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2/131)

“…나 내일 선배랑 오전부터 나가.”

“밖에?”

“어.”

아, 하고 그가 짧게 탄식했다.

“에밀리 친구 병원 가서 증빙 서류 떼려고.”

“그것만 하고 와?”

“밥도 먹고 오지.”

“그렇구나….”

순간 울적해지는 표정에 같이 가자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러나 내일은 생일 겸 데이트여서 유건이 끼면 한결이 카운트를 세지 않을지도 몰랐다.

한결과의 어중간한 관계도 모두 청산하는 날이었다. 그날만은 유건을 끼워 줄 수 없었다.

“금방 올게.”

점점 안색이 어두워지는 유건을 달래듯 말했다.

“언제?”

“한 10시쯤?”

“아침에 나가서 밤에 오네….”

그러나 종일 나가 있겠다는 말에 유건의 얼굴에 돌이킬 수 없는 그늘이 졌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나도 뻣뻣하게 굳었다. 한가지 말이 떠오르긴 하는데 과연 이게 그에게 위로가 될지 몰라서 말하길 주저하고 있었다.

“괜찮아. 열두 시 전에 들어오기만 해. 기다리고 있을게.”

그가 마지못해 희미하게 웃었다.

“나 저녁도 먹고 오니까 알아서 잘 챙겨 먹고 있어.”

“응.”

애써 웃어 보이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꼭 주말이라 놀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는 강아지를 두고 하루 종일 밖에서 놀다 온 파렴치한 주인이 된 기분이었다.

유건에게 꼬리와 귀가 있다면 분명 축 늘어져 있으리라. 이렇게 대화가 마무리되면 그가 내내 어설프게 웃어 보이며 괜찮은 척할 것 같아 결국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내 생일 처음이랑 끝에는 너랑 같이 있을 거야.”

그가 시선을 땅으로 떨구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게 너한테 딱히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지만….”

유건이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내가 말하고도 그것이 대단한 영광이라는 줄 알라는 것처럼 들려서 겸연쩍었다.

역시 괜히 말했다 싶을 무렵, 유건이 내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말했다.

“왜 안 좋겠어.”

그의 얼굴에 조금이나마 생기가 돌았다.

“그거면 충분해.”

양심에 찔릴 정도로 화사하게 웃었다. 이런 녀석을 두고 내일 데이트에 이안까지 만나러 가려니 마음이 무거웠다.

나는 애써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그 모습을 외면했다. 피를 빼앗기는 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겠지만, 한결과의 데이트는 이게 마지막이니까.

내일만 지나가면 이제 이런 기념일은 유건과 함께 보낼 수 있었다.

***

숙소에 도착하자 유건이 미리 주문해 놓은 케이크가 도착해 있었다. 그뿐 아니라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모를 송아지 안심 스테이크와 양갈비 구이 등 평소보다 묵직한 음식이 저녁상에 올라왔다.

“이거 너무 과한 거 아니야…?”

“이게 과해? 애플파이도 남았는데?”

가장 위에 머랭을 얹어 토치로 구운 애플파이는 생전 처음 먹어 보는 식감을 선사했다. 배가 불러서 맛만 보려고 했는데 결국 두 조각이나 먹게 됐다.

“그만해. 생일날 배 터져 죽일 작정이야?”

포크를 놓자마자 다른 음식을 내오는 유건을 보며 손사래 쳤다. 유건은 시계를 보더니 그럼 자정에 촛불을 불고 다시 먹자며 그때까지 소화시키라고 말했다.

그러나 결국 소파에 누워 있다가 깜빡 잠이 들어 버렸고, 아침에 다시 눈을 떴을 땐 내 방 침대 위였다. 그는 주말에 별다른 일정이 없는데도 일찌감치 일어나 내 배웅까지 도왔다.

“캡틴이랑 외출하시죠?”

“네.”

경비 에스퍼는 한결이 미리 언질을 준 건지 나를 붙잡지 않았다. 내심 약속 시간을 미리 정해 놔서 그 시간이 아니면 내보내 주지 않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뭘 여기까지 와. 이제 올라가.”

“너 차 타는 것만 보고.”

문제는 유건이었다. 평소와 달리 한결의 차가 멀찌감치 주차된 걸 보고 지척까지 따라오려고 했다.

“선배랑 같이 있는 거 보여 주기 불편해. 선배도 그럴 거야.”

“뭐가 불편해. 매일 보는 얼굴인데.”

“데이트하는 거잖아. 너는 가족들한테 이런 거 들키면 안 불편해?”

어쭙잖은 변명까지 하며 그를 떨어트리려 애를 썼다. 한결이 동생인 유건에게 데이트하는 장면을 보이는 것을 쑥스러워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에 한 말이었다.

“나는 안 불편할 것 같은데.”

그러나 유건은 전혀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저 우기고 싶은 건지 정말로 본인은 불편하지 않은 건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다가오면 안 됐다.

“난 불편해. 방해하지 말고 좀 가라고.”

인상을 팍 쓰며 짜증을 섞어 말하자, 그는 그제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말해 놓고 너무 심하게 말했나 눈치가 보였지만 어제처럼 침울한 표정은 아니었다.

“알았어. 잘 놀다 와.”

유건이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렇다고 밝은 척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생각 하는 거지?

왠지 모를 위화감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정신을 다잡았다. 이럴 시간이 없다. 그를 속이고 나가야 해서 괜히 내가 예민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오늘은 조금이라도 계획에 착오가 생기면 안 되는 날이었다. 나는 시선을 거두곤 뒤돌아서 걸었다. 한결의 차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닫았다.

안에는 이제 얼굴만 봐도 역겨운 새끼가 타고 있었다.

“유건이 계속 쳐다보네.”

지한은 내가 탔는데도 창문 너머로 유건을 응시하며 말했다.

“투시 능력은 없을 텐데.”

태연한 말투는 혹여 들킬까 봐 불안해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저 집요한 시선이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네가 한결이랑 놀러 가는 게 신경 쓰이나 봐. 우리 유건이 불쌍해 죽겠다.”

‘저 사이코패스 새끼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우리 유건이? 미친 건가?’

유건이 들으면 기함할 소리였다. 유건은 그날 이후로 지한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그런데 지한은 우리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친근하게 말했다.

“출발하세요.”

나는 그와 최대한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냉정하게 대꾸했다. 지한은 그런 나를 보고 빙긋이 웃더니 시동을 걸었다.

유건이 점점 시야에서 멀어졌다. 그는 차가 코너를 꺾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주시했다.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심장에 아릿한 감각이 퍼졌다.

오늘만 지나면 한결과 유건 사이에서 이렇게 죄짓는 듯한 느낌을 받지 않아도 된다. 애써 복잡한 심경을 갈무리하며 정면을 주시했다. 일어났을 때만 해도 맑았던 날씨가 흐려 보였다.

양 떼처럼 흩날린 구름이 하늘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왠지 소낙비라도 내릴 것 같은 기분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지한은 이런 날씨를 보고도 아무 생각이 없는 건지 평균 속도보다 느리게 운전했다.

“왜 이안한테 가려고 해?”

게다가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한데 알 수 없는 질문을 했다.

“나는 네가 진짜 이안을 찾아가려고 할 줄 몰랐어.”

‘대체 이런 말을 왜 하지? 기다렸다는 사람이 할 소리인가? 지금 조롱하는 거야?’

나는 어이없어서 말없이 그를 노려봤다. 지한은 말투는 평소와 같았지만, 표정이 미묘하게 달랐다.

입이 웃고 있어 얼핏 웃는 것처럼 보이지만, 눈이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단지 나를 조롱한다기엔 매우 진지한 표정이었다.

“지금이라도 가지 않겠다면 내려 줄게. 그 녀석, 너와 거래하겠다고 했지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사람이잖아.”

문맥상 ‘그 녀석’이란 ‘이안’을 칭하는 것일 터였다. 이안과 함께 범행을 저질렀다기엔 묘한 칭호였다.

“대체 이런 말을 왜 해요?”

나는 짜증이 나서 따지듯 물었다.

“둘 다 내 피 마셔서 불사 되려고 하는 건 똑같잖아요. 왜 이안과는 다른 목적이 있는 것처럼 말하냐고요.”

부분적으로 돌아온 기억 속에서 지한은 죄책감을 느끼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게 너무 이해가 안 가서 혼자 고민했었다.

생각이 깊게 해도 좀처럼 답이 안 나와서 이안과 똑같이 나쁜 놈으로 치부하기로 했다. 그리고 무슨 이유가 있었든 그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지한은 또다시 지금 내가 이안에게 가는 것이 내키지 않는 듯 굴고 있었다. 그의 이중적인 태도를 이번엔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애매모호한 그의 태도가 변수가 될지도 모를 거란 불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니야. 네 피를 원하는 건 이안뿐이지.”

나는 그를 믿을 수 없어 가만히 응시했다.

“지금도 이안의 뜻대로 너를 데려가는 상황에서 웃기지만… 너한테 미안했어. 나도 이안한테 항생제를 빌미로 협박당해서 가담한 거였거든. 이안은 가이드를 습격하려고 나를 크리먼으로 만들었어. 나도 이용당하고 있는 거라고.”

“지금 저랑 장난해요?”

나와 같은 처지라고 말하는 지한에게 순간 눈에 불꽃이 튀었다.

“어떻게 ‘나도’예요? 저는 항생제 얻자고 다른 사람 해치진 않아요. 설마 같이 협박당하는 처지이니 이해해 달라는 건 아니죠?”

나도 물론 내 비밀이 당장 들키는 순간이라면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리라곤 장담하진 못한다. 의도치 않게 크리먼이 된 자들은 이안이 항생제를 가지고 있으니 그에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는 것도 어느 정도 인정했다.

우리에겐 항생제가 인간이 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니까.

하지만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선이 있다. 이안이 납치한 가이드는 단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다.

지한은 그런 이안의 범죄에 직접적으로 가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었다는 듯 말하는 지한의 말은 살인자의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해받지 못하겠지…. 이제 와서 용서를 바라진 않아. 네 피로 이안의 핵이 없어져야 항생제를 받기로 한 거라 이대로 너를 돌려보내도 아마 나는 다시 습격하게 될 테니까. 하지만 네가 누구보다 살았으면 좋겠어. 이건 진심이야.”

“제발 그만 말해요. 토할 것 같으니까.”

순식간에 기분이 시궁창에 처박힌 것처럼 더러워졌다. 이 순간만은 어설프게 나쁜 지한이 이안보다 더 끔찍하게 느껴졌다.

지한은 본래 이런 짓을 꾸밀 정도로 확고한 목표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는 간혹 일관된 입장 없이 그때그때의 정세에 따라 이로운 쪽으로 행동하는 기회주의적 성향을 지녔다.

확고한 원칙적 입장을 지니지 못했으니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경계가 다른 사람보다 흐릴 것이다.

거기에 개인주의적 성향까지 더해져 다른 사람의 피해를 고려하지 못하고 이안의 범죄에 가담하게 된 것 같았다.

“정말 미안해, 사월아…. 나도 인간이 되고 싶었어.”

지금 내게 사과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답답함과 억울함을 토로하고 싶은 것이리라. 마음의 짐마저 덜어 내려는 것이거나.

계속 같은 크리먼이니 이해해 달라는 것처럼 들려서 기분이 나빴다. 만약 정말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면 평생 끌어안고 살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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