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08/131)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내가 네 옆에 있을게. 내가 너 도와줄 수 있어. 이미 마음먹었고 너만 알겠다고 하면 돼. 네가 말하기 힘들어서 말하지 못한 거라면 이미 알고 있다고. 네가 크….”

“하지 마세요. 그 이상 말하면 저 선배 절대 안 봐요.”

눈동자가 아직도 불안하게 흔들리는데도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이를 너무 세게 물어 턱이 빠듯하게 당겼다.

멈추지 않고 쏟아 내던 한결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이제부터라도 제 옆에 있는다고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요?”

“알아. 말했잖아. 세상을 등질 각오도 되어 있다고.”

“제가 그걸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린 어차피 처음부터 안 될 사이였어요.”

“그럼 유건이는.”

한숨이 터졌다. 유건 또한 내가 원해서 곁에 두는 게 아니었다.

“걔는 선배랑 시작이 달랐어요. 백유건도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애초에 어떻게든 관여하게 두지 않았을 거예요. 지금은 내가 더 이상 밀어낼 수 없어서….”

속으로만 생각하던 감정을 입 밖으로 꺼내니, 보다 심한 자책감이 밀려왔다. 나도 지금 유건에게 못 할 짓을 하는 것이란 걸 안다. 내가 무사히 인간이 돼도 같이 불안감이 시달릴 것이다.

크리먼인 걸 들키면 같이 매장당하겠지. 유건과 처음에 사이가 안 좋았기에 이렇게 깊게 빠질 줄 미처 몰랐다.

한결처럼 그런 기미를 알아챘더라면 처음부터 싹이 트지 못하게 끊어 냈을 것이다.

“한 가지만 물을게. 이건 솔직하게 대답해 줘.”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캡슐에 들어선 순간 밀어 뒀던 문제를 모두 해소할 생각이었다. 한결이 내 비밀을 입에 담는 것만 막을 수 있다면 어떤 것이든 대답해 줄 수 있었다.

“날 좋아했을 때… 지금 네가 유건이를 좋아하는 것처럼 상대가 피해를 입을지도 모르는 걸 아는데도 옆에 두고 싶은 마음이 더 클 때 말이야.”

나는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입 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옆에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결과 캡슐에 들어가 가이딩을 하려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자괴감과 불안감, 두려움, 절망, 스스로에 대한 혐오, 끝없이 부정적인 감정 속에서 유일하게 반짝이던 설레는 감정이 떠올랐다.

“그때 내가 네 비밀 알아채서 상관없다고, 다 괜찮다고 말했다면 우리 사이가 달라졌을까?”

나는 그 당시 이기적이게도 내심 그 말을 바랐다. 그가 나와 엮이면 고통받을 걸 아는데도 희망했다.

하지만 그토록 바라던 말을 유건이 내게 해 주었고 그때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 말을 한결이 아닌 유건이 해 줘서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호감이 있었던 한결에게 그 말을 들었다면 분명 흔들렸을 것이다.

“우린 시기가 안 맞은 거야. 내가 조금만 빨리 알아챘더라면… 그랬더라면…. 유건이가 아니라 내가 네 옆에 있을 수 있었어.”

내가 동요하는 걸 알아챘는지 한결이 몰아붙였다.

“그래요. 선배 말대로 그때 선배가 괜찮다고 말했다면 달라졌을 수도 있겠죠.”

“그래. 그러니까 나한테도 기회를 줘.”

기회…. 그 말에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근데 현실은 선배 앞에서 저는 언제나 죄인이었어요. 선배가 모르는 동안 선배한테 설레면 제 존재가 끔찍하게 느껴져 자괴감이 들었어요. 이미 곪고 피 나고 갉아 먹고 체념했다고요.”

이 모든 것이 이제는 전부 부질없이 느껴졌다.

“저는 선배한테 말할 용기도 없었고 우연히 선배가 제 비밀을 알게 되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우린 엇갈렸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에게 기회를 줄 수 있는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한결에게는 세 번의 데이트 동안. 내가 절대 그를 받아 줘선 안 된다고 결심하고 받아들인 조건이지만 나는 그 당시에도 그에게 설렜다.

그사이 한결이 내 비밀을 알아채고, 혹은 내가 한결에게 의지해서 먼저 토로했다면. 어쩌면 달라졌을 수도 있다.

“이 상황에서 기회를 줘 봐야 뭐 해요. 저는 이제 다른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나는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 한결에 대한 감정은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가 무슨 일이 있고 무슨 감정을 교류했는지 이미 지나간 과거일 뿐이다. 이제는 기회가 없다. 돌이킬 수 없었다.

“나 때문이야. 내가 늦은 거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없어?”

“이건 누구 탓도 아니에요. 그냥… 이렇게 돼 버린 거지.”

나도 이렇게 돼 버린 우리 관계가 애달팠다. 한결을 좋아하면 안 된다고 다독이던 내가 떠올라 그만 보면 마음이 쓰렸다.

우리가 잘될 수도 있었다는 희망을 마주할 때마다 허탈했다. 그러나 보글보글 차오르던 감정들은 거품처럼 사라졌다.

“그러니까 평소처럼 선배는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가 주세요. 그래야 저도 선배가 속았다고 여기고 얼굴 마주할 수 있어요. 선배가 저 때문에 어떤 피해라도 본다면 버티기 힘들어요.”

“사월아….”

그를 이성적으로 좋아하진 않지만, 그는 아직도 내게 소중하고 아끼는 사람이었다.

내가 지켜야 할 사람 중의 하나. 그래서 나와 가까워져선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부탁이에요. 저를 정말 좋아했다면 제가 선배를 밀어내려고 했던 이유… 입 밖으로 꺼내지 마세요.”

어떻게든 붙잡으려 했던 한결이 입을 달싹이다가 이내 굳게 다물었다. 애써 세운 빗장을 부수고 나온 한결의 감정은 나에게까지 전염돼 먹먹함을 불러일으켰다.

이제는 그가 덜 상처받고 털어내길 바랄 뿐이었다.

***

“나 센터 나갈까….”

“갑자기 왜?”

문득 센터를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말 없이 티브이를 보다가 돌연 내가 이런 말을 하니 유건은 의아하단 반응이었다.

“그냥. 내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하겠다고 여기 붙어 있나 싶어. 나 말고도 센터에 가이드는 많고 하려고 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가이드 일밖에 없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

부러 가볍게 얘기한 건데 유건은 먹던 사과까지 내려놓으며 금세 심각한 표정을 했다.

“한결 형이랑 대화한 거 잘 안 풀렸어?”

한결과 캡슐에서 대화한 날부터 지금까지 유건은 내가 한결과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묻지 않았다. 그는 내가 한결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니 궁금할 법도 한데 침묵했다.

그런데 갑자기 한결의 이름을 올리는 건 내가 태도를 바꾼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니. 잘 풀렸어.”

한결과 나는 그날 이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평소처럼 나는 가이딩을 하고 한결은 알파 팀 캡틴으로서 차분하고 냉철하게 팀을 지휘했다.

업무상 대화해야 할 일이 있어도 별다른 무리 없이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첫날에는 우리가 원래대로 돌아간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한결에게 전부 전했고, 마음은 술렁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지리라 믿었다.

둘째 날은 묘하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내 부탁대로 한결은 내 비밀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하려 들지 않았고, 이제 그가 나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문제는 셋째 날부터였다. 그날부터 급격히 기분이 침체됐다. 분명 별다른 사고 없이 안온하게 흘러간 하루였다. 그런데도 왠지 공허하고 마음이 텅 빈 기분이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왜 센터에 있는 건지 갑자기 회의감이 들었다.

나는 그제야 고민에 휩싸였다. 내가 왜 이런 기분을 느끼는지.

긴 고민 끝에 이 알 수 없는 우울함의 이유를 알게 됐다. 그건 내가 크리먼인 사실을 묻은 채 센터에서 일하고 싶었던 이유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첫째, 나는 가이드 일을 좋아했다. 하지만 비밀을 들킬 위험까지 부담하며 일하고 싶진 않았다.

둘째, 유건이 내 비밀을 숨겨 준 걸 들키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그러려면 당연히 내가 센터와 멀어져야 한다. 그래야 들킬 위험이 적어지니까.

마지막으로 셋째, 나는 알파 팀 일원으로서 한결과 가이딩을 하는 게 좋았다. 그러나 이제 한결과 관련된 이유는 내 안에서 사라졌다. 싫어서가 아니라 이제 그와의 가이딩이 아예 불가능할 것 같았다.

예전처럼 그가 모른 척하고 내가 속았다고 넘어가면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날 대화로 체념하며 걸어 잠근 힘들었던 기억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고, 나 또한 한결이 얼마나 고뇌하고 힘들어했는지 알게 됐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데도 캡슐에서 보았던 격정적인 모습이 잔상으로 남아 자꾸만 눈 앞에 아른거렸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지만 정말로 그런 건 아니었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걸 보면 크리먼인 내가 그 사실을 숨겨 가며 기어코 가이드 일을 하고 싶었던 건, 한결의 지분이 컸던 걸 인정해야 했다. 돌이켜보면 가이드가 되고 싶었던 것도 한결 때문이었다.

어린 나이에 한결은 내게 거대한 산 같았고 멋져 보였다. 그를 따라 하고 싶었고 그가 하는 일을 돕고 싶었다. 그의 옆에 있는 가이드에게 질투가 났다.

마음을 접고 나서는 그와 어깨를 나란히 설 수 있는 위치가 된 게 뿌듯했다. 그도 더 이상 나를 마냥 어린애로만 보지 않았다. 공적으로는 나를 존중하고 믿어 줬다. 그 믿음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그 관계를 유지할 수 없기에 센터 생활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아무리 지금 유건을 좋아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 게 아니라면 이렇게 공허하게 느껴질 리 없었다. 그동안 나를 움직이던 크고 오래된 알맹이가 쏙 빠진 기분이었다.

“그래. 네가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자.”

유건은 잘 풀렸다는 말에 별다른 의심 없이 내 뜻을 받아 줬다.

“성규현 에스퍼 입은 내가 막아볼 테니까.”

“어떻게?”

규현은 우리가 센터를 나가면 이안과의 일과 내가 크리먼이란 사실을 밝힌다고 했었다.

“한결 형 팔아서라도 입 막아야지. 네가 크리먼인 거 형이 이미 알고 있고, 센터에 밝히지 않길 바란다고.”

여러모로 그편이 합리적이긴 했다. 센터를 나가더라도 크리먼이란 딱지가 붙는다면 사회생활을 하기 힘들었다.

또한 한결은 내가 부탁한다면 아마 선뜻 규현에게 그렇게 말해 줄 것이다. 그러니 아예 유건이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 길로 한결과 내 관계가 완전히 종결되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아니, 이미 끝난 건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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