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99/131)

“저 녀석 그냥 센터에 고발해서 항생제를 뺏으면….”

“제가 순순히 잡힐 것 같습니까? 그리고. 센터에 밝혀지고 나서 인간이 되면 구사월 가이드한테 무슨 소용입니까? 지금 센터에 소속된 각성자여서 크리먼인 게 더 곤혹스러운 상황 아닌가요?”

방금의 대화로 흐름이 좀 이상하게 뒤바뀌었다. 이안이 내가 하려는 말을 대신해 주는 것이 순간 아군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안과 나는 거래를 하기로 했고 유건은 반대하는 입장이니 현재 상황에서 유건이 내게 악역이었다.

당연히 그가 나를 걱정해서 따라왔고 생각하는 마음은 알지만 나는 어떻게든 이 거래를 성사시킬 생각이었다.

유건이 이 장소에 있는 것이 난처했다.

“구사월 가이드와 이미 이야기가 끝난 것이지만 한 번 더 설명하겠습니다. 저는 항생제를 조건으로 핵이 없어질 때까지 구사월 가이드의 피를 흡혈하기로 했습니다. 그 외에 어떠한 위험도 없을 겁니다. 보다시피 흡혈 중에 마취제도 사용하지 않고 있고요.”

이안은 유건이 이렇게 화내고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다소 억울하다는 어조였다.

“그리고 진행 상황에 따라 항생제는 분할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항생제는 적정량을 한 번에 마시지 않으면 아무런 효능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결국에는 제 핵이 사라져야 구사월 가이드도 원하는 걸 얻을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거래가 피와 항생제 외에 다른 위험 요소가 없다는 걸 유건에게 알리려 하는 의도 같지만, 이 말이 과연 통할까….

조금 전 말했던 것처럼 유건은 그냥 내 피를 이안에게 주는 걸 싫어했다. 이 거래가 공정하든 아니든 거래 조건부터 그에게는 발작 요소였다.

유건이 또 난리를 칠까 봐 그를 주시하는데, 유건은 의외로 인상만 굳히고 있었다.

흘깃 쳐다보는 시선은 마치 나를 골칫덩이로 보는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여길 왜 따라와선….’

내 입장에선 그가 골칫거리였다. 지금 한시가 바쁜 상황에서 이렇게 허비하는 시간이 아까웠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

그가 고민하는 동안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고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가 허락하지 않더라도 나는 어떻게든 이안과 거래할 생각이었지만, 유건이 내심 마음에 걸렸는데 다행이었다.

“넌 항상 인간이 되기를 바라 왔으니까…. 나한테 당연히 막을 자격이 없는 거 알아.”

유건이 주먹을 꽉 쥐며 속삭이듯 말했다. 마치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자신감 없고 회한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러다 돌연 형형한 눈빛으로 이안을 쏘아 봤다.

“대신, 정 피를 줘야겠다면 내 앞에서 해.”

“뭐?”

가장 먼저 내가 놀라서 되물었다.

“괜찮지?”

“네, 뭐. 좋으실 대로.”

이안은 내게 상의도 없이 고개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네가 여기 있는 건 무슨 상관이….”

“왜 상관이 없어. 넌 항생제만 걸려 있으면 너무 무모하게 행동하잖아. 내가 옆에서 선 안 넘게 지킬 거야. 나도 많이 참았어. 더 이상 나 제외하지 마.”

“하…. 진짜.”

유건은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강경하게 말했다. 그가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나 못지않기에 지금껏 그를 따돌리는 선택을 한 거였다.

그에게 숨기던 것이 모두 밝혀진 시점에서는 이제 별다른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건이 날 진심으로 위하는 걸 알기에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럼 다시 흡혈을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침묵으로 인해 나 또한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지, 이안이 다시 베드로 다가왔다. 유건이 오기 전처럼 한 손으로 내 턱을 그러쥐고 목에 입을 대려는 순간이었다.

“잠깐. 뭐 하는 거야. 손 안 떼?”

“예?”

유건은 시작과 동시에 이안의 손을 쳐 냈다.

“어딜 마시려는 건데!”

“목이요.”

“목은 안 돼. 팔에서 마셔. 목에서만 피 나오는 거 아니잖아!”

“…….”

그 이후에는 더욱 갈수록 가관이었다. 유건의 선은 확연히 주관적이고 얄팍했다.

혀는 쓰지 말라느니, 애가 너무 아파하지 않냐느니, 변태 자식 무슨 생각을 하면서 흡혈을 하는 거냐며 나중에는 보이지도 않는 이안의 생각까지 트집을 잡았다.

그 정도 했으면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역시 여기에서 가장 또라이인 이안은 그 트집을 웃는 낯으로 받아들였다.

사람의 피를 마시면 진통제 효과가 있다며 할 것 없으면 내게 피라도 주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분명 내가 듣기엔 농담 같았는데 유건은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질색하자 유건이 떼를 쓰듯 말했다.

“각인 때문이라면 상관없잖아. 어차피 이미 마셨으니까.”

“각인이요? 둘이 각인하셨습니까? 혹시 크리먼의 각인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 덕분에 이안에게 각인 사실을 알릴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어이없게 밝혀졌다. 오랫동안 크리먼에 대해 연구해 온 이안은 각인이 무엇인지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세상에! 그럼 더 효과가 좋을 겁니다. 속는 셈 치고 한입 마셔 보시죠. 훨씬 괜찮을 겁니다.”

이안은 유건과 나의 관계를 재밌어하는 것 같았다. 아니, 눈이 너무 반짝거려 불쾌할 지경이었다. 희귀한 실험체를 눈앞에 둔 이안은 지금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

결국 유건의 피를 마시며 이안에게 피를 내주게 됐다. 이안의 말이 아예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유건의 피를 마시자 통증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었다.

한 가지 거슬리는 점은 금단 증상이 있는 중에 유건의 피를 마셔서 각인 효과가 심해졌는지, 유건의 피를 마시면 흥분감이 드는 것이다.

원래도 그런 고양감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참지 못할 정도로 숨이 거칠어지고 열이 오르진 않았었다. 숲에서는 너무 오랜만에 유건의 피를 마셔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뿐만이 아니었다.

앞으로도 그의 피를 마실 때마다 이런 느낌이 따라올 것 같아 유건의 피를 마시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한결 형이랑은 정확히 몇 시에 만나기로 했어?”

“5시.”

우리는 지한의 차를 타고 센터로 이동 중이었다. 시간은 막 4시를 지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일로 시간이 지체되어서인지 오늘 이안은 피를 충분히 흡혈하지 못했다. 다음에 오늘 못 마신 만큼 채우기로 하고 급하게 자리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유건은 연구실을 나서기 전 잠깐 지한과 함께 먼저 가 있으라고 하며 이안과 대화를 나눴다. 무슨 얘기를 했냐고 물어봤지만 말해 주지 않았다.

이안이 우리 거래에 피해가 갈 말은 해 주지 않았을 것 같아 나도 캐묻지 않았다. 항생제에만 집중할 생각이었다.

“좀 빠듯하겠네. 다음에 올 때는 굳이 한결 형 끼우지 말고 나랑 나가. 내가 빼 줄 테니까.”

“네가 무슨 수로.”

“방법은 원래 나한테도 있었어. 내키지 않아서 말 안 한 것뿐이지.”

유건은 이제 와서 그게 뭐 별거냐는 태도였다. 그는 원래 내가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걸 알기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갈아입고 갈 거지? 내가 네 숙소 들러서 옷 가지고 나올게. 내 숙소 가서 갈아입자.”

“…그래.”

확실히 같이 움직이니 순조롭긴 했다. 내가 함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처지가 아니어서 유건이 더욱 도움이 됐다.

지한은 올 때처럼 숲의 입구에 우리를 내려 줬다. 비밀 통로를 통해 센터로 들어가 유건은 GS동 기숙사로 향했고, 나는 기숙사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유건을 기다렸다.

얼마 후 무사히 유건이 쇼핑백에 내 옷을 챙겨서 나왔다. 그의 숙소로 이동해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곧바로 나왔다.

시간이 하도 촉박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로비로 내려가서 한결이 도착했을 때, 매일 그가 마중 나왔으니까 오늘은 내가 기다리고 있었다고 할 생각이었다.

“어… 잠깐.”

유건은 내 뒤를 아무렇지 않게 따라 나오다가 멈춰 섰다.

“뭐야.”

유건은 약간 인상을 쓰더니 입술을 깨물며 뭔가 심각한 표정이었다.

“왜?”

“나 못 데려다줄 것 같아. 조심히 다녀와.”

유건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며 어정쩡한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급한 일이라도 생각났나.’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한시가 바쁜 상황이었다. 그를 기다려줄 시간이 없었다.

“그래, 그럼.”

나는 주저 없이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닫기 버튼을 눌렀다. 천천히 문이 닫히는데, 그 잠깐 사이에 숙소로 향하는 유건의 발걸음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문이 닫히고 난 후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유건이 평소와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달랐다.

대화 중간중간 딴생각을 하는 것처럼 멍한 표정이었고 정신이 없어 보였다. 상황이 급박하게 흘러갔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뭔가 내가 빠뜨린 게 있는 것 같은데….

‘아. 어디가 아픈가?’

문득 오전에 내가 숲속에서 심장에 직접적으로 파장을 주입해 유건을 기절시킨 것이 떠올랐다.

유건이 지하 연구실에 오자마자 이안을 팼고, 워낙 씩씩해 보여서 잊고 있었다. 정신도 금방 든 것 같아서 괜찮은 줄 알았다.

‘애초에 어떻게 이렇게 빨리 정신을 차리고 나를 쫓아올 수 있었지?’

「AGS구사월: 백유건. 어디 아파?」

유건에게 곧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전화를 걸려는 순간이었다.

띵, 하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사월아.”

당연히 1층일 줄 알고 내리려는데 눈앞에 보이는 사람은 한결이었다. 고개를 올려 층수를 확인해 보니 48층. 48층은 한결의 숙소가 있는 층이었다.

갑작스러운 유건의 행동에 정신이 팔려 층도 누르지 않았던 것이다.

***

엘리베이터는 1층에서 올라왔기에 원래대로 한결의 숙소 앞에서 기다리려고 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중간에 유건이 사는 층에서 멈췄으니 한결이 의심을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는 그 말에 대해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어땠어? 나는 재밌었는데.”

“저도 좋았어요.”

그길로 한결과 함께 나와 에밀리 친구의 병원에 들렀다가 뮤지컬을 관람했다. 좋아하는 배우가 나와서 안 그래도 기대하던 공연이었다. 하지만 유건에게서 좀처럼 답장이 오지 않아서 집중하지 못했다.

「AES백유건: 아니. 괜찮아.」

공연이 끝나고 나오자 그때서야 답이 도착해 있었다. 물은 것에만 대답하는 단조로운 메시지였다. 곧바로 어디 아프면 센터 의무실이라도 가라고 답장을 보냈지만, 또다시 한참이나 답이 오지 않았다.

“9시 예약 잡아 놔서 시간 넉넉하겠다.”

“네….”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 나는 휴대폰을 손에 쥐며 메시지가 왔는지 수시로 확인했다. 괜찮다는 말로는 불안감이 잦아들지 않았다.

유건은 몸이 아픈 걸 무디게 받아들이는 버릇이 있었으니. 무슨 일이 있다면 전화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도무지 틈이 안 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