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1/131)

“글쎄….”

애매모호하게 답했지만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난 감정이었다. 나는 유건이 눈에 밟히고 애틋했다. 그를 원한다. 나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길 바란다.

이성을 좋아한다는 게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옆에 오랫동안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좋아하는 게 아닐까? 더불어 유건이 나를 만지는 게 싫지 않고 오히려 닿고 싶으니까.

지수에게 말하기엔 조금 부끄러운 내용이라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유건이 잠들어 있지만 얘 앞에서 말하기 껄끄러운 주제이기도 하고….

“그래도 그 정도면 유의미한 변화네. 원래 엄청 싫어했잖아.”

“그렇긴 하지.”

지수는 그동안 유건과 내가 있었던 일을 모르니 제삼자가 보기엔 그럴 것이다. 내가 유건을 싫어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변화라고.

아니, 제삼자뿐만 아니라 유건도 살짝 그렇게 느끼는 것도 같았다. 유건은 내가 한결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거짓말하지 말라고 단언했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고 하면 왠지 그것도 믿지 못할 것 같았다. 인간이 되기 전에 마음을 전할 생각은 절대 없지만, 적어도 내가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고 생각하게 하고 싶진 않은데….

“일이 좀 복잡하게 됐네.”

“왜?”

“아니야. 내 업보지 뭐.”

지수 덕분에 유건이 왜 내가 한결을 좋아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지 대략 감이 잡혔다. 그리고 그동안 그가 어떤 이유로 내게 그렇게 행동했는지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가 내게 마음을 품은 시기에 나는 그에게 도움을 받아도 될지 말지 고민하던 시기였다. 우리의 감정의 속도가 크게 차이 나서 그가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을 것 같았다.

이 밖에 내가 의식하지 못한 채 상처 주는 말도 많이 했을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났다.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더라도 앞으로 잘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이건 뭐야?”

두서없이 중얼거린 말에 지수는 빙긋 웃고는 한결이 준 쇼핑백을 가리켰다.

“선물 받은 거라서 잘 몰라.”

“이거 요새 가이드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목걸이 아니야? 브랜드가 딱 거기 건대?”

가이드들 사이에서 유행한다고 해봤자 나는 잘 알지 못했다. 최근에는 다른 각성자들과 교류가 더 없었기에 근래 퍼진 말이라면 더욱 알 확률이 희박했다.

“궁금하면 꺼내 봐도 돼.”

지수가 궁금해하는 눈치길래 선뜻 선물이 뭔지 확인하는 걸 허락했다. 지수는 처음에는 남의 선물을 어떻게 꺼내 보냐며 주저하다가 이내 눈치를 보며 보석함을 꺼냈다.

벨벳 보석함 안에는 붉은 보석이 달린 목걸이가 있었다. 묘한 냄새가 풍겨 나도 모르게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맞네. 이거 크리처 피 혼합해서 만든 보석이잖아. 크리처 피 마시면 가이딩 효율 높아진다는 소문 때문에 만들어진 거래. 그 소문은 영 믿을만한 게 못 되는 것 같지만.”

“아… 그래?”

그 이야기는 꽤 오랫동안 퍼진 것이라 나도 알고 있었다. 이런 보석이 나온 것도 이해했다.

그러나 그 보석이 달린 목걸이를 한결이 내게 선물한 건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내 비밀을 안 게 아니었나? 아니… 알아서 이걸 선물한 건가?’

만약 내가 크리먼인 걸 모르고 선물했다면 다행이지만, 그 반대라면 이건 어떠한 경고나 다름없었다. 나의 비밀을 알고 있으니 말하라는 무언의 압박.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오늘은 한결과 마지막 데이트였고 내게도 중요한 날이었다. 한결이 이 선물을 주면서 뭔가 중요한 말을 하려 했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

지수가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고 나는 바로 샤워실로 들어가 몸을 씻었다. 따듯한 물줄기에 몸을 맡기니 하루의 피로가 조금이나마 가셨다.

샤워를 마친 후엔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유건이 몸이 아프니까 깨어나기 전에 간단한 죽이라도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결심한 것이 무색하게 인터넷 사이트에 ‘죽 만드는 법’을 찾아보다 몇 줄 읽고 꺼 버렸다. 계량하는 게 무척 귀찮았다.

‘대충 밥 넣고 물 넣고 끓이면 되겠지.’

시간도 정해 놓지 않고 밥이 퍼질 때까지 끓이며 수저로 휘휘 저었다.

“언제 들어왔어?”

수증기 때문에 손이 뜨끈뜨끈해질 때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어?”

“어…. 근데 왜 이렇게 빨리 왔어? 늦을 것 같다더니.”

유건이었다. 그는 이 시간에 내가 숙소에 왔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것처럼 얼떨떨한 반응이었다.

“그냥. 몸은? 괜찮아?”

“응. 뭐 하는 거야?”

“죽.”

“이걸 왜 해?”

“너 먹으라고.”

유건이 멍하니 보글보글 끓고 있는 죽을 응시했다. 이내 아, 하고 느릿하게 반응했다.

“나 근데 밥 못 먹을 정도로 아픈 건 아닌데. 이제 괜찮은 것 같고.”

파장 때문에 아프면 대부분 몸살 기운을 동반했다. 유건은 약 먹고 잠든 사이 땀을 흠뻑 흘리고 열도 내린 것 같았다.

“…그럼 버린다.”

“아니, 아니. 아니야. 버리지 마.”

왠지 쓸모없는 짓을 한 것 같아 버리려는데 유건이 내 행동을 제지했다.

“생각해 보니까 나 밥 못 씹을 것 같아. 으, 힘 빠져. 못 걸어 다니겠어.”

“쇼하지 말고 일어나.”

바닥에 웅크려 앉은 유건은 누가 봐도 꾀병을 부리는 것 같았다. 웃기기도 하고 아무리 괜찮아졌다고 해도 속이 편한 죽을 먹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다시 가스레인지에 냄비를 올렸다.

“오늘 뭐 했어?”

“병원 갔다가 뮤지컬 봤어.”

“뮤지컬 뭐 봤는데.”

“보고 싶었던 거.”

“재밌었겠네.”

“별로 재미없었어.”

그는 취조하듯 오늘 하루 뭘 했는지 물어왔다. 나는 이 주제에 흥미가 생기지 않아 단답으로 대답했다. 그러다 돌연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이건 뭐야? 한결 형이 준 거야?”

뭘 보는 건가 싶더니 그가 보고 있던 건 한결이 선물한 목걸이였다. 정리해서 방에 놔두려고 했는데 깜빡 잊었다.

상자가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고 보석함은 열려 있었다. 그 안에서 붉은빛이 영롱하게 반짝였다.

“어.”

“…별로 너랑 안 어울려.”

“뭐래. 예쁘기만 한데.”

“너는 예쁜데 그건….”

그는 왠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차고 있지도 않은데 왜 어울리네 마네 평가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무리 요새 한결과 사이가 안 좋아도 이렇게 부정적으로 말하진 않았는데.’

정확히는 한결이 아니라 한결이 준 선물을 얘기하는 것이지만 유건이 평소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마치 원수를 보는 것처럼 불퉁한 표정으로 계속 목걸이를 노려봤다.

“들어가 있어. 다 되면 가져갈게.”

요리하는 것이 어설픈데 옆에 있으니 부담스러웠다. 죽은 조리 과정이 별거 없다고 해도 유건이 나보다는 요리에 익숙한 편이니 부족해 보일 것 같았다.

‘근데 김치랑 먹어야 하나? 아니면 간장?’

다시 휴대폰으로 죽을 뭐랑 먹어야 할지 살펴보고 있는데 유건이 들어가지 않고 바닥에 앉은 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 할 말 있어?”

“그게….”

그가 머뭇거리며 말하길 주저했다. 정말 뭔가 중요한 말을 하려는 것 같아 행동을 멈추고 그를 내려다봤다.

“그거 조금 이따 하고 같이 있어 주면 안 돼?”

내가 아무 말 하지 않고 쳐다만 보자 살짝 붉어진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분명 괜찮았는데 눈에 보이니까 어리광부리고 싶네…. 아니야, 못 들은 걸로 해. 나 들어가 있을게.”

그러고는 급하게 말을 돌리며 일어나 터덜터덜 방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희미한 물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샤워실로 들어간 것 같았다.

‘같이 있어 달라는 게 같이 방으로 들어가자는 건가?’

유건의 말에 바로 말이 나오지 않은 건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게 뭐 별거라고 저렇게 뜸 들이다가 말한 거지?’

국자로 죽을 저으며 생각했다. 어차피 죽이 완성되면 방으로 가져가서 사이드 테이블에 두고 먹을 생각이었다.

‘뭔가 그것 말고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은데….’

깊게 고민에 빠지는데 무언가 번뜩 떠올랐다.

‘같이 눕자는 건가?’

유건과는 이전에 같은 침대에서 잔 적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내 숙소에서 같이 지내기로 하고부터 우리는 침대는 고사하고 서로의 방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 행동은 유건이 내 숙소에서 지내게 되어도 부담 주지 않겠다는 말을 지키는 것일 터였다. 안거나 안마를 해 주는 일이 있더라도 다른 의도가 담기지 않은 담백한 접촉뿐이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 그 선이 아슬아슬한 수준을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병간호를 해야 돼서 어쩔 수 없이 그의 방에 같이 있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저 같은 방에 있는 것뿐인데도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유건이 샤워하는 사이, 죽이 완성돼 그의 방으로 가져갔다. 침대 옆에 있는 사이드 테이블에 놓고 나도 허기가 져 먼저 맛봤다.

참기름과 간장밖에 넣지 않았는데도 배고파서 그런지 먹을 만했다. 샤워를 마친 유건이 내가 먹는 모습을 보고 의아해하며 걸어왔다.

“밥 안 먹고 들어왔어?”

“어.”

“근데 왜 생일인데 죽을 먹어. 내가 지금이라도 해 줄게.”

“아니야. 그냥 앉아.”

“생일 이렇게 지나가면 안 되는데.”

“내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계속해서 뭔가를 하겠다는 유건을 억지로 붙들어 앉혔다. 그는 죽을 먹으면서도 마음에 걸리는 듯 불편해했지만, 어느새 두 그릇째 먹어 치웠다.

‘배고팠나 보네.’

그릇의 바닥이 보일 때쯤 오늘 할 일에 대해 보고했다.

“이거 먹고 가이딩 할 거야.”

“나 가이딩 안 부족한데?”

“너 심장 쪽에 파장 뭉치는 거 내가 쇼크 준 것 때문에 후유증 나타나는 거라…. 내 파장을 조금씩 넣어서 치료해야거든.”

“그래?”

유건은 남 일처럼 심상한 어조로 답했다. 아픈 게 나 때문이었냐고 따지고 들 것 같지는 않았지만, 너무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나만 같은 공간에 있는 게 신경 쓰이나?’

약간 기분이 이상해지려 하는데 유건이 숟가락질을 멈추며 고개를 들었다.

“아, 잠깐. 그럼 나랑 오늘 이 방에서 잔다는 거야?”

“잠이라기보단… 밤새 간호한다는 거지.”

“그래. 그렇지.”

유건은 오해해서 부끄럽다는 듯이 재빠르게 말을 고쳤다. 조금 전 같이 있어 달라는 말이 떠올라서 나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러다 졸리면 뭐 자도 되고….”

“같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