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6/131)

“고양감이 있을 수는 있지만 참아 낼 수는 있을 정도래. 피를 원하는 건 힘들 수 있어도 접촉하고 싶은 건 다른 문제라던데.”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유건은 내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닌 스스로 유건을 받아들인 걸 확인한 셈이었다.

우리 관계는 현재 어떤 관계보다 모호했다. 잠자리는 하지 않았기에 파트너라고 칭하기에도 이상했고 친구는 절대 아니고 연인도 아닌…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관계라고 해야 하나.

나는 당연히 유건이 좋아서 입을 맞추고 닿고 싶은 거지만 유건은 그걸 모르니 그렇게 받아들일 확률이 높았다.

그럼에도 그가 내게 따지려 들지 않는 건 나를 좋아하니까. 내 마음이 한결을 향한다고 생각하니 마음까지 바라지도 않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안 좋았다.

“맞는 말이네. 나 너랑 이러는 거 좋아서 그런 거야.”

“어?”

“그러니까… 네가 나 만지는 거 좋다고.”

나는 뒤늦게 말을 바로 잡았다.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유건이 오해한다고 해도 지금은 이 관계가 최선이었다.

나도 더 이상 그를 밀어낼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커졌고 그렇다고 완전히 고백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럼 나 기대해도 되는 거지?”

“…….”

“순서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은 드는데 욕심나는 건 사실이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의 유무와 달리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관계를 지속해서 마음이 생길 수 있든 아니든 난 이미 유건에게 마음이 있다. 그가 쳐다보는 시선에 심장이 아프게 뛸 정도로.

유건은 모르지만 우린 순서대로 가고 있었다. 나도 어떻게든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한결이 아니라 너를 좋아한다고. 나도 네가 너무, 정말, 많이… 내가 크리먼이든 아니든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고 싶을 만큼 욕심난다고.

“오늘… 피 마셔도 돼?”

지금은 아니지만, 미래에는 나도 그를 좋아하고 싶다. 유건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일 만한 말이었다.

이 관계를 지속할 생각이 있다는 의미였으니. 유건은 잠시 침묵했다. 시선이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그가 불시에 내 몸을 두 팔로 들었다. 갑자기 돌아간 시야에 놀라 그의 목을 본능적으로 휘감았다.

“그럼, 되죠.”

그가 귓가에 나긋하게 속삭였다. 그대로 내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뉘었다.

“그리고 이건 이안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말해 주더라. 흡혈하면서 관계 가지면 엄청 황홀하대.”

이안 이 미친놈이 쓸데없는 말을….

“그 자식이 연구하기로는 30배 이상의 쾌락이라던데.”

“개수작 부리지 마, 백유건.”

“그냥 그렇다고. 알아만 두라는 말이야. 난 언제든지 준비돼 있거든.”

유건이 자기 티셔츠 아랫단을 엇갈리게 잡고 단숨에 옷을 벗어 버렸다. 군살 없이 잘 빠진 허리와 조밀하게 짜인 근육이 드러났다.

방금 운동한 사람처럼 건강하고 탄탄해 보였다. 시각적인 자극만으로도 아찔한 감각이 찾아왔다.

“뼈째 씹어도 돼, 사월아.”

소름 돋는 말을 하면서 짓는 표정은 어느 때보다 화사했다. 내 손을 잡고 그의 몸을 훑어내리게 하며 몸을 기울였다.

“다 네 거잖아.”

뜨거운 열기와 단 향이 훅 끼쳤다. 스스로 목을 내 입에 가져다 대며 매혹적인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크리처화를 개방하여 이를 박자 유건이 야한 신음을 흘렸다. 달콤하면서도 싱그러운 피 맛에 전율이 일었다. 이 녀석 때문에 요즘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이런 향기에 이런 피에 나만 보는 지고지순한 성격이라니….’

마치 신이 나를 위해 만들어 준 선물 같았다. 네가 언제까지 모른 척할 수 있을 것 같냐며 시험에 들게 했다.

그를 완벽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왠지 내가 함락될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

“아, 진짜 화장실 좀 따라오지 말라니까. 이제 안 이래도 되잖아.”

사월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유건이 당연하다는 듯이 따라붙었다. 그녀가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 주변을 살피며 유건에게만 들리게 짜증을 부렸다.

“원래 사고는 방심했을 때 터지는 거야. 지금이 제일 위험한 시기라고.”

“그러니까 대체 누구를 경계하는 건데? 어? 어차피 상대 다 알잖아. 여기 있을 리 없잖아.”

원래 유건이 사월을 밀착 경호한 이유는 이안 때문이다. 이안이 나가고 난 이후에는 지한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따라붙었다.

하지만 지한은 지금 이안보다는 그들의 편에 더 가까웠다. 그런데도 유건이 이토록 사월을 졸졸 따라다니는 건 이제 습관 같은 거였다.

사월이 눈에 보이는 곳에 있어야 안심이 됐다. 유건은 눈썹을 아래로 일그러트리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내가 불안해서 그래. 좀 봐주면 안 돼? 멀리 떨어져 있을게.”

유건은 보란 듯이 여자 화장실 입구에서 세 걸음 떨어졌다. 그녀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다섯 걸음 떨어졌다. 아직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의 고개가 멈출 때까지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사무실 문 앞까지 멀어져 있었다.

“여긴 너무 먼데.”

사월은 이 거리가 마음에 든다는 듯 그제야 화장실로 발길을 돌렸다. 유건이 슬금슬금 다시 다가가려 하자 홱 돌아봤다.

자신이 지켜보고 있다는 듯 노려보는 사월의 눈초리에 유건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멀리서 유건이 배시시 웃어 보이자 사월이 한숨을 쉬고는 진짜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귀여워.’

유건은 이제 사월의 뒤통수만 봐도 사랑스럽다는 감정을 느꼈다. 어젯밤 사월이 유건의 피를 마시고 싶다고 한 건 유건에게 어떠한 말보다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단순히 그의 피를 욕망해서 한 말이 아니라, 사월이 앞으로 그들의 관계를 발전시킬 생각이 있다고 여겨지는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에 감격스러워 유건은 평소보다 마음이 주체가 안 됐다. 원래도 그녀 옆에 서면 간질거리고 설렜지만 이건 한도를 초과한 느낌이었다.

정신없이 사월을 탐하다 보니 그녀가 안 된다던 부위까지 손을 대고 있었다. 아무리 이성이 날아가도 사월의 목소리만은 반응하기에 그녀가 제지했다면 분명히 멈췄을 텐데.

뒤늦게 표정을 살피자 사월 역시 정신이 없어 보였다. 사월은 평소의 포커페이스가 무색하게도 쾌락에 약한 편이었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견고한 무표정이 유건의 손길에 허무하게 무너진다. 그 간극이 그를 미치게 했다.

이 사실을 그만 알고 싶고 계속 보고 싶었다.

“잠깐만….”

며칠 굶은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그녀를 입에 담다가 멈춘 것은 그녀의 허벅지가 바르르 떨릴 때쯤이었다. 사월이 배꼽 부근에 있는 유건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왜?”

사월은 침대 위에서 굉장히 솔직한 편에 속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행동에 한해서 적극적이었다.

말로 하는 건 여전히 인색했다. 입술을 깨물며 얼굴이 붉어지는 걸 보면 분명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말을 해 줘야 알지. 뭐 해 줄까? 여기 빨아 줘?”

“아니….”

유건은 그걸 아는데도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보여서 매번 집요하게 그녀가 곤란한 말만 물었다.

“그럼 어떤 거? 그만할까?”

“아, 좀.”

“키스해 줘?”

부끄러움이 원망 섞인 눈초리로 변할 때쯤에 유건이 이미 눈치챈 그녀의 바람을 물어 오면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러운 입술이 겹쳤다. 몸이 달아서 적극적으로 얽혀 오는 움직임이 사랑스러웠다.

그의 입과 손놀림에 신음하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녀가 뱉는 숨소리와 타액, 음성, 뽀얀 살결에서 도통 믿기지 않는 달짝지근한 맛이 났다.

처음엔 사월과 몸부터 섞는 게 맞는 건지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와 닿아 있는 순간만은 그의 것이라는 만족감이 차올랐다.

아예 이 모습을 몰랐으면 모를까, 이제는 멈춰야 할 방법을 몰랐다. 그는 가끔 사월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싶다는 포악한 감상에 사로잡혔다.

“여기서 뭐 해?”

유건이 어제의 기억을 상기하며 실실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한결이었다.

“어, 형. 아니, 캡틴.”

유건은 다른 생각을 하다가 무심코 허울 없이 불러 버린 호칭을 바로잡았다. 한결의 입꼬리에 유연한 미소가 번졌다.

“백유건 에스퍼. 여기서 뭐 하십니까?”

한결이 유건을 따라 맞장구쳐줬다. 유건은 한결이 이럴 때마다 저를 놀리는 것 같아 멋쩍어졌다.

“구사월 가이드 기다립니다.”

“어디 갔는데요?”

“저기….”

유건은 저 멀리 떨어진 화장실을 손짓했다. 한결이 이 정도로 밀착 경호하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고를 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월을 따라다니는 건 이제 경호 때문만이 아니었다. 사무실을 나온 김에 한적한 곳으로 데려가 입이라도 맞출 수 있을까 기회를 엿보려는 불순한 의도도 있었다.

당연히 이 이유는 한결에게 절대 말하지 못한다. 한결은 사월을 좋아하고 아마 사월 또한 한결을 좋아하니까.

그녀가 숲속에서 한결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원래 자신이 크리먼이기 때문에 사람을 깊게 옆에 두지 않았다.

소중한 사람일수록 더 곁에 두기 싫겠지. 그 인물은 처음 유건이 사월의 비밀을 알게 된 후부터 항상 한결이었다.

최근 자신의 행동을 받아 주고 있긴 하지만 사월의 마음까지 저에게로 기울었으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녀는 단지 각인을 끊는 것에 실패해 유건의 피와 향기에 취해 있는 것이다.

“경호 열심히 하네. 사월이 숙소에서부터 화장실 앞까지….”

한결은 유건이 사월의 숙소에 같이 지내는 걸 원래 알고 있었다. 유건이 대놓고 센터 안이 위험하니 당분간 사월의 숙소에서 같이 지내겠다고 말했고 한결도 동의한 사안이었다.

그런데 한결의 표정은 왠지 불편해 보였다. 역시 화장실 앞까지 따라다니는 건 선을 넘는다고 여긴 것 같아 적당히 둘러대려고 할 때였다.

“사월아, 벌레 물렸어?”

“놀리지 마세요.”

화장실 안에서 대화 소리가 들렸다. 사월과 알파 팀 에스퍼 한나의 목소리였다.

화장실과 거리가 있는데도 발달한 청각 때문에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한결 또한 S급 에스퍼이니 유건만큼이나 잘 들릴 것이다.

한결과 유건은 의도치 않게 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됐다. 한나가 사월에게 모기에 물렸냐고 물은 건 어제 이안이 준 반창고를 보고 한 소리일 터였다.

그리고 센터에서 그 반창고를 보고 정말 벌레가 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듣고 싶지 않다면 자리를 옮기는 것도 방법일 텐데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들려오는 대화가 사적인 것이었으나, 하필 유건과 한결에게 굉장히 예민한 주제였기 때문이다.

“유건이랑 사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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