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7/131)

“보다시피 적당량을 한 번에 마시지 못하면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항생제는 핵이 줄어드는 진행도에 따라 분할로 드리겠습니다.”

패닉에 빠지기 전, 다행히 이안이 덤덤한 말투로 해명했다.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쭙잖은 신용을 들먹이느니 확실히 물질적인 것이 오고 가는 게 믿을 만했다. 그게 소량이긴 해도 항생제라면 나로선 환영이었다.

“한 달의 시간을 벌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참고로 한 달 안에 이 항생제를 복제할 생각은 마십시오. 불가능할 겁니다.”

그는 어떠한 가능성도 없다는 듯 단언했다. 특유의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이 얘기를 듣고 곧바로 에밀리의 친구인, 그 의사가 떠오르긴 했다. 이안이 이렇게 말해도 그녀에게 한번 맡겨 볼 생각이지만, 큰 기대를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가 이렇게 선뜻 항생제의 소량을 주는 건 이유가 있으리라.

이안은 항생제가 남아 있는 플라스크를 덮개로 막고 천을 씌워 끈으로 한 번 더 묶었다. 그러곤 내게 건넸다.

“첫날이니까 선불입니다. 첫 거래인만큼 서로 기분 좋게 진행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항생제는 플라스크를 살짝 기울이면 바닥이 보일 정도로 양이 적었다. 선심 쓰듯이 주는 모양새가 보기 아니꼬웠다.

“참 고맙네.”

이 정도면 아마 팔이나 다리 하나쯤 사람이 되다가 다시 크리먼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방금 전 항생제를 마신 크리먼에게 시선을 주었다.

인간이 되다 만 크리먼은 그냥 크리처보다 끔찍한 몰골로 바닥에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이성도 없는 그것은 침을 질질 흘리다가 이안이 지한에게 눈짓하자 홀린 듯이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그럼 이제 베드에 누워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더 짚고 넘어갈 게 있어.”

“뭔가요?”

“그때 당했던 고문은 이제 안 당해 줘. 네가 흡혈 말고 다른 실험을 하려고 하면 바로 우리 거래는 결렬이야.”

“당연하죠. 구사월 가이드께서 거래에 응한다고 하셨으니 저도 굳이 괴롭힐 이유는 없습니다. 그때는 단지 거래를 위한 확인 절차였습니다.”

이안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가증스럽게 말했다.

‘단지 확인 절차라기엔 꽤 즐거운 표정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생각해 온 다른 조건도 덧붙였다.

“그리고 어떤 약물도 투여 안 해.”

베드 옆에 놓인 주사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 외에 마치 수술실에서 볼 법한 날카로운 도구들이 거북스러웠다.

“피를 마시는 건 이로 깨물기만 하면 되는데 이것들이 대체 왜 필요하지?”

“아, 이건 치우는 걸 깜빡했네요.”

이안은 자신의 실수라는 듯 날카로운 도구들을 멀리 치웠다. 내가 보기엔 피를 마시기 전, 다른 실험을 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 같았다.

“근데 마취제도 맞지 않으실 겁니까?

“어.”

“그럼 구사월 가이드가 힘들 텐데요? 한 달 안에 끝내야 해서 하루 흡혈량 이상을 섭취할 겁니다. 그리고 오늘은 구사월 가이드의 피가 어느 정도 효과를 줄지 모르니 몸이 흡혈을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테스트도 할 겁니다.”

“됐어. 그건 내 문제야.”

스스로 상처를 입히는 짓도 했었고, 이안 때문에 산 채로 배가 뚫리는 일도 겪어 봤다. 고통을 참는 건 이골이 난 상태다.

여기는 적들이 즐비해 있으니 불확실한 위험 요소를 최대한 줄일 생각이었다.

“좋습니다. 저도 구사월 가이드가 힘없이 늘어져 있는 것보다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것이 좋거든요. 부위는 어디로 하시겠습니까?”

“가장 피 많이 나오는 데 물어.”

마치 음식 재료를 품평하는 듯한 이안의 말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저렇게 한마디 한마디 사람 거슬리게 만드는 것도 재주였다.

이안과 몇 마디나 했다고 벌써 피로감이 몰려왔다. 빨리 해치우고 센터로 돌아가고 싶었다.

“자신 있으십니까?”

그 옆으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이안이 다가왔다. 규현에게 맡기긴 했지만 쓰러져 있는 유건도 걱정됐다. 베드에 누워 천장을 응시하자 강렬한 조명이 직선으로 떨어졌다.

“여기까지 와서 못 할 게 뭐 있어.”

“피가 가장 순환이 많이 되는 곳은 역시 거기죠.”

이안이 얼굴에 스산한 미소가 번졌다. 그의 실험대에 놓여 벌거벗은 듯한 착각이 드는 은밀한 미소였다.

***

“구사월!”

“깨어나셨습니까.”

유건은 일어나자마자 사월을 찾았다. 그러나 그를 맞는 건 생뚱맞은 인물이었다. 규현이 멀거니 서서 그를 내려다봤다.

“네가 왜 여기 있… 읏.”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정신을 뒤흔드는 두통이 찾아왔다. 시야가 어지럽게 돌아가고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인상을 찡그리며 왼쪽 가슴을 감싸자 규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구사월 가이드가 보냈습니다. 백유건 에스퍼는 가이딩으로 인한 쇼크로 쓰러졌고, 여기는 센터 의무실입니다.”

유건 주위에는 기다란 커튼이 쳐져 있었다. 커튼 너머로 희미한 대화 소리가 들렸다.

“구사월은?”

“저도 들은 바는 없지만 뻔한 거 아닙니까?”

규현은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내쉬고는 목소리를 줄였다. 시야는 가렸다고는 하나 주변에 있는 의료진 때문에 말을 아끼는 것 같았다.

기억을 더듬어보자 정신을 아예 잃기 전 흐릿한 사월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조금만 쉬고 있어. 금방 올게.”

사월과 충동적으로 입을 맞췄다. 피를 먹이고 억지로라도 붙들 생각이었는데 중간에 흡혈을 멈춘 것이 실수였다.

키스하는 그 잠깐 사이에 사월이 정신이 든 것이다.

‘어떻게든 참았어야 했는데.’

그녀의 향기와 부드러운 살결, 물기 어린 파장은 언제나 유건을 자극했다. 사월이 매력적인 회색 눈동자이든 번들거리는 크리먼의 검은 수정체든 상관없었다.

좀처럼 틈이 보이지 않던 사월에게 기회를 엿봤고, 찰나의 순간에 먼저 다가간 건 유건이었다. 의지를 배반한 몸뚱어리가 제멋대로 반응했다.

피에 젖은 입술이 그렇게 탐스러워 보일 수 없었다. 그 피가 자신의 피라는 것에도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허겁지겁 그녀의 숨결을 삼키기에 급급했다. 유건의 이성이 조금이나마 돌아온 것은 사월이 손을 움직이던 시점부터였다.

여전히 버거워하는 것 같은데도 유건을 만지며 자극하는 것에 짙은 위화감을 느꼈다. 이 위화감은 이전의 경험으로 인한 학습된 결과였다.

그녀가 유건과 처음 입을 맞췄을 때 어떤 결과가 있었나. 사월은 그날 유건이 정신을 잃을 때까지 피를 마셨다.

그러고선 스스로 크리먼인 걸 상기시키며 페어를 취소하기를 원했다. 그 기억은 그녀가 유건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입을 맞췄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녀는 그동안 뭔가 꿍꿍이가 있을 때마다 유건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가 절대 거절할 수 없다는 걸 다 아는 듯이.

이번에도 그녀가 유건을 떼어 놓기 위해 수는 쓰는 것이라 느껴졌다. 그러나 유건은 그런 예감에도 불구하고 사월을 밀어낼 수 없었다.

아마 다시 그 상황이 오더라도 유건은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머리로는 알면서 항상 그녀와 연관된 건 계획대로 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월과 닿아 있는 이 순간이 지독히도 좋았다. 더욱 안고 싶고 닿고 싶어 안달이 났다.

같이 지내는 동안 눌러 온 욕망이 자제력을 잃고 흘러넘쳤다. 그녀의 입술과 타액이 너무 달아서 도저히 멈춰지지 않았다.

“구…사월. 너….”

“맨날 속지. 바보 같아.”

결국 불길한 예감은 맞아떨어졌고 사월은 또다시 유건을 두고 떠나버렸다.

‘한심한 새끼.’

유건은 자신을 책망하며 팔에 꽂혀 있는 수액을 뽑아냈다. 베드에서 일어나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것처럼 신발을 고쳐 신었다.

“아직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일어난 지 한 시간도 안 됐습니다.”

“비켜.”

“어디 있는 줄은 알고 가려는 겁니까?”

옆에 서 있던 규현이 그를 말렸다. 규현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익숙한 물건을 유건에게 건넸다. 센터 워치였다.

“백유건 에스퍼 워치는 손목에 차고 있는 걸 보니 구사월 가이드 거 같은데. 워치가 여기 있으니 위치 추적도 안 되지 않습니까.”

알고도 자제를 못 한 것은 한심하지만, 유건도 매번 똑같이 당하기만 하는 바보는 아니었다. 이럴 것을 대비해 키스 도중 사월의 목덜미를 쥐며 위치 추적 기능이 있는 도청기를 달아 놨다.

이전에 사용했을 때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휴대폰에 도청기가 정상적으로 동기화되어 사월의 위치가 표시됐다.

“웬만하면 방해하지 마십시오. 어쨌거나 구사월 가이드의 일입니다.”

유건이 뭔가 조작하는 걸 지켜본 규현이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켜. 세 번 말 안 해.”

“정말 막무가내시군요. 구사월 가이드가 나중에 말려 줘서 감사하다고 할 것 같습니까?”

말리는데도 유건이 듣는 척도 하지 않자, 규현이 답답하다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 마치 이 모든 행동이 유건을 위해서라고 말하는 듯한 태도에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너도 원래 이안과 거래하는 걸 반대하는 입장 아니었어?”

“그, 그랬긴 했습니다만… 이렇게 본인이 원한다면 말릴 권한도 없죠.”

규현은 성질을 부리다가 머뭇거렸다.

“아하, 그래?”

이내 유건의 시선을 피하는 걸 보고 유건은 확신했다. 사월의 예상이 들어맞았다고.

규현은 사월의 비밀이 들통나면 한결이 피해를 볼까 봐 숨겨 주는 게 분명했다. 센터를 나갈 기간을 충분히 주고 사건을 해결한다는 것부터 언뜻 사월을 위한 일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는 항상 한결이 있었다.

아마 규현은 사월이 인간이 돼서 돌아온다면 크리먼이란 사실을 묻고 넘어갈 생각도 있을 것이다.

“일이 커져서 캡틴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다면 더 이상 숨겨 주지 않을 겁니다.”

“네가?”

모든 걸 눈치챈 유건은 규현의 허세가 우스웠다.

“같잖은 협박 그만해. 네가 어중간하게 행동해서 구사월이 결국 그 녀석을 찾아간 거니까.”

“그게 무슨….”

“어설프게 우리 위하는 척하지 말라고. 보기 역겨워.”

규현은 센터 각성자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규율과 한결에 대한 동경심을 저울질하다가 자신에게 최대한 죄책감이 덜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 말에 유건은 속았고, 사월은 속지 않았다. 속뜻을 알아채지 못한 자신이 가장 머저리 같았지만, 사월에게 어떠한 가능성을 남겨 준 규현에게 화가 났다.

“이렇게 된 거 너는 네가 지키고 싶은 사람 지켜. 우리가 무슨 짓을 벌이든 철저하게 숨기라고.”

유건이 규현에게만 들리게 귓가에 속닥거렸다.

“어차피 신념이든 나발이든 내팽개친 건 너나 나나 똑같잖아.”

규현은 더 이상 유건을 붙잡을 수 없었다. 시꺼먼 속내를 간파당한 자의 눈엔 불안감이 깃들었다.

유건은 규현이 어쩔 수 없이 그를 도와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 기뻤다. 사월을 위해서라면 이용할 수 있는 건 뭐든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