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꾸만 거슬리는 위화감의 단서를 찾기 위해 그날 나눴던 대화를 곱씹어 봤다. 돌이켜 보니 규현의 말에는 미세한 변화가 있었다.
그는 내가 크리먼인 알고부터는 ‘님’이란 호칭을 쓰지 않았다. 내 비밀을 숨겨 준 유건에게도.
아마 나와 유건을 한결의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동안 존칭을 쓴 것 같았다. 그의 행동의 이유는 모두 한결에서부터 시작됐다.
“내가 크리먼인 게 밝혀졌을 때 선배가 어떤 선택을 할지 성규현 에스퍼도 확신하지 못하는 거야. 만약 내가 센터에 있는 동안 선배가 알고도 날 숨겨 주거나 돕는다면 선배 역시 처벌받을 테니까. 성규현 에스퍼는 그게 무서워서 나한테 한 달이란 시간까지 주며 센터를 나가라고 한 거라고. 자신을 구해 준 것이 고마워서가 아니라.”
이 모든 행동의 이유를 한결을 향한 규현의 광적인 동경으로 국한하니 이해가 됐다. 규현에게 내가 구해 준 것에 대한 보상은 아마 총으로 쏘지 않았다는 것에서 그쳤을 것이다.
그에게 한결이 내 정체를 알았을 때 내 편이 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만 있었다면 바로 센터에 나를 고발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선배를 신경 쓰는 성규현 에스퍼가 막상 내가 인간이 돼서 돌아오면 어떻게 할까? 선배가 이 사실을 모두 알게 되면 상처받거나 피해를 입을지도 모르는데.”
규현은 내가 인간이 돼도 크리먼인 걸 밝힐 거라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엔 아니었다. 크리먼을 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센터의 규율과 한결에 대한 동경이 거세게 충돌할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센터에 들어오고 싶었던 이유 또한 한결이었으니 결국 한결 쪽으로 추가 기울겠지.
“내가 인간이 되면 충분히 묻고 넘어갈 수 있어. 그러니까 나 더 이상 막지 마.”
유건이 입을 다문 채 노려보기만 했다. 무거운 공기가 우리 사이를 메웠다.
“…네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그가 깊게 숨을 내쉬며 물었다. 내게 다가오던 나무뿌리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무력으로 나를 막으려는 건 포기한 것 같았다.
“당연히….”
“성규현 에스퍼랑 같은 이유야?”
인간이 되기 위해서라고 말하려고 했다. 유건은 듣지 않아도 뻔하다는 듯 내 말을 잘라냈다.
“나는 네가 크리먼이어도 상관없는데… 그냥 형 말고 나 좋아하면 안 돼?”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성규현 에스퍼의 이유는 한결이었다. 내가 인간이 되고 싶은 이유에 한결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궁극적인 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이안과 거래하기로 결심한 건 유건 때문이다. 내 곁에 남을 그가 너무 불쌍하게 느껴져서.
내 옆에서 힘들어할 유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나 선배 안 좋아해.”
“안 좋아하는 사람이 형한테 들킬 것 같을 때마다 그렇게 세상 무너지는 표정을 짓는다고?”
유건은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 빈정거렸다.
“말이 되는 소릴 해. 너 처음 나한테 크리먼인 거 들켰을 때부터 쭉 그랬어. 죽여도 상관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굴면서 형 얘기만 나오면 심각해지는 거. 형한테 비밀 들키면 안 된다는 거 알면서도 옆에서 계속 가이딩 하고 싶어 했잖아. 같이 있고 싶으니까 계속 만나는 거잖아.”
“그게 무슨….”
“아니라면 변명해 봐. 들어 줄 테니까.”
처음에 유건에게 비밀을 들키고 페어 제안까지 받아들인 것은 한결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기인한 게 맞았다.
내가 크리먼이라 그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을 걸 알면서 한결 옆을 서성인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 후에는 아니었다. 한결을 계속 만나는 건 세 번의 데이트 이후에도 남자로 느껴지지 않으면 그가 단념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한결에게 들킬까 봐 두려운 건 유건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성적인 호감 때문이 아니다.
오랫동안 신뢰를 다지고 믿음을 쌓아 온 사람에게 실망감을 안겨 주고 싶지 않은 마음. 그 마음이 더 컸다.
부모님을 잃은 후 유일하게 나를 아껴 주고 돌봐 준 사람이었으니까.
유건의 눈에는 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보였다. 여기서 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면 되는데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만약 인간이 되고 싶은 게 너 때문이라고 말하면… 유건과 나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대로 매듭이 지어지면…. 내가 크리먼이 되든 인간이 되든 함께하게 되는 건가?
“봐. 아무 말 못 하잖아.”
유건은 시간을 줬는데도 내가 아무 말을 않자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유독 시리게 박혔다. 심장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욱신거렸다.
하지만 아직 내가 인간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내가 스스로 그의 발목을 묶어 놓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내 삶에 더욱 깊게 연관될 것 같았다. 견고하게 종속되어 불행을 떠안을 것만 같았다.
“하… 네 마음대로 생각해. 지금 이런 말다툼 할 시간 없어.”
오해를 풀자고 솔직하게 말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차라리 뒤돌아서는 걸 택했다.
“구사월, 가지 마.”
등 뒤로 유건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지 말라고 했어.”
빗소리 때문에 묻힐 법한데도 그의 목소리가 어떤 소리보다 선명하게 들어찼다.
“가지 말라고!”
유건의 고함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하늘이 쪼개질 듯 내려앉는 천둥소리에 새들이 푸드덕거리며 날아올랐다.
거센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나는 왜 안 되는데!”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에는 이제 물기마저 어려 있었다. 입을 악다물며 앞만 보며 걸었다.
인간이 되기 전까지는 그가 언제라도 떠날 수 있게 틈을 만들어 놔야 했다. 그게 내가 유건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를 정말로 위한다면 밀어주지는 못할망정 주저앉히지는 말아야 한다고. 내가 크리먼인 걸 알면서도 숨겨줬다는 걸 들키는 순간 쏟아질 갖은 경멸과 혐오를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쓸데없는 자존심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한결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만큼 절실했다. 두 사람 다 내 일로 희생하는 걸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유건은 어느 순간 나를 더 이상 불러세우지 않았다. 나무줄기도, 뿌리도 바람에 흔들릴 뿐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파장의 흐름이 옅어졌다. 나를 잡으려던 감정의 잔재가 공기 중에 흩어졌다.
“…….”
그 변화는 이 일로 유건이 나를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게 했다. 이번에야말로 멋대로 행동하는 내게 진저리 났을지도 모른다고.
그가 나를 더 이상 찾지 않고, 원하지 않고, 그런 일도 있었지, 하며 가벼운 해프닝으로 생각하고 떠난다면….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유건이 나를 떠난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저릿해지며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운 고통이 찾아왔다. 날붙이에 베인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지고 가정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두려움과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혼란스럽게 뒤섞였다. 서서히 걸음이 멈추고 정적이 흘렀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빗물을 그대로 맞으며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확실한 건 그가 눈에 밟히는 것이 단지 ‘불쌍해서’는 아닌 것 같았다.
그 이유만으로 이 상황이 이렇게 두렵게 느껴질 리 없다. 그가 이번엔 나를 놓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못 견디게 싫었다.
점점 패닉 상태에 빠지는데 미세한 쇠 비린내가 풍겼다. 그 냄새는 점점 더욱 짙어졌다.
풀과 흙냄새로 자욱한 와중에 정확하게 내 신경을 자극하는… 아주 익숙하고 내가 좋아하는… 달콤한 향기였다.
“너… 너, 뭐 하는 거야?”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고 나는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유건의 한쪽 손에는 날카로운 단도가 들려 있었다.
강렬한 색채가 빗물에 씻겨 내려가고 있었다. 그 단도가 지나간 부위는 유건의 손이었다.
“이거로는 부족해?”
“하지 마!”
내가 아연한 표정으로 멈춰 있자, 유건은 제 팔뚝까지 시원하게 그어 버렸다. 동맥이 있는 부위가 손상돼 그의 오른손을 금세 빨갛게 적셨다.
바닥에 떨어진 피가 검붉은 길을 내어 주위가 온통 그의 혈 향으로 가득 찼다. 오랜 기간 그의 피를 ‘식사’하는 걸 참아 온 내게는 파괴적일 정도로 자극적인 향이었다.
급하게 호흡기를 손으로 막아도 소용없었다. 성마른 갈증이 샘솟았다. 내 앞까지 내려온 핏물이 내 발목을 강하게 옥죄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어서 이쪽으로 오라고. 네가 입만 벌리면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수 있다고. 나를 원하지 않았느냐고. 나는 네 거라고.
“이리 와. 구사월.”
유건이 낯선 시선으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빗물이 그의 전신을 흠뻑 적셨지만, 버석하다 느낄 만큼 건조한 시선이었다.
“이런 게 아니야….”
처음 그에게 바랐던 건 피가 유일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유건과 함께하고 싶었던 마음은 이처럼 나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욕망이 득실대는 감각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건 내가 거절하고 싶다고 거절할 수 없는 본능이었다.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도 저절로 다리가 움직였다.
피로 젖은 유건의 오른손이 시선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먼 거리인데도 돋보기로 들여다보는 것처럼 가까이 보였다.
입술을 달싹이며 홀린 듯이 걷다 보니 어느새 그의 앞이었다. 분수처럼 혈액이 터지는 손이 내 턱 아래까지 올라왔다.
“마셔.”
유건의 얼굴에 그동안의 상냥함은 남아 있지 않았다. 처음 내 목을 틀어쥘 때의 잔혹함마저 느껴졌다.
“어서.”
진득하게 파고드는 시선에 질식할 것 같았다. 그의 눈빛이 내 온몸에 똬리를 틀고 그대로 삼켜 버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동시에 이 피를 마셔도 나는 아무런 죄가 없다고 느껴졌다. 어차피 원래부터 내 몫의 피였으니까. 크리먼이 피를 마시는 건 당연하니까. 각인으로 인한 지독한 소유욕과 피에 대한 열망이 들끓었다.
하지만 오늘 유건의 피를 마신다면 그동안 참아 온 것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각인이 끊기지 않는다는 소리다.
게다가 에밀리가 각인을 끊는 것을 도중에 그만두게 되면 증상이 더욱 심해진다고 말했다. 이 피를 마시는 건 내 스스로 목줄을 내어주는 것이다.
그걸 아는데도 오랜만에 맡은 유건의 뜨겁고 달콤한 피의 유혹이 너무 강렬해서 참기가 힘들었다. 그의 상처를 혓바닥으로 파고들어서 당장 그 진득한 혈액을 내 목구멍으로 흘려보내고 싶었다.
실낱같은 이성으로 간신히 욕망을 억누르며 벌벌 떨고 있었다. 그의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에 서서히 웃음기가 스몄다.
“구사월.”
그가 부르는 것이 이렇게 무섭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내 불길한 예감이 맞다는 듯 스산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입 안까지 넣어줘야 해?”
그의 검지가 불시에 내 입술 사이로 파고들었다. 강제로 물게 된 그의 손가락에서 혀끝이 아릴 정도의 단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