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105/131)

이안은 이전에 내가 크리처화를 통해 상처를 회복했는지 확인하려 했다. 매일 지한과는 사무실에서 만나니 지한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하려 했겠지.

그렇다면 거짓 정보를 흘렸다던 ‘누구’란 지한을 뜻하는 거였다. 지한이 내 상처가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한 모양이었다.

나는 이미 어떤 정황인지 짐작하고 있지만 사실 확인을 위해 물었다. 지한이 이중 스파이인만큼, 그들의 관계를 주의 깊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 이안이 네 상처 없어졌는지 봐달라고 해서 확인했었어. 나는 여전히 상처가 있다고 보고했고.”

“왜 그랬어요?”

역시 내 추측이 맞아떨어졌다. 그는 이안에게 거짓말을 했다.

“네가 크리먼이란 사실이 이안한테 안 밝혀졌으면 싶었으니까.”

“그러니까 왜….”

“이안은 이전에 한 번 습격에 실패해서 이번엔 확실히 네가 크리먼인지 확인하고 싶어 했어. 크리먼이라면 크리먼에 맞춘 계획을 짜야 하니까. 진실 여부가 밝혀지면 곧바로 내가 너를 습격해야 하는데 그게 싫어서 나는 숨기려고 한 거고.”

“…….”

“재즈바에서 처음 습격했을 때도 크리처화해서 도망가는 거 봤는데 이안한테 보고하지 않았어. 그 후에도 이안한테 크리먼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고 지지부진하게 끌었고. 그래서 이안이 A지부로 오게 된 거야. 더 이상 나만 믿고 기다릴 수 없어서.”

내가 모르는 사이 그는 내 비밀을 숨겨 주고 있었다.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결국 이렇게 돼 버렸지만… 최대한 늦추고 싶었어. 내가 복제에 성공하면 너를 공격하지 않아도 되니까.”

지한은 이안의 명령대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항생제 복제라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안에 복제가 성공하면 이안에게 휘둘리지 않아도 되기에 시간을 끌고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지한은 내가 유건과 페어를 그만두려고 했을 때, 페어를 그만두면 2년간 다시 하지 못하니 신중해야 한다며 마치 유지하는 게 좋을 거라는 것처럼 조언했다.

그때는 단지 그가 재밌는 이야깃거리여서 흥미를 보이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유건과 페어를 취소하면 이안이 내게 접근해 오기 쉬우므로 막으려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나는 유건과 페어를 취소했고, 이안은 내가 유건과 페어를 취소하자마자 가까이 접근했다.

페어를 취소했던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도처에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뒤늦게 위험을 감지하고 다시 사이좋은 척하며 같이 다녔지만, 지한과 유건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내가 크리먼이란 사실이 진즉에 발각되고 이안에게 붙잡혔을 것이다.

지금은 이안에게 다양한 제어 요소가 있으니 피와 항생제를 교환하자 제안했지만, 일방적으로 피를 내주게 되었을 수도 있겠지.

현재 상황이 좋지 않다고 여겨 왔는데, 이제 와 보니 더 최악으로 굴러갔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았다. 그랬을지도 몰랐겠다는 가정일 뿐이지만, 섬찟한 감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그냥 사실대로 말하지 그랬어요. 그럼 도와줬을 텐데….”

어떠한 방식일지는 모르지만, 이안이 항생제를 가지고 있고 지한이 복제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도왔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나는 항생제를 찾고 있었으니까.

“첫 번째 습격을 했단 게 나였다고 말해도 네가 도와줬을까? 아마 그때 말했다면 나와 이안을 함께 센터에 고발했을걸. 너는 핵도 없고 크리먼이란 사실이 들키지 않았던 시점이었으니까.”

“그러네요.”

나는 쉽게 수긍했다. 그건 당연한 결과였다.

이미 지한은 내게 피해를 준 상황이고 이안에게 협박당하고 있는 지한을 불쌍히 여겨 내가 도울 확률은 희박했다. 내가 내 안위가 중요하듯 지한에게는 지한의 안위가 제일 중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내게 말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침묵했다.

여기서 그동안 고마웠다고 말하는 것도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냥 지한의 탓을 하기도 이상했다.

왜 마음껏 미워하고 혐오하지도 못하게 만드는 건지….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그가 내 목숨을 위협했단 건 변하지 않는데. 왜 애매하게 나를 도와서….

지금이라도 항생제가 무사히 복제되어서 지한도 나도 인간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지한과 예전처럼 돌아가긴 힘들 것이다.

그나마 그렇게 되면 내가 지한을 조금이나마 용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도 어느 정도 죄책감을 덜어 낼 수 있지 않을까.

***

“굉장히 애매하네.”

숙소로 돌아와 지한과 나눴던 대화를 유건에게 전했다. 유건은 나와 같이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자기중심으로 생각해서 피해를 끼친 건 변하지 않는 거잖아.”

“…그렇지.”

“이 일이 마무리가 잘 돼도 나는 강지한이 다른 지부나 팀으로 옮겼으면 좋겠어. 양심 있으면 그렇게 해야지.”

유건은 의외로 이런 면에선 맺고 끊음이 확실했다. 지한과 한번 틀어진 이후로 눈도 마주치기 싫어했고 잠깐 우리와 뜻을 같이한다고 해도 적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건 나도 그래. 지금은 내가 아쉬운 입장이니까 항생제 받고 나면 말해 보려고.”

나도 유건과 같은 생각이었다. 내가 인간이 되더라도 크리먼이었던 과거가 내 약점이자 치부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지한을 보면 안 좋았던 기억이 떠오를 것이다. 그건 지한도 마찬가지겠지. 지한도 웬만하면 이 의견을 받아들일 것 같았다.

“근데 넌 이안이랑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어?”

“흡혈 끝나고 나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냐고.”

유건은 매번 흡혈을 마치고 가려고 하면 이안에게 할 말이 있다고 단둘이 대화를 나눴다. 워낙 방음이 잘되는 연구실이어서 밖에 있으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점점 궁금해졌다.

“그냥 이것저것. 걔가 미친놈이긴 해도 박학다식하잖아.”

“그러니까 뭘 물어봤는데.”

“…….”

유건은 집요하게 추궁해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유건이 이안에게 물어볼 만한 걸 추측해 보자면 항생제와 크리먼에 대한 정보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항생제에 대해 대놓고 물어볼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면 크리먼에 대한 정보인가?’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주시했다.

“오늘 재밌는 거 안 하네.”

유건은 모른 척하며 갑자기 켜놓고 보지도 않고 있던 티브이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내게 말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가 필사적으로 숨기려 할수록 승부욕이 샘솟았다. 나는 시선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자러.”

“나도 같이 가.”

내 방으로 들어가려니 유건이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오려고 했다.

“넌 네 방에서 자.”

그의 가슴을 막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유건과 깊은 스킨십을 한 후로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잠자리를 함께했다.

유건의 방에서 내가 잘 때도 있었고 내 방에서 유건이 잘 때도 있었다. 빈도는 유건이 내 방으로 오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이 점이 딱히 불편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명백히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갑자기 거부한 것이다.

“왜?”

“그냥 이것저것 마음에 안 들어서. 나 원래 변덕 심하잖아.”

나는 유건이 적당히 둘러댄 말을 따라 했다. 유건의 얼굴에는 마치 나를 귀여워하는 것처럼 웃음기가 돌았다.

그 표정이 마음에 안 들어서 진심이라는 듯 방으로 다시 들어가려 했다. 유건이 다급하게 손목을 붙잡았다.

“알았어. 말하면 되잖아.”

이렇게 쉽게 넘어올 거면서 왜 고집을 부렸는지.

그가 대답해 준다고 하는데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내가 뚱한 표정을 짓고 있자 그가 내 입술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떨어졌다.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고 네가 실망할 것 같아서 말 안 하려고 한 건데.”

유건이 내 볼을 애틋하게 문질러왔다.

“내 피를 마시면 너한테 핵이 생길 수도 있냐고 물어봤어.”

나는 예상치 못한 말에 크게 놀랐다. 그러나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며 태연한 척했다.

유건은 그동안 에스퍼의 피를 마시면 내게 핵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피를 주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숲에서 내가 이안에게 가는 걸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시 피를 주게 됐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이안에게 피를 줄 때마다 그의 피를 마셨다.

유건은 언젠가부터 피를 주는데 아무런 거리낌 없는 태도였다.

“그래서 이안이 뭐라고 했는데.”

어떤 답을 들었을지는 대충 예상이 됐다.

“한번 없어진 건 안 생긴대. 애초에 분열할 세포가 없어서 그렇다던데.”

그러니 요새 피를 마음껏 마시라고 권유하는 것이겠지.

나는 유건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이 내심 이제 내가 핵이 생겨도 죽지 않으리란 믿음이 있어서 그런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유건은 이안에게 확답을 듣고 나서 안심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예상대로 내가 이 사실을 듣고 큰 실망감이 들진 않았다.

유건의 피를 마셔서 핵이 생길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내게 생기면 좋고 안 생기면 말면 되는 정도의 희망이었다.

요즘엔 스스로 내 핵을 깨뜨려 죽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은 뭐 물어본 건데.”

그렇다면 그 궁금증은 첫날 풀렸을 텐데. 이안을 계속해서 찾아가는 게 의문이었다.

“그건….”

유건은 이전보다 난감한 표정이었다. 볼까지 붉히는 게 분명 이안에게 이상한 걸 물은 것 같았다.

“듣고 화내면 안 돼. 약속해.”

“너 하는 거 봐서.”

화낼 일이면 화내야지,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냉하게 대꾸하자 그는 내게 한걸음 물러나며 약간 경계 태세를 취하며 입을 열었다.

“그… 각인 때문에.”

“각인 뭐.”

“각인된 대상의… 피를 많이 섭취하면 성적으로 끌릴 수도 있냐고 물어봤어.”

“뭐?”

“나는 네 옆에 있을 수만 있다면 몸부터 겹쳐도 상관없다고 하긴 했지만…. 네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거랑 관련이 있을지 궁금했어. 다시 피를 마시게 된 후부터인 것 같은데. 호르몬의 변화 때문이라면 내 피를 다시 안 마시면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예민하고 비밀스러운 이야기인 만큼 유건은 이걸 이안에게 상담한 것이 눈치가 보이는 것 같았다.

나도 이걸 왜 이안에게 물어보냐고 당장 화를 내고 싶었다. 하지만 일단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이안이 뭐래?”

내가 화를 내지 않자 유건은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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