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4/131)

그러나 그렇게 짐승처럼 붙어먹고 나면 짙은 후회가 찾아왔다. 특히 캡슐 외에 다른 곳에서 그와 스킨십할 때마다 조마조마했다.

“하… 이제야 좀 살겠네.”

유건은 그런 내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컨디션이 최상이었다. 당연히 그럴 만도 했다.

입술만 닿아도 파장을 줄줄 흘려 주니 안정기 중에서도 상위 퍼센트를 웃돌았다.

“…진짜 적당히 좀 하자.”

“그럼 적당히 좀 이쁘든가.”

그는 매번 뻔뻔하게 대꾸했다. 몇 번 주의를 줬지만 그때뿐이었다. 제대로 거절을 못 하는 내 책임도 있었다.

예전엔 스킨십하는 데 약간 굼뜨게 행동했으면서 뭐가 이렇게 그를 바꾼 걸까.

‘혹시 다 연기였나?’

그는 나뿐 아니라 가이드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기도 했었다. 성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무감각하다고.

나야 이전에도 그와 가이딩을 하면서 몸이 단단해지는 걸 느끼고 그런 게 아닌 걸 알았지만 이건 정도가 과했다. 욕구가 넘치는 걸 넘어서 너무 능숙했다.

그와 처음 입을 맞췄을 때도 어렴풋이 느꼈지만 그는 키스도 잘했다. 상대의 기분을 좋아지게 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처럼 금방 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나는 그 사실이 내심 언짢았다.

“야.”

“어?”

비상계단의 주황색 조명 때문인지 그의 입술이 유독 붉어 보였다. 유건은 내 입술이 퉁퉁 부르틀 정도로 빨다가 놓아주고는 옷을 정리해 주고 있었다.

이마저도 너무 익숙해 보였다. 번들거리는 타액은 우리가 조금 전까지 무슨 짓을 했는지 상기시켰다.

“너 여자 많이 만나 봤어?”

별로 돌려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 나이에 무슨 하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첫 키스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유건은 잘생기고 성격도 좋은 편에 속하니까. 게다가 집안까지 좋으니 에스퍼가 아니었을 때도 당연히 인기가 많았을 것 같았다.

“그런 걸 왜 물어봐.”

그는 질문을 회피했다. 답하는 대신 옷을 다 정리해 놓고는 내 뺨에 입을 맞췄다.

내가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자 쪼듯이 입술이 닿았다. 고개를 반대쪽으로 휙 틀자 웃음기가 묻어난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남자 많았잖아.”

“나는…!”

“예전에 형한테 들었어. 너 맨날 학교에서 고백받아 오고 남자들 쫓아다녔다고. 형한테 자랑했다며.”

“…….”

그건 내가 어렸을 적 벌였던 어설픈 질투 작전이었다. 한결이 조금이나마 질투를 해 주길 바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심했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다만 지금의 나라면 마음이 있는 상대에게 그런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고백을 받을 때마다 신나서 한결에게 내 입으로 말한 것이 부끄러웠다.

“나는 그래도 아무나 사귀진 않았어.”

“사귀긴 했다는 거네.”

“너는 아무 여자나 쪽쪽대고 다녔잖아.”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해?”

그는 순순히 답해 주지 않았다. 부정도 하지 않고 긍정도 하지 않고 유유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혹시 질투해?”

“아니. 그냥 네가 능숙해 보여서 기분 나쁠 뿐이야.”

“그게 질투 아닌가?”

나는 순간 고민에 빠졌다.

‘진짜 이게 질투에 속하는 건가?’

나는 유건이 첫 키스였다. 첫 뽀뽀는 부모님을 제외하면 한결이지만 키스는 유건이 처음이다.

뭔가 손해 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한 말인데 유건의 말을 들어 보니 내가 진지하게 지금 질투를 하는 것 같기도 해 생각에 잠겼다.

“과거가 무슨 상관이야. 지금 내가 너한테 목매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유건이 쓸데없는 생각 말라는 듯 고개를 내려 귓불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귓바퀴 안까지 스미는 속살거림이 금세 상념을 지워 냈다.

“이 입은 이제 네가 좋아하는 말을 할 때만 쓸 거야.”

“간지러워. 그만….”

“이 손은 네가 좋아하는 부위를 만질 때만 움직일 거고.”

“후으….”

“이 혀는 너를 녹일 때만 사용할 거야.”

옷을 정리한 것이 무색하게 다시 그의 손이 파고들었다.

“그거로 부족해?”

파장이 마중을 나가려는 것처럼 퍼지자 그의 눈매가 곱게 휘어졌다.

혼곤한 머릿속이 야릇함에 취해 만족감이 차올랐다. 내리깐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

“혹시 둘이 잤습니까?”

“아니? 무슨 개소리야?”

오늘도 이안의 연구실에서 피를 주면서 진통 효과를 위해 유건의 피를 할짝대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안이 피를 먹다 말고 이런 헛소리를 지껄였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흐음. 잔 것도 아니라면 왜 이렇게 백유건 에스퍼 파장이 많이 묻어 있어요?”

이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무언가 파헤치려는 듯 나를 유심히 쳐다봤다. 에스퍼의 파장은 감정에 영향을 받아서 흥분할수록 제어하기 힘들다.

유건이 이제 감정을 누그러뜨려 어느 정도 파장을 통제하는 법을 배웠지만 짙은 스킨십을 할 때는 불가능했다. 그로 인해 내 몸에 유건의 파장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래서 이안이 우리가 잔 게 아닌지 의심하는 것 같았다.

“정말 아니에요?”

내가 환멸 섞인 눈빛으로 일관하자 시선은 유건에게로 향했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신경 꺼.”

유건은 이안이 귀찮다는 듯 무심하게 대꾸했다.

“정말 자긴 했나 보네요?”

“아니라니까!”

뭔가 오해가 깊어지는 것 같아 내가 서둘러 부정했다.

“백유건. 네가 애매하게 말하니까 진짜 그런 줄 알잖아.”

그를 책망하며 태도를 확실히 밝히라는 의사를 내비쳤다.

“그게 뭐가 중요해. 저 자식이 그게 왜 궁금한 건데. 예전부터 이상했어. 너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야?”

“무슨 나한테 관심이야. 내 피에 관심 있는 거지. 아무튼 왜 괜히 오해하게 만드냐고.”

“그게 왜 오해야? 너랑 나랑 솔직히 그 짓만 안… 으읍, 읍.”

유건이 뭔가 폭탄 발언을 할 것 같아 급하게 손바닥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이안은 우리가 말다툼하게 만들어 놓고 웃음기를 머금으며 관망하고 있었다.

“이상한 거 물어보지 말고 피나 마셔.”

“하하. 오해라면 목에 그 자국은 가려야 하지 않을까요?”

이안이 그 말을 하면서 자기 귀 밑부분을 가리켰다. 나는 급하게 주머니에서 콤팩트를 꺼내 거울로 확인했다.

내 목에는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누가 보아도 이상야릇한 상상을 불러일으킬 만한 선명한 울혈이.

아마 비상계단에서 유건이 물고 빨 때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때가 오후 1시쯤이었으니 센터의 다른 사람들도 봤을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알파 팀 에스퍼 한나가 ‘요새 유건이와 사이좋은가 보다’고 지나가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그 기억까지 떠오르자 얼굴이 홧홧해졌다.

나는 곧바로 유건을 홱 쏘아봤다.

“너 알고 있었지. 왜 말 안 했어.”

“몰랐는데?”

유건은 시치미를 뗐다.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자국을 남기는 걸 좋아한다는 소문을 들은 적 있다. 키스 마크는 소유욕을 상징하기도 하니까.

그 소문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는 듯 유건은 내 몸에 흔적을 남기는 걸 좋아했다. 울혈뿐 아니라 이로 깨물기도 하고, 손자국을 남기기도 했다.

살성이 연해서 자국이 잘 남는 것뿐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 그동안은 크리처화를 개방시키면 곧바로 없어지기에 개의치 않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줬을 텐데. 나는 지금이라도 크리처화해서 자국을 지우려 했다.

“잠시만요. 구사월 가이드?”

크리처화를 개방하자 근육이 팽팽해졌다. 팔에 입술이 닿아 있던 이안이 낌새를 느꼈는지 조심스럽게 불러 왔다.

“왜.”

“센터에서부터 계속 그러고 다녔으면 본 사람이 있을 텐데. 갑자기 자국이 사라지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이런 걸 누가 신경 쓴다고.”

“저 같은 사람이요.”

이안은 이미 센터를 나간 사람이었다. 그가 말하는 의중을 알아챌 수 없어 눈가가 찌푸려졌다.

“구사월 가이드가 크리먼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사람들.”

“…….”

“저도 구사월 가이드가 손에 상처 냈을 때 다음 날 사라졌는지 확인하려고 했었거든요.”

이안이 밖으로 나를 꾀어내기 전, 배지의 날카로운 부분으로 손을 찢어 그를 자극했었다. 그당시 그를 크리먼이라고 의심하며 잠시나마 기분 나쁘게 하려는 의도였다.

생각해 보니 그날 오후 에밀리의 집에서 술을 먹어서 알코올을 해독하느라 아침에 크리처화를 했었다. 그래서 다음 날 바로 상처가 회복됐다.

그렇다면 내가 크리먼인 걸 이안이 그 사건으로 인해 알게 됐을 터였다.

“누가 거짓 정보를 흘려서 결국 일이 귀찮게 돼 버렸지만요.”

이안이 지한을 보고 쯧, 소리를 내며 짧게 혀를 찼다. 지한은 잠잠한 표정으로 우리의 대화를 못 들은 척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 당시 그들에게 내가 모르는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

유건은 이번에도 이안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며 먼저 차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지한과 단둘이 차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지한이 우리 편으로 돌아서고부터는 안대를 착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부축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저기…. 필요한 유효 성분은 알아냈어요?”

지한과 껄끄러운 관계가 된 후 선배란 호칭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마치 길에서 처음 본 사람을 부르듯 어중간한 호칭으로 불러 버렸다.

“달아 놓은 게 소형 CCTV라 숙소로 돌아가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 외진 곳에 설치하다 보니까 이안이 뭘 조합하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을 때가 많거든.”

지한은 내가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다는 듯 물음에 대한 답만 성실하게 해 줬다. 철두철미한 성격인 이안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그만큼 조심스러워야 했다.

아직까지 들키지 않은 걸 보면 지한이 그런대로 잘 일을 수행하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이안이 눈치채고 있는 건 아니겠죠?”

속이려는 상대가 워낙 만만치 않은 놈이다 보니 정말 이안이 알아채지 못한 건지 의심이 들었다.

“알고 있다면 연구실을 바꿨겠지. 성분을 알아낸다고 해도 복제하지 못할 거라는 자신이 있다거나. 완성되면 내가 세뇌한 크리먼한테 먼저 복용하게 할 거야. 그러니 걱정 마.”

“네. 그런데 아까 이안이 이상한 말을 하던데… 그 얘기는 뭐예요?”

나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사실 이 얘기를 하려고 서론을 붙인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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