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3/131)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당장에라도 문을 박차고 나갈 텐데. 자신이 궁지에 몰렸다고 남들에게까지 피해를 끼친다는 게 생각할수록 이해할 수 없고 소름 끼쳤다.

그 피해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안에게 가는 동안 이 웃기지도 않는 사과를 계속 들어야 하는 게 아닌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다행히 지한은 그 말 이후로 더 말을 얹지 않았다.

지한은 센터의 정문 쪽으로 향하다가 인적인 드문 길가에 나를 내려 줬다.

“만날 장소는 숲 나와서 신호등 앞으로 하자. 어딘지 알지?”

“네.”

이제 지한은 다시 한결의 차를 발레파킹 요원에게 맡길 것이다. 그리고 본인의 차로 정문을 나온 후 비밀 통로로 빠져나온 나와 접선하면 된다.

나는 차에서 내려 문을 닫았다. 의도한 건 아닌데 아직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인지 나도 모르게 문을 세게 닫아 버렸다.

한결의 차는 선팅이 짙어 안에 있는 지한이 어떤 표정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차는 약간 뜸 들이듯 움직이지 않더니 이내 ES동 기숙사를 향했다.

“…역겨운 새끼.”

지한도 지한이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자, 이안이 새삼 얼마나 더 미친놈인지 알 수 있었다.

‘제 욕망을 실현하려고 멀쩡한 사람을 크리먼으로 만들어 끌어들이다니.’

그가 불사가 되는 데 얼마나 진심이고 오랜 기간 계획해 왔는지 알게 됐다.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한 짓도 서슴지 않겠지.

그런 사람을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니 자연스레 입 안이 긴장으로 말랐다. 지한의 말대로 이안이 나와 거래한다고는 했지만 내게 무슨 짓을 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날 고문당한 기억 때문인지 심장 부근이 저릿한 느낌이었다.

“후….”

생각이 길어질수록 용기가 사라질 것 같아 복잡한 상념을 지워 냈다. 공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드넓은 공터를 지나 녹음이 우거진 숲길을 따라 걸었다. 인적이 드물어지고 소음이 멀어질 때쯤 철조망 아래, 의도적으로 가려놓은 듯한 부자연스러운 풀 무더기가 보였다.

풀을 헤치자 딱 성인 남자 한 명이 들어갈 정도의 원형 구멍이 보였다.

그리고 풀 더미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기다란 천이 눈에 들어왔다. 높이가 낮아서 이 구멍을 지나가려면 흙바닥을 무릎걸음으로 지나가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도 옷이 더러워지는 것이 신경 쓰였던 모양이었다.

이미 여러 명이 사용했는지 천은 너저분한 상태였다. 흙바닥보단 나을 것 같아서 나도 최대한 그 위로 무릎을 대며 기어갔다.

천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져 있어 저번에 미끄러진 부분까지도 수월하게 지나올 수 있었다.

위이잉.

구멍을 지나서 몸을 일으키자 곧바로 상공에 드론 모터 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 상록수 뒤로 몸을 숨겼다.

왠지 평소보다 나무 냄새가 짙게 느껴질 무렵이었다. 볼에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 감촉은 착각이 아니었는지 금세 바닥이 젖어 들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젠장….”

드론의 경비 구역을 벗어나려면 꽤 걸어야 했다. 최대한 이파리가 풍성한 나무 아래로 비를 피하며 움직였다.

근래 소나기가 많이 내려서 금방 그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다르게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쿠궁, 쿵!

게다가 천둥 번개까지 치며 한순간 재앙이라도 온 듯 비바람이 몰아쳤다.

쾅! 툭.

속으로 짜증을 내며 뛰어가고 있는데 바로 앞에서 커다란 물체가 떨어졌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고개를 내리자 경비용 드론이 지직거리며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흐르는 전류를 보아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진짜 가지가지 하네.’

혹시나 하는 어떠한 가능성도 남기고 싶지 않아 성질을 부리듯 힘껏 밟았다. 드론은 여러 번 밟았는데도 여전히 전원이 깜빡였다.

생각보다 튼튼하여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크리처화를 개방해서 부술까 고민하고 있는데 전원 빛이 희미해졌다.

그 상태로 두어 번 더 깜빡이더니 완전히 빛을 잃었다.

“후….”

시작부터 일진이 사나웠다. 크게 계획이 꼬인 건 아니지만, 지한의 태도도 그렇고 비가 오는 것도 그렇고 이딴 드론까지 애를 먹이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일대를 경비하던 드론이 망가졌으니 이제 눈치 보지 않고 지나갈 수 있겠다는 거였다. 아직 비가 시야를 가릴 정도로 많이 오지만 더 이상의 장애물은 없었다.

손으로 머리를 가리며 달리기 시작하려는데, 이번엔 어떠한 힘에 이끌려 몸이 당겨졌다.

“……!”

누군가 뒤에서 두 손을 결박하고 입을 막았다.

“읍, 으읍!”

갑작스러운 습격에 몸부림치는데 귀 뒤로 희미한 숨결이 느껴졌다.

“쉬. 가만히 있어.”

익숙한 달콤한 향기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유건이었다.

“이상하네. 이 근처에서 신호가 끊겼는데.”

그리고 먼 곳에서 또 다른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한 명이 아니었다.

“재수도 없지. 하필 번개를 맞고 추락할 게 뭐예요? 5년에 한두 번 이런 일 생긴다던데 번개 피하는 기능 같은 거는 못 넣나?”

“그런 게 가능하겠냐. 벼락이 어디 떨어질 줄 알고 피해.”

“비도 오고 짜증 나네. 어? 저기 있다.”

그들은 방금 떨어진 드론을 수거하러 온 센터 관계자인 것 같았다.

“뭐야? 완전히 망가졌는데?”

“괜히 가지러 왔네.”

“어? 근데 여기 사람 발자국 있어요.”

“누가 작정하고 망가트린 것 같은데?”

“발자국 앞으로 쭉 이어져 있는데요?”

유건에게 들켰다는 생각에 당황하기도 전에 불길한 대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발자국을 따라 걸으며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대로는 우리 둘 다 들킬 것이다. 유건은 상관없지만 나는 지금 외출이 금지된 상황이었다.

같이 나간다던 한결도 옆에 없으니 어디로 나온 거냐며 추궁당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부스럭.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마치 누군가 도망가는 것처럼 부산스럽게 이어졌다.

“저기다!”

그들은 바로 뒤돌아서 추격했다. 유건의 파장 흐름으로 보아 그가 염력으로 나뭇잎을 마찰시킨 것 같았다.

“혹시나 해서 와 있었는데 진짜로 올 줄은 몰랐네. 구사월. 여기가 데이트 장소야?”

어느 정도 사람들이 멀어지자 유건이 웃음기가 묻어난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재미있어서 웃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분노를 담은 파장이 음산하게 퍼지고 있었다.

“한결 형은 어디 있어?”

“…….”

“방해하지 말라며. 네 데이트 상대 어디 있냐고.”

‘얘가 여기 대체 왜 있지?’

순간 위치 추적 기능을 쓴 건가 싶었지만, 위치 추적 기능은 특별할 일이 아니라면 사용해선 안 되는 기능이었다.

특히 그 기능을 사용하면 한결에게 바로 알람이 가기 때문에 유건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대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한결이 저 몰래 나간 걸 알게 되면 일이 커질 테니까.

그리고 유건은 나보다 먼저 여기에 잠복해 있었다. 마치 내가 이쪽으로 올 거라는 걸 예상한 것처럼.

우리 사이 선뜩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도무지 적절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너 이안한테 가려는 거지.”

“…….”

“대답해, 구사월. 날 속이고 그 자식 만나려는 거냐고.”

내가 입을 다물고만 있자 유건이 씨근덕거리며 대답을 재촉했다. 곁눈질로 스치듯 보았을 뿐인데도 눈초리가 살갗이 베일 듯 날카로웠다. 서늘함에 숨이 막혔다.

이렇게 화난 걸 보면 유건은 나를 절대 보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이미 여러 번 내게 이안을 만나지 말라고 말했고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다른 것은 다 괜찮지만 위험한 짓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던 녀석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나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는 크리처화를 개방했다. 팔꿈치로 그의 명치를 힘껏 찍어 눌렀다.

“…큿.”

갑작스럽게 반격을 당한 탓에 그의 힘이 느슨하게 풀렸다. 그 틈을 타 품에서 벗어났다.

“좋게 말할 때 이리 와.”

유건이 금방 정신을 차리고 턱을 치켜들며 교만하게 손짓했다. 주변에 위협적인 파장이 깔려 있었다.

그가 활용할 수 있는 것들이 여기는 너무 많았다. 나무뿌리가 진흙 위로 솟아오르더니 꾸물거리며 내게 기어 왔다.

“너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몸을 옥죌 것 같은 기세로 다가오는 나무뿌리를 피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뒤에서조차 다른 나뭇가지가 내 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숲에서 인도로 나가려면 비좁은 건물 틈을 지나야 했다. 출구가 하나뿐이니 유건이 작정하고 막는다면 도망갈 수 없을 것이다.

빗물로 젖은 유건의 얼굴에서 눈동자만이 기이한 광기로 번들거렸다. 어떻게든 그를 설득해야 했다.

“보내 줘. 이대로 아무것도 못 하고 크리먼인 거 밝혀질 수 없어.”

“네가 인간이 돼도 성규현 에스퍼가 센터에 고발한다고 했잖아. 네가 지금 하는 짓 다 쓸모없는 일이라고.”

유건이 절대 안 된다는 듯이 이를 바득 갈며 말했다.

“성규현 에스퍼가 건 조건 두 가지 기억나?”

나는 규현이 내게 요청한 두 가지 요청을 상기시켰다. 규현의 조건은 겉으로는 어떤 희망도 없는 것처럼 들리지만 곰곰이 돌이켜보면 이상한 점이 있었다.

“센터에서 나갈 것. 그리고 나갈 때까지 선배에게 비밀을 들키지 말 것. 이 두 가지였어. 그게 무슨 의미 같아?”

처음 이상했던 건, 규현이 나를 센터에서 내보내는 데 무려 한 달이나 시간을 준다는 거였다. 어차피 센터에 밝힐 것이라면 바로 고발하는 선택을 하는 게 가장 편할 텐데 대체 왜 내 편의를 봐줄까?

내가 규현이 인질로 잡혔을 때 대신 공격당한 게 고마워서 그런 선택을 한다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그런 이유라고 보기엔 규현은 내가 크리먼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적대감을 보였다.

당장 총으로 쏘지 않은 걸 감사하게 여기라는 듯이 말했으니.

그리고 나갈 때까지 한결에게 크리먼인 걸 들키지 말라는 것 또한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이후에 내가 인간이 되더라도 크리먼인 걸 밝힌다고 했으니 한결은 어차피 내가 크리먼인 걸 알게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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