뿐, 크리처와 싸우는 에스퍼의 건강을 관리함으로써 국가 안전에 이바지하는 건 같으니 평등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각성자의 머리를 들여다보는 게 일인 국현은 생각보다 많은 비밀을 알았다. 그가 정신을 읽은 각성자가 크리먼이 아니더라도 그들의 친구, 직장 동료, 가족들이 크리먼인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관련된 이들의 수가 무려 센터 안에 15%에 육박했다. 아마도 확인되지 않은 크리먼도 있을 테니 더 많을 것이다.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결은 이 기회에 이안과 연관 지어 센터장을 칠 생각이었다. 센터에 오랫동안 고여 있는 썩은 뿌리를 통째로 뽑아내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다.

하지만 왜 센터장이 이안을 도왔는지 아무리 조사해도 그럴듯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돈을 비롯해 그 어떤 것도 받은 게 없었다. 다시 말해 이안을 도운 센터장이 이득을 본 것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었다.

단지 가이드 습격 사건을 숨겨 줬다는 것만으로 센터장과 이안을 공범으로 몰고 가긴 힘들었다. 지금은 센터장이 권력의 핵심이니 더욱 힘들 것이다.

그렇게 조사가 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들 즈음, 한결은 센터장의 데스크에서 영문 모를 리스트를 발견했다. 그 리스트에는 센터 가이드의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이안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아 국현에게 조사를 요청했다.

“그 리스트에 있는 가이드는 전부 크리먼이더군요.”

“크리먼?”

국현은 진단원의 매칭팀을 포섭해 리스트의 가이드와 자신을 매칭시켰다. 그의 파장에 3일 동안 노출되면 세뇌할 수 있었고 이후 국현이 그들의 정신을 읽은 것이다.

“센터장이 이안과 작당해서 가이드를 크리먼으로 만든 건가… 아니면 센터에 원래 있던 크리먼 리스트를 이안이 센터장에게 넘긴 걸까요?”

“글쎄요. 전자라면 센터장이 굳이 가이드를 크리먼으로 만들 이유가 없고, 후자여도 리스트를 받았으면서 이제껏 숨긴 건 말이 안 됩니다.”

국현의 말이 맞았다. 크리먼인 걸 들키면 바로 사살령이 내려졌다. 아무리 센터장이 가이드를 아니꼽게 생각해도 에스퍼는 가이드 없이 살지 못한다.

가이드의 씨를 완전히 말려 버리려는 속셈도 아닐 텐데 센터장이 그들을 크리먼으로 만들 리는 없었다.

“구사월 가이드 건은 어떻게 됐습니까.”

이안의 가이드 습격 사건은 사월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사월에 관련된 사안은 모두 한결이 일임하기로 했었다.

“구사월 가이드는 크리먼이 아닙니다.”

국현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한결은 이미 사월이 크리먼인 걸 알고 있었다.

처음 의심이 싹튼 건 유건이 크리처 고기를 사월에게 돌려주려고 했을 때였다. 사월은 그날 무척 화가 나서 회의실로 유건을 끌고 갔다.

한결이 생각하기에 가이드가 크리처의 피를 마시면 가이딩 효율이 높아진다는 소문 때문에 사월이 그런 걸 마실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S급 가이드고 그녀의 가이딩 능력은 센터의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였다. 크리먼으로서 고기의 피를 흡혈하려는 용도. 그런데 그녀가 크리먼이라기엔 과거의 사고로 인해 여러 번 검사를 받았을 때 이상이 없었고 무엇보다 그녀의 몸에는 핵이 없었다.

그래서 이상하다고만 생각하며 넘어갔다. 그런데 다음 날 사월이 유건과의 페어를 수락했고 유건을 싫어하는 것 같은데도 곁에 두었다.

한결에게 마음이 없는 것 같지 않은데 밀어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듯이 얘기했다. 사월은 아쿠아리움에서 수조를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고, 마린 쇼 사고 때 눈에 띄게 벌벌 떨었다. 마치 들키면 안 되는 무언가를 숨기는 사람처럼.

뭔가 이상하다는 기시감은 점점 그녀가 크리먼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기에 심증만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사건이 발생했다. 국현이 목격자의 세뇌를 마치기 전날, 사월을 비롯해 지한과 규현, 유건의 행방이 몇 시간 동안 불분명했다.

지한과 규현은 공원에서 사월과 있다가 그녀가 갑자기 사라졌다고 말했다. 유건은 사월이 친구 아버지의 부고 때문에 B 지역에 있는 걸 알고 이동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사해 보니 지한과 규현은 사월과 함께 센터 군용 차량을 같이 타고 나간 것이 확인됐다. 센터 정문에 있는 입출 내역에 버젓이 찍혀 있었다.

그들이 뭔가 숨기고 있었다.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규현에게 센터 정문 입출 내역을 보여 주며 그날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난감한 표정으로 사월에게 물으라며 대답을 회피했지만 결국엔 들을 수 있었다.

이안과 지한이 한패였다. 사월은 핵이 없는 크리먼이었고, 그녀는 항생제를 조건으로 지금 이안에게 피를 주고 있다.

모든 진실이 밝혀졌지만 한결은 선뜻 사월에게 비밀을 다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가 보기에 비밀을 지키려는 사월의 모습이 너무 필사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결이 말하기 전에 사월 스스로 말해 주길 바랐다.

그는 이미 사월이 크리먼이 아닐까 의심하는 동안 판을 짜고 있었고 그녀와 한결을 밀어내는 이유가 크리처로 취급하는 크리먼에 대한 인식 때문이라면 그걸 바꿀 생각이었다.

그게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었고, 한결이 사월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그가 기다리는 사이 유건과 사월은 빠르게 가까워졌다.

한결과 있을 때는 한없이 불안해 보이던 사월이 유건 앞에서 편안히 웃었다. 한결은 그 모습을 보며 인내심이 서서히 고갈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끝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쏟아 내려 하자 사월은 그의 말조차 가로막았다. 그에게 이제 기회가 없고 돌이킬 수 없다고 말했다.

억울하고 불합리했다. 애절하게 매달려 봤지만 사월은 조금의 틈도 없이 잘라 냈다.

그제야 한결은 자신이 너무 늦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동안 그녀를 안일하게 생각하며 기다렸던 순간들이 미련하고 후회스러웠다.

사월은 누구의 탓이 아니고 상황이 그냥 이렇게 된 거라고 말했지만, 한결의 귀에는 그가 끝까지 사월이 말해 주길 기다리고만 있느라 그들이 엇갈렸다고밖에 들리지 않았다.

“리스트와 제가 알고 있는 크리먼 수를 합치면 약 18%의 각성자가 크리먼입니다. S급 가이드가 크리먼이라면 이깟 몇 퍼센트 수치보다 파급력이 클 텐데 아쉽군요.”

18%는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수치였다. 국현의 말대로 만약 파급력이 큰 S급 가이드가 크리먼이라는 걸 밝힌다면 일은 좀 더 수월할 것이다.

그렇게 돼도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지만 도움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사월은 곧 센터를 나갈 것이다. 밝히기보다는 회피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그녀는 한결이 모른 척해 주길 바랐다. 여기서 더 부담을 줬다가는 얼굴도 보지 않겠다고 하는 사월을 몰아붙일 순 없었다.

애초에 크리먼을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자는 마음을 먹은 건 그녀 때문이다. 그게 사월의 의지라면 사월의 비밀을 폭로하면서까지 대의를 이룰 생각은 없었다.

***

“근데 왜 갑자기 센터를 나가기로 했습니까?”

“굳이 들킬 위험이 높은 센터에서 근무할 필요 없잖아.”

“흐음.”

센터를 나가기로 결정하면서 자연히 이안과의 거래에서 한 달 안에 인간이 돼야 한다는 조건을 삭제했다. 센터에서 나갈 거라면 굳이 무리한 양을 줘 가면서 인간이 될 필요가 없었다.

나는 한결 얘기까지 꺼내고 싶지 않아 적당히 둘러댔다. 이안은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시간 질질 끌자는 얘기는 아니야. 무리 안 가는 선에서 피를 주겠다는 거지. 너도 최대한 빨리 핵이 사라졌으면 하잖아.”

“뭐, 그렇죠.”

이안이 싱겁게 답하더니 다시 팔에 이를 박았다. 이전과 확연하게 줄어든 세기 때문인지 약간 뻐근하다는 느낌 정도라 버틸 만했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유건의 피를 마시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말했었다. 유건이 안 마시는 것보다는 마시는 게 낫지 않겠냐는 말에 다시 입을 우물거리고 있었지만.

“이 진행 속도라면 천천히 해도 두 달 안에는 사라질 겁니다.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이안에게 피를 준 지 2주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헛된 짓은 아니었는지 이안의 핵은 이전보다 눈에 띄게 작아져 있었다.

그의 핵이 작아질수록 내가 인간이 될 날은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나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마 오랫동안 항생제에 대한 희망을 많이 내려놓은 상태였기 때문일 것이다.

센터에는 계획대로 에밀리 친구의 도움을 받아 정신적인 문제로 질병 퇴직 신청서를 상신했다. 한결과 의례적인 면담을 하면서 정해 놓은 거짓말을 늘어놨다.

그는 별다른 의심 없이 노트북에 사유를 타이핑했다. ‘그동안 수고했다’는 단조로운 말과 함께 면담은 끝났다. 내일이면 센터장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갈 것이다.

이안과 거래하기로 한 후부터는 순조롭다면 순조로운 흐름이었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계획대로 흘러간 적이 얼마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래서인지 조금 찝찝하게 느껴졌다.

사실 이안과 거래가 틀어질 것을 염려해 차선으로 지한에게 항생제 복제를 맡긴 거였다. 조금 삐끗한 게 있다면 지한 쪽은 생각보다 시일이 더 걸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곧 완성이라던 처음과 말이 달라져 혹시 딴생각하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이 상태라면 머지않아 이안과의 거래가 완료돼 항생제를 받을 것 같아 그렇게 조바심이 나지는 않았다.

어차피 지한이 항생제를 복제해 인간이 되나, 이안과 거래를 완료하고 항생제를 받아서 인간이 되나, 나는 그들을 센터에 넘기지 못한다.

우리는 서로의 약점을 공유한 셈이니 평생 무덤까지 비밀을 안고 가야겠지. 그건 분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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