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화 (107/131)

“언니 별로 안 궁금하잖아요.”

“나는 안 궁금한데 내 가이드가 궁금하대.”

“안 사귀어요. 저 그런 거 관심 없는 거 아시잖아요.”

“그래?”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월은 한나의 질문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정말 유건과 사귀지 않고 사월도 관심 없는 걸 알지만 듣는 유건은 당연히 마음이 썩 편치는 않았다.

“근데 조희진 가이드는 그게 왜 궁금하대요?”

조희진은 한나의 페어인 브라보 팀 가이드 이름이었다.

“브라보 팀 가이드 중에 유건이한테 관심 있는 애가 있나 봐. 희진이가 그 가이드한테 도움받은 게 있어서 슬쩍 물어봐 달라고 했어.”

한나가 자신의 페어를 끔찍하게 아끼는 건 익히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녀의 가이드가 부탁한 게 아니었다면 센터 소문에 별로 관심 없는 한나가 저런 걸 사월에게 물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사귀진 않아도 유건이는 안 될 거라고 하긴 했는데.”

한나는 사월에게 직접 묻기 전에 희진에게 어느 정도 언질을 준 모양이었다.

“왜요?”

“백유건은 너 좋아하잖아.”

유건은 저도 모르게 한결의 눈치를 살폈다. 한결은 여전히 대화를 들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특유의 완벽에 가까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너도 유건이 좋아하고.”

그 순간 한결의 미간에 옅은 금이 갔다.

“언니도 참….”

사월이 곧바로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어넘겼지만, 한결의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유건은 공연히 마른침을 삼켰다.

“네가 가볍게 이러고 다닐 것 같지는 않고. 억지로 한다고 받아들일 스타일도 아니고.”

한나는 그 반창고 때문에 사월이 유건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누가 보아도 최근에 사이가 좋아 보이는 유건과 깊은 관계를 가졌고 사월이 가벼운 이미지도 아니었으니.

그건 사월이 크리먼인 걸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사월이 유건의 피에 끌린다는 걸 모르니 그녀가 유건을 좋아하는 거라고 오해하는 것일 터였다.

눈앞에 있는 한결도 저 말을 믿는 건지 표정은 이전보다 심각해졌다. 유건은 급하게 입을 열었다.

“괜히 넘겨짚네. 저거 다 사실 아닌 거 알지?”

유건은 사월과 행복한 나날을 보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한결이 항상 남아 있었다.

유건은 사월을 좋아하는 감정과는 별개로 그들을 훼방 놓고 싶지는 않았다. 선뜻 양보하겠다는 마음은 안 들지만 서로 페어플레이하고 싶었다.

사월의 비밀을 알고 있고 그녀가 유건의 피를 욕망하니 유건은 사월의 곁에 있을 기회가 많았다. 유건은 이 상황에 대해 미약한 죄책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괜히 사월이 유건을 좋아한다고 오해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사월이 목에 그건 뭐야? 유건이… 네가 한 게 아니야?”

한결이 한참을 말없이 입을 다물다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한결도 사무실에 있을 때 사월의 반창고를 본 건지 진위를 물었다.

“벌레 물렸겠지. 요즘 모기가 기승이잖아. 아니면 자다가 긁어서 상처 났거나. 반창고 붙이면 다 그런 거겠어?”

유건은 괜히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한결이 차갑게 조소를 띄우는 걸 보니 역시 믿지 않는 것 같았다.

“구사월은 형 좋아해. 나도 구사월 좋아하지만 둘 사이 훼방 놓을 생각은 없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는데. 우리 유건이가 형을 놀리는 건가?”

오해가 더욱 깊어지기 전에 대놓고 말했지만, 한결은 그것마저 유건이 조롱한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유건은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지 난감했다.

“웬만하면 그냥 웃고 넘어가겠는데 도저히 이건 웃음이 안 나온다. 유건아. 형, 사월이한테 진지해. 그리고 사월이가 싫다면 그 의사 존중할 거야.”

“그러니까 구사월은 형을….”

“네가 내가 모르는 사월이의 비밀을 공유해서 가까워졌든 어떤 이유든 사월이가 널 더 좋아한다면 포기할 거란 말이야. 너에게만 알려 준 이유가 있겠지. 15년 동안 알고 지낸 나보다 너를 신뢰한 이유가.”

한결은 침착한 말투로 말했지만, 다분히 기분이 나빠 보였다. 그가 화날수록 냉철하고 차분해지는 걸 알기에 유건은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었다.

“네가 사월이를 협박하거나 억지로 알아낸 건 아닐 거 아니야. 그렇지?”

“…….”

이 질문은 더욱 대답할 수 없었다. 한결의 분위기가 혹여나 그것만은 절대 아니어야 한다는 것처럼 살벌했다.

그렇지만 그의 가정이 완전히 같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비슷한 면이 있었다. 사월의 비밀을 알게 된 건 우연한 사고였으나 그 빌미로 그녀의 옆에 있게 된 건 협박이었다.

그러니 사월이 한결에게 비밀을 토로하지 않은 건 유건을 더 믿어서가 아니었다. 그녀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구사월 일이라서 내가 자세히는 말 못 하지만… 구사월이 형한테는 좀 더 조심스러우니까 말 못 한 걸 거야.”

사월이 크리먼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 그녀가 유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만 바로잡으려 했다.

“형도 그걸 아니까 구사월한테 캐묻지 않은 거 아니야?”

유건은 한결이 당연히 사월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사월에 대해 본가에서 대화를 나눌 때도 우위에 선 것처럼 말했고 유건이 보기에도 사월은 한결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래서 사월이 한결에게 조심스러워하는 걸 이해할 줄 알았다.

“그랬지. 근데 언젠가부터 내가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지 혼란이 오더라.”

한결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사월이를 좋아해서, 얘를 배려해서 얻은 결과가 이거라면 좀 잔인하지 않나. 지금이라도 닦달해서 입을 열게 만드는 게 낫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

한결은 사월이 유건을 좋아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확신 때문에 사월의 비밀을 억지로라도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안 하던 짓 하지 마. 구사월 불편해할 거야. 형이 이러는 거 안 어울려.”

유건은 그건 절대 안 될 일이기에 한결을 제지했다.

“유건아. 나도 한계야.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해 보고 빼앗기면 내가 너무 불쌍하잖아.”

한결의 표정은 강경했다. 한결이 이런 태도를 보일 때 유건은 알았다. 지금 잠깐의 감정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민해 온 결과라는 것을.

그리고 그는 한번 결정하면 물러서지 않았다.

“사월이가 말 안 해도 내가 밝힐 거야. 전부 알고 있다고. 그러니까 이제 네가 아니라 나한테 의지하라고.”

“그게 무슨….”

유건은 한결이 전부 알고 있다는 말에 말 문이 막혔다.

‘뭘 알아? 전부… 그러니까 구사월이 크리먼이란 사실을… 안다는 건가? 그리고 이제 내가 아닌 형을….’

너무 큰 충격을 받아 머릿속이 혼돈에 휩싸였다. 그대로 고장이 난 것처럼 멈춰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무슨 일 있어요?”

어느새 사월이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은 듯 둘을 번갈아 봤다.

“사월아. 얘기 좀 하자.”

“잠깐. 나랑 얘기해. 내가 대신 해명할 테니까.”

“네가 해명할 것 없어. 본인한테 물어보면 바로 답이 나오겠지.”

한결이 사월의 팔을 붙잡아 끌었다. 그 위로 유건의 손이 겹쳤다. 유건은 사월을 끌고 가려는 한결을 막았다.

“잠깐만요, 선배. 무슨 얘기인데요?”

“네가 나를 밀어냈던 이유.”

그 한마디에 사월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로써 모든 게 확실해졌다. 한결이 뭔가 눈치챈 것 같았다.

“구사월….”

유건은 가지 말라는 듯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직접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지만, 한결이 말하려는 게 혹시라도 자신이 생각하는 것일까 봐 불안했다.

한결이 사월이 크리먼임을 눈치챘다, 그것은 그녀가 제일 두려워한 일이었다.

사월은 한결에게만은 끔찍이도 밝혀지기 싫어했다. 한결이 사월을 내치지 않게 된대도 그녀가 깊게 상처를 입을 것이 자명했다.

“괜찮아. 얘기 나누고 올게.”

사월은 유건의 손을 스스로 떼어 냈다. 굳은 표정이었지만 불안함보다는 어딘가 결연해 보였다. 직선적으로 올곧은 시선이 한결을 향했다.

“어디로 갈까요?”

유건은 그 모습이 쓰리고 안타까웠다. 죽으러 가는 걸 알고 발걸음을 떼는 사형수처럼 초연해 보였다.

“캡슐이 좋겠다. 긴 대화가 될 거고 누가 들으면 안 될 내용일 테니까.”

그들은 유건 앞에서 서서히 멀어져 갔다. 유건은 사월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

행복에 취한 일상이 순식간에 거짓말처럼 일그러졌다. 오래전부터 예정된 균열의 시작이었다.

***

한결과 캡슐에 단둘이 있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언제였는지 한참 동안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예전에는 센터에 출근하면 항상 그와 가이딩 하는 시간을 기대했다. 하지만 지금은 캡슐의 공기가 무겁고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선배, 저희 약속이요. 세 번 만나 보고 제가 그때까지 선배 남자로 안 느껴지면 그만두기로 했던 거.”

한결이 이 조건을 제안할 때까지만 해도 분명 설레는 감정이 더 컸었던 것 같은데.

“이제 그만하기로 해요. 저는 선배가 가까운 지인으로 남았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애써 괜찮을 거라고 다잡은 마음까지도 불안감에 잠식되었다. 그의 얼굴을 도저히 마주할 수 없었다.

“가까운 지인…. 내가 이걸 납득하라고?”

“세 번 만나고 아니면 그만둔다고 했었잖아요.”

“그랬지. 네가 나를 밀어내는 이유를 몰랐을 때까지는.”

한결이 내게 한걸음 다가왔다. 피하고 있는 시선을 턱을 잡아채 억지로 눈을 맞췄다.

내가 한결을 밀어내는 이유. 그는 그 이유를 알고 있고 이제 내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

“사월아, 나는….”

“저 백유건 좋아해요.”

나는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얘기를 그의 말을 막기 위한 용도인 것처럼 허겁지겁 내뱉었다. 금방이라도 그가 내 비밀을 발설할 것 같아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선배가 뭘 알아냈든 제 생각이 바뀔 이유는 안 될 거예요. 여기서 그만해요. 선배랑 불편해지고 싶지 않아요.”

내가 그를 따라온 건 더 이상 대화를 피할 수 없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말을 온전히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한결이 어떻게든 내게 내 비밀을 알고 있다고 말하려는 거라면 나는 어떻게든 막을 생각이었다. 그가 입 밖으로 내 비밀을 말하는 순간 한결이 어떤 결정을 할지 알았다.

그가 나 때문에 스스로를 갉아먹는 선택을 하게 할 수 없었다.

“아니, 내가 그동안 바보 같았어. 나는 이제 너랑 불편해지더라도 말 할 거야.”

꽤 단호하게 말했건만 한결 또한 물러서지 않았다.

“너도 분명 처음엔 나 좋아했잖아. 유건이가 네 비밀을 알고 있어서, 그래서 어울리다가 의지하고 정들어 버린 거 아니야?”

“…….”

말문이 막혀 버린 건 한결의 말이 사실이라서가 아니었다. 속으로 짐작하고 있지만 한결이 정말 내가 크리먼이란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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