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102/131)

아무렇지 않게 같이 있자고 할 땐 언제고 유건이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오늘 같이 있어 달라고 했잖아. 그 말 하는 거 아니었어?”

“그 말 맞는데…. 좀 이상해서.”

“뭐가?”

유건이 짐짓 심각한 표정을 하더니 순순히 답했다.

“죽도 그렇고 선뜻 내 말 들어주는 것도 그렇고…. 네가 잘해 주니까 의심 들어.”

“뭐?”

나는 인상을 와락 구겼다.

“그렇잖아. 네가 나한테 먼저 다가오면 맨날 뒤통수치고 도망갔으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의 말대로 나는 그동안 유건에게 필요한 게 있을 때만 살가운 행동을 했다.

처음 내가 크리먼이란 사실이 밝혀졌을 때 회의실에서 봐 달라고 말한 거라든지, 유건의 피를 간밤에 마음껏 마셔놓고 눈치가 보여서 아침을 먹고 가라고 한 거라든지.

오늘은 이안에게 가려고 키스하다가 적극적으로 그를 만지며 쇼크 상태로 만들기도 했다. 내가 그동안 한 행동이 있으니 유건이 그렇게 받아들일 만도 했다.

평소답지 않게 너그러운 행동이 그에게는 어떤 꿍꿍이라도 있는 것처럼 비친 것이다.

“그래. 그렇게 받아들일 만하네.”

그러나 유건이 충분히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납득이 가면서도, 그에게 잘해 줘야겠다고 생각해서 한 행동들이 의심받아 기분이 저조해졌다.

태연한 척 다 먹은 그릇을 들고 방을 나가려 하는데 유건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싫다는 건 아니야.”

“알아. 찝찝하다는 거잖아.”

“그렇기야 하지만….”

“…….”

이전에 유건이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냥 잘해 주고 싶었다고 했던 말이 지금 왜 떠오를까. 얘도 그때 이렇게 답답한 기분이었나.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무너진 신뢰를 어떻게 쌓아야 할지. 그를 나 좋을 대로 이용하기 위해 너무 많은 거짓말을 해 왔다.

“괜찮아. 어차피 다른 이유가 있어서 나한테 잘해 주려는 거여도 난 계속 속아 주고 싶어질걸.”

유건이 내 손에서 그릇을 가져가 사이드 테이블에 다시 내려놓더니 침대로 몸을 밀었다.

“알잖아. 내가 너를 어떻게 이겨.”

그러곤 나를 품에 가득 안았다. 그와 몸을 밀착하니 아직도 미열이 남아 있어 평소보다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뒤통수치려고 이러는 거 아니야. 네가 아프니까… 그래서 잘해 주고 싶어서 그런 거야.”

“알았어.”

정말 그가 알아들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유건은 무엇 때문에 내가 그에게 잘해 주려는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건 다행이지만 이제는 내가 신경 쓰였다. 유건이 일부러 져 줄 때마다 마음의 빚이 점점 크기를 키워가는 기분이었다.

그에게 마음이 생기니 유건이 나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무너진 신뢰는 단기간에 채울 수 없는 부분이고, 유건이 내 호의를 밀어내지 않으니 아직은 기회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부터라도 다시 쌓아 가면 되겠지.

“오랜만에 안고 있으니까 좋다. 아픈 게 안 좋기만 한 건 아닌가 봐.”

“무슨 오랜만이야. 맨날 치대면서.”

“같이 누운 건 오랜만이잖아.”

그가 내 머리에 코를 대고 몸을 더 웅크렸다. 유건이 깨기 전에 씻고 와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그의 체향이 짙게 느껴져 호흡이 불규칙해졌다. 각인을 푸는 걸 실패해서 유건의 피에 대한 욕구만 심해져 버렸다. 습한 열기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가이딩 한다. 아프면 말해.”

애써 욕구를 참으며 심장에 파장을 주입했다. 유건의 뭉쳐진 파장을 옅은 농도의 파장으로 녹여 냈다.

“졸리면 자도 돼.”

“응….”

그의 몸 근육이 서서히 이완되어 늘어졌다. 파장의 세기가 높아지면 성감을 고조시키지만 이렇게 약하게 주입하면 에스퍼는 대체로 편안함을 느낀다.

그래서 몸도 아프니까 금방 잠들 줄 알았는데 유건은 가이딩 내내 연신 꼼질거렸다. 내 머리에 입술을 대고 있는다든가 허리를 부드럽게 쓸더니 이제는 오목한 허리 뒤를 손가락으로 훑고 지나갔다.

이렇다 할 성적인 함의는 깃들지 않은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침이 고이고 발가락이 곱아 들었다. 그의 손이 닿은 살갗이 간지러웠다.

점점 예민해지는 몸이 저주스러웠다. 분명 치료할 목적으로 가이딩을 하는 것인데 불순한 생각이 들어 죄책감이 들었다.

차라리 오늘 숲속에서 키스했을 때처럼 서로를 정신없이 탐하는 게 나을 것 같단 기분마저 들었다. 간지러운 느낌은 불꽃이 튀는 것보다 참기 힘들었다.

느끼는 걸 최대한 티를 내고 싶지 않아서 참고 있었다. 유건의 움직임이 둔해질 때쯤 그가 이제 잠들려는 건가 싶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너… 안 자?”

눈이 마주쳤다. 유건의 얼굴에선 졸음기가 전혀 묻어나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나를 주시했다.

자욱하게 느껴지는 시선이 깊숙이 내재한 음심을 자극했다. 입 안 여린 살을 깨물며 공연히 마른침을 삼켰다. 유건의 손이 천천히 다가와 내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엄지로 입술을 쓸며 점점 고개를 기울였다. 이를 악다물고 있는데 따듯한 입술이 닿았다.

“읏.”

닿는 순간 신음 같은 높은 목소리가 샜다. 그가 느리게 다가왔기에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할 수 있었는데도 그 찰나의 순간에 찌릿한 감각이 찾아온 탓이다.

유건의 입술이 내 것을 부드럽게 감쌌다. 안타까울 만큼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차례로 감쳐물며 뻣뻣하게 굳은 내 목덜미를 느긋하게 주물렀다.

자연히 턱이 벌어져 입이 열렸다. 입술을 배회하던 혀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열 때문에 뜨거워진 숨결, 말랑한 살덩이, 마찰하는 소음이 정신을 어지럽혔다. 입술 안쪽 점막을 핥다가 더욱 깊게 얽혀드는 감각에 속눈썹이 떨렸다.

오전에 겪은 짐승처럼 덤벼드는 조급함보다는 느리고 뭉근한 느낌이었다. 단단한 입천장을 혀끝을 세워 문지르는 움직임에 끙, 하고 앓는 소리가 터졌다.

“왜 안 밀어내?”

그의 옷을 그러쥔 채 헐떡이자 잠시 유건이 입을 뗐다. 다정한 시선이 닿았다. 그의 손이 내 이마를 여리게 덧그렸다.

“네가 먼저….”

“그러니까 밀어내야지.”

그 말을 하면서도 깃털처럼 가벼운 입맞춤이 계속됐다. 달콤하고 포근했다. 나를 겹겹이 감싸고 있던 경계심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굴면 내가 어떻게 밀어내라고….’

속으로 원망하고 있는데 그가 짐짓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이것도 내가 아프니까 잘해 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여기서 부정하게 되면 내가 좋아서 가만히 있는 것처럼 받아들일 테니까. 내 마음을 들킬 테니까.

내 침묵을 긍정이라고 받아들였는지 유건의 눈길이 한층 더 짙어졌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넘어가 줄지 궁금하네. 나는 이제 너랑 가까워질 수만 있다면 몸부터 부딪혀도 상관없거든.”

그가 나를 들어 올려 제 위로 내려놓았다. 동시에 옷 위를 쓰다듬던 손길이 불시에 안으로 파고들었다.

다시 입술을 포개고 혀끝이 매끄럽게 문질러졌다. 옷 안으로 들어온 손은 이전과 판이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손끝에 힘을 주어 일부러 자극적으로 문지르고 손바닥으로 감싼 허리를 위협적으로 오르내렸다. 그 움직임에 상체가 들썩거렸다.

“구사월…. 나는 너 미친놈처럼 좋아해. 도저히 이성으로는 통제가 안 될 정도로 많이.”

당장이라도 그의 손길이 목 끝까지 올라올 것 같아 숨이 빠듯해졌다. 마찰하는 부위로부터 올라오는 감각이 견디기 힘들었다. 눈매가 야릇하게 일그러졌다.

등줄기를 사악 긁어내리는 손길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허리를 자르르 떠는 동시에 톡, 하고 무언가 해체되는 듯한 소음이 났다.

내가 몸을 움츠린 건 이미 일이 벌어지고 난 후였다. 상체를 조이던 속옷의 압박이 풀어졌다.

몸이 경직되어 뻣뻣하게 굳자 유건이 파장을 넓게 퍼뜨렸다. 입이 마주한 숨결에서 유독 짙은 파장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 헐떡이며 부드럽게 얽혀오는 움직임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앞으로 움직이려는 손은 아슬아슬하게 겨드랑이에 끼워졌다.

손가락이 예민한 부위에 닿을 것 같아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런데도 좀처럼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아 애가 달았다.

그가 야속하게 느껴질 때쯤이었다. 유건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더 만지고 싶어. …괜찮아? ”

유건의 눈에도 분명 조급한 열감이 묻어났다. 그럼에도 내게 허락을 구하는 그의 모습이 참 유건답다고 느껴졌다. 지금 상황에서는 당연히 그의 배려가 달갑지 않았다.

나는 지금 그에게 고백할 수 없다. 그런데 그와 닿고 싶고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냥 분위기에 휩쓸려 주면 안 되나. 내가 정말 싫었다면 이 상황까지 오게 하지도 않았을 텐데….’

이기적이란 건 안다. 내가 한결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니 더 조심스러울 것이다.

나를 아껴서 하는 행동임을 알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가 얄밉게 느껴졌다. 사람을 한껏 달아오르게 해놓고 이제 와서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것처럼 말하다니.

“원래 이런 거 다 물어보고 해?”

조급함에 말이 되바라지게 나갔다. 유건은 내 말에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게 겁도 없네. 배려해 주는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이런 배려는 필요 없었다. 이럴 시간에 입이나 더 맞추고 기분 좋게 만져 줬으면 싶었다.

어떠한 명분이 있다면 내가 먼저 움직이기라도 할 텐데. 마음 같아서는 유건을 불안정기로 만들어 가이딩을 핑계 삼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런 건… 흣.”

“내가 어디까지 할 줄 알고 그래. 아직도 날 몰라?”

그가 언제 참았냐는 듯 거칠게 주물러 왔다. 순간 심장이 쥐어진 듯 숨이 멎을 뻔했다.

“너한테 미친 새끼가 어디까지 탐할 줄 아냐고.”

올가미처럼 강렬한 눈빛이 내리꽂혔다. 기다렸던 쾌락에 눈앞에 빛이 번졌다. 생경하게 와 닿는 감촉에 심장이 엇박자로 뛰었다.

몸이 제멋대로 비틀리자 자세를 바꿔 내 위로 올라탄 그가 도망가지 못하게 무게로 짓눌렀다.

“후… 사월아.”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의 입술이 턱선을 따라 움직였다. 귓바퀴를 잘근잘근 씹고 목으로 내려와 따끔하게 빨아들였다.

그의 입이 닿는 부위마다 열이 몰렸다. 티셔츠를 잡은 손이 얕게 떨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