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96/131)

코너를 돌아 비상등이 깜빡이는 차에 올라타자 지한이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내 옷은 비에 흠뻑 젖은 채였고, 드문드문 붉은 혈액으로 물들어 있었다.

“…유건이 만났어?”

같은 크리먼이니 피의 냄새만으로 누구의 것인지 알아맞힌 듯했다. 유건은 다른 사람들보다 유독 짙은 향기를 냈으니.

“네.”

“지금 어디 있는데?”

“알아서 따돌렸어요.”

지한은 의심되는지 사이드 미러와 백미러로 주변을 살폈다. 유건은 적어도 두 시간은 정신을 못 차릴 것이다. 심하면 여섯 시간까지 걸리겠지.

“가요.”

지한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시간을 확인하고는 출발했다. 이안에게 피를 주고 5시까지는 돌아와야 했다.

‘혹시 다른 데까지 무리가 오진 않겠지….’

악착스럽게 잡고 있던 손길이 떠올라 신경 쓰였다. 적응도가 높아진 탓에 필요 이상으로 파장을 쏟아 내야 했다.

심장에 직접적으로 밀어 넣었으니 심장에 무리가 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정말 이런 부탁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혹여 다른 문제가 생기기라도 할까 봐 도움을 요청했다.

센터에서 내가 크리먼인 걸 아는 또 다른 사람에게. 규현이었다.

「AGS구사월: 성규현 에스퍼. 일단 주말인데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백유건 에스퍼가 석탑에서 센터로 이어진 숲길 쪽에 쓰러져 있는데 혹시 진단원에 데려다주실 수 있습니까? 가이딩으로 인한 쇼크입니다.」

유건의 상태가 피범벅이어서 내 정체를 모르는 각성자에게는 부탁할 수 없었다. 규현이라면 내가 센터를 나갈 때까지 한결에게 내 정체가 밝혀지는 걸 원치 않을 테니 알아서 처리해 주리라.

「AEB성규현: 알겠습니다.」

얼마 안 가 규현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가 내 부탁을 들어주리라곤 생각했지만, 적어도 그런 짓을 벌여 놓고 어딜 가느냐고 한 번쯤은 반박할 줄 알았는데….

하다못해 다음부터는 이런 일로 자기를 부르지 말라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규현은 어떠한 불평불만 없이 알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 답장을 보자 역시 내 판단이 맞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지금 상황에서 유건을 쇼크 상태로 몰고 가면서까지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면, 이안과 거래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규현이라면 이 정도는 쉽게 파악할 것이고, 그러니 내가 이안과 거래해도 말릴 생각이 없는 것이다. 아마 허튼짓하지 말라고 했던 건, 내가 이안을 만나러 가려다 한결에게 들키는 상황을 고려해서 한 말이겠지.

“바빠 보이는데 잠깐만. 이제부터는 이거 써야 돼.”

내 예상이 맞았지만 썩 기쁘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데 지한이 내게 안대를 건넸다. 얼굴이 반쯤 가려질 크기였다.

이안의 거처를 숨겨야 하기에 눈을 가리는 것 같았다.

‘나도 약점 잡힌 입장인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다고….’

“꼭 써야 해요?”

“이안 지시라서.”

“…….”

영 못마땅했지만 일단 안대를 받아 썼다. 이런 사소한 것에 시간을 할애하다가 더 늦어질 수도 있었다.

눈을 가리자 자연히 청각과 촉각이 예민해졌다. 차가 덜커덩거리는 반동에 몸이 긴장하고 부스럭거리는 작은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는지 시간관념까지 흐릿해질 무렵이었다. 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문 열어 줄게, 기다려.”

안대는 차에서 내려서도 유지해야 하는 것 같았다. 덕분에 나는 지한의 팔을 붙든 채 의지하며 걸었다.

“앞에 조심해. 계단이야.”

주위가 울리는 것으로 보아 커다란 크기의 지하 창고 같았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크르릉.” 하고,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여기 크리먼 있어요?”

“어. 쟤네 시험관 안에 있어서 마음대로 못 나오니까 걱정하지 마.”

신발에는 점성 있는 액체가 묻은 듯 끈적거렸다. 부모님의 연구실에도 시험관이 있었는데 그 안에 든 용액이 이런 느낌이었다. 아마 이안도 같은 용액을 사용하는 것 같았다.

그 용액에서 특유의 바닷가를 연상시키는 소금 냄새가 났었다. 그래서 내가 바닷속을 배경으로 꿈을 꿨던 모양이었다.

새삼 무의식이라는 게 참 신기하고 놀랍게 느껴졌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미끄러질까 봐 한 발자국씩 조심스럽게 내딛는데 지한이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들어가서 웬만하면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어떤 짓을 말하는 거예요?”

“이안을 공격한다거나, 그런 거.”

혹시 내가 거래가 아니라 보복이라도 하러 온 줄 아는 건가. 나는 이안이 먼저 허튼수작을 부리지 않는다면 소란을 일으킬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보복하러 왔더라도 이안과 같은 편인 지한의 말을 들어야 할 의무는 없었다. 괜히 그가 주의를 주니 쉽게 피를 주고 싶지 않은 이상한 승부욕마저 들었다.

“왜요? 선배가 이번엔 질 것 같아요?”

내가 조소를 띄우며 빈정거리자 지한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이안을 공격하면 그가 막아설 것이다. 지금 내 주위에 있는 크리먼을 이용해서.

“그런 의미가 아니야. 이미 나도 다 해 봤던 거니까 말해 주는 거야. 그 자식 삶에 별로 미련 없거든.”

“그런 사람이 불사를 원한다고요?”

“걔가 말하기로는 모 아니면 도인 인생이라던데.”

“그게 대체 무슨 소리예요?”

“나도 정확하게는 몰라. 하여튼 이상한 녀석이야.”

지한의 말대로 이안이 이상한 건 한두 번이 아니지만, 그는 아무런 이유 없이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 이유라는 게 일반인의 상식에서 벗어나서 문제지, 항상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확실한 건 쥐어팬다고 항생제를 주지 않는 단 거야. 그래서 나도 끌려다니는 거고.”

이렇게 얘기하는 걸 보니 과거에 지한도 이안에게 반항을 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정신계 에스퍼인 지한이 지능계인 이안에게 무력으로 질 리 없다.

그가 끌려다니는 건 무력이 안 통하고 나처럼 항생제를 원하기 때문이겠지.

또한 지한도 협박으로 시작된 관계인 만큼 이안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많이.

여러 방법을 시도했는데도 통하지 않자 굴복하고 이안과 거래를 하게 된 것이겠지.

그 사실은 내가 이안을 제압하고 항생제를 빼앗을 수 있는 확실한 계획이 있다면 내 편에 설 수도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지한도 내게는 복수할 인물 중 하나이긴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항생제이고 가장 먼저 처벌해야 할 사람은 이안이니 쓸모만 있다면 이용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완전히 척을 져선 안 된다. 다행히 지한은 내게 미안해하는 눈치여서 이 부분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처럼 적당히 눈치 보게 만들면 된다.

“다 왔어.”

대화를 하는 사이 마지막 계단을 끝으로 철컥하고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전과 다른 순풍이 불어왔다.

“오랜만입니다. 구사월 가이드.”

나는 오랜만에 듣는 재수 없는 음성에 안대를 벗었다. 갑작스러운 밝은 빛 때문에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오는 길이 많이 고단하셨나 보네요. 근데 꼴이 영….”

이안은 안경을 벗고 있었다. 빛나는 은발과 문신은 처음 보는 게 아닌데도 눈길을 끌었다.

소독용 장갑을 끼고 핀셋을 쥔 것이 어떤 실험을 하는 중이었던 것 같았다. 그는 나의 행색을 찬찬히 훑어보고는 비위가 상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디 흙바닥이라도 구르셨습니까?”

“사정이 있었어.”

나는 대충 둘러대곤 내부를 둘러봤다. 용도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실험 도구들과 기계가 가장자리에 놓여 있었고 가운데엔 베드가 있었다.

시트는 먼지 한 톨 묻어 있지 않은 것처럼 하얬다. 곰팡이가 덕지덕지 묻어난 낡은 연구실을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깔끔하고 정돈돼 있었다.

“보아하니 구사월 가이드의 강아지한테 허락을 맡고 나온 건 아닌 것 같은데. 혹시 꼬리를 달고 온 건 아니겠죠?”

“알아서 따돌리고 왔어. 그리고 내가 움직이는 데 허락까지 받아야 되나?”

“귀한 S급 가이드 아니십니까.”

이안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장갑을 벗고 개수대에 손을 씻었다. 들어오자마자 무방비하게 뒤를 보여 주니 지한의 주의가 무색하게 공격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런 구사월 가이드가 제 발로 여기까지 찾아와 주니 기분이 썩 괜찮네요.”

그러나 지한이 조종할 수 있는 크리먼은 모두 밖에 있고, 이렇게 경계가 허술한 것이 미심쩍었다. 어쩌면 정말로 이안은 내가 공격하는 것이 두렵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내가 항생제를 가진 그를 쉽게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그 사실이 분하게도 들어맞아서 애써 살기를 억눌러야 했다.

“재수 없는 말 그만하고 본론부터 해.”

말이 길어지면 더 열만 받을 것 같아 대화를 끊어 냈다. 이안이 뱉는 장난기 있는 말들은 항상 뼈가 있어서 신경이 거슬렸다.

“그래요. 저는 그때 말했다시피 당신 피를 원합니다. 제 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요. 그게 조건입니다.”

“그리고?”

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

“그 대가로 항생제를 드리겠습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지?”

이안의 소지품에 묻어 있는 지문을 감식한 결과, 그는 사망자 신분이었다. 그런 만큼 계약서를 작성하더라도 그가 조건을 이행하지 않았을 시, 법적인 처벌을 가할 수 없었다.

또한 그는 이미 센터에 쫓기는 입장이라 수가 틀리면 도망가지 않으리라곤 장담하지 못했다. 그를 신용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안 그래도 구사월 가이드가 의심이 많을 것 같아 제가 생각해 봤는데요.”

이안은 예상했다는 듯이 선뜻 방법을 제시했다.

“이건 그때 보여드린 항생제입니다.”

주머니에서 노란 형광빛 액체가 담긴 플라스크를 꺼냈다. 동시에 이안이 지한에게 눈짓하자, 문을 열고 세뇌당한 크리먼 하나가 들어왔다.

용액의 양은 이전에 봤던 것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이안은 그 크리먼에게 저번에 보여 줬던 것처럼 용액을 먹였다.

이윽고 그때 본 장면이 꿈이 아니라는 듯 그 크리먼은 사람이 됐다.

“키에엑!”

아니, 사람이 되는 듯하다가 다시 크리먼으로 돌아갔다. 나는 내가 본 것이 믿기지 않는 것처럼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왜지? 분명 그때는 사람이 됐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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