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는 포기하고 그의 품에 완전히 힘을 빼고 기대고 있는데 그의 손이 주저하는 것이 느껴졌다. 천을 한 겹 두고 갈등하던 손은 주먹을 쥐며 물러났다. 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며 어깨에 닿은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하…. 체향까지 홀리려 드니까 정신을 못 차리겠네.”
유건이 내 목 부근에 얼굴을 비비며 무언가 억누르듯 내 무릎을 악착스럽게 쥐었다. 목덜미로 습한 열기가 쏟아졌다. 말랑한 입술이 스치듯 닿았다 떨어졌다.
반면 허리에 닿은 손은 아직도 아무에게도 빼앗기기 싫어하는 어린아이처럼 고집스러웠다.
“누가 할 소린데. 네 냄새가 더 심해….”
유건의 체향 때문에 온몸에 달콤한 꿀을 덕지덕지 바른 것 같았다. 그의 피로 지금 당장 한 입만 축일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아니, 한 방울이라도. 아니, 그의 살을 핥으면 비슷한 맛이 나지 않을까. 그의 숨을 삼키면 갈증이 조금이라도 해소되지 않을까.
갖가지 해괴한 생각이 머릿속에 범람했다.
“내가 조금만 자제력이 낮았다면 벌써 피 봤을 거라고.”
나는 혀뿌리 아래 고인 침을 아쉽다는 듯 삼키며 갈증을 달랬다. 유건의 피를 마시는 상상을 하며 입맛을 다시는 건 이제 당연한 수순이었다.
“미쳤나 보다. 이제 그 말도 야하게 들려.”
진짜 갈증이 나서 한 말인데 그는 왠지 다른 의미로 해석한 것 같았다. 단단해진 몸이 느껴져 장난스러운 웃음이 샜다.
“진짜 미친놈…. 무슨 말을 해.”
내가 어이없다는 듯 웃자 그도 따라 웃었다.
***
「AEC강지한 : 세뇌 완료. 내일 몇 시?」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규현이 질병 퇴직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물어서 아는 의사가 도와준다고 말했고, 지한은 아슬아슬하게 하루 전에 ES 기숙사 발레파킹 요원의 세뇌를 완료했다.
「AGS구사월 : 오전 10시요. GS동 기숙사 앞에 차 대놓고 나오지는 마세요.」
「AEC강지한 : 알았어.」
지한과 나눴던 메시지를 훑어보며 마지막으로 빠트린 것이 없는지 살폈다. 그런데 너무 많이 스크롤을 올렸는지 그가 범인인 걸 알기 전 나눴던 대화 내용이 보였다.
「AEC강지한 : 사월아ㅋㅋㅋㅋㅋ 이거 봤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링크)」
「AGS구사월 : ㄴㄴ」
「AEC강지한 : 봐 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웃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AGS구사월 : 귀찮아요」
「AGS구사월 : 밤에 센터 메신저로 메시지 보내지 마세요」
「AEC강지한 : 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거 안 보면 인생의 절반을 손해 보는 거야」
「AGS구사월 : 또 보내면 차단합니다」
「AEC강지한 : 보고 나면 나한테 감사하게 될걸. 오빠 한번 믿어 봐ㅠㅠㅠㅠㅠ」
지한은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각종 웃긴 사진과 동영상을 자주 추천하며 보내곤 했다. 하지만 그런 부류의 개그 코드가 맞지 않아 매번 내게 냉대를 받았다.
그런 사람이 그날 사건 이후로 유건과 나를 볼 땐 웃음기가 뚝 그쳤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는 변함없이 하하 호호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그가 저렇게 철두철미하게 연기할수록 속으로 배알이 꼴렸다.
‘나는 누구 때문에 스스로 센터를 나가야 할 위기에 놓여 있는데. 뻔뻔하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센터를 활개 치고 다니다니.’
그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거슬렸다. 동시에 지한에게 묘한 의문이 생겼다.
‘지한은 어쩌다 이안과 범행을 함께하게 된 거지?’
이안이 내 피를 마셔서 핵을 없애고 싶어 하는 건 알겠다. 아마 지한도 목적의식이 같으니 함께 범행을 꾸몄을 것이다.
‘그런데 지한이 왜?’
나는 지한이 굳이 핵을 없앨 목적으로 사람을 습격할 것 같지 않았다. 그를 너무 좋게 봐서가 아니라, 그런 위험한 범죄까지 저지르며 얻는 이득이 지한에게 그렇게 쓸모 있어 보이지 않았다.
크리먼의 핵은 인간의 심장과도 같다. 그런 핵이 작아지거나 없어지는 게 얼핏 좋아 보일 수는 있지만 그가 굳이 범죄까지 저지르며 얻어 내고자 할지는 의문이었다.
오랜 기간 센터에 복무한 지한은 다른 크리먼보다 정체가 발각되면 곤란한 위치일 텐데.
그리고 그는 정년 퇴임을 하면 조용히 산골짜기에 들어가 살고 싶다고 한 사람이었다. 이안처럼 크리먼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느니 그런 유별난 사상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동안 보아 온 지한의 성격과 그날의 모습이 잘 매치가 되지 않아 찝찝함이 남았다. 그리고 이상한 건 한 가지 더 있었다.
‘지한은 왜 센터에 남았지?’
나는 입막음이 될 테지만 규현은 아니었다. 이번엔 다행히 내가 센터를 나간 후에 지한과 이안을 센터에 넘긴다고 했지만, 만약 모든 것을 고발하는 선택을 했다면 지한은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센터에 잡히는 상황을 겪었을 것이다.
이안은 한 걸음 물러나 위험한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지한은 고작 이안과 나의 연락망 역할 때문에 센터에 남아 있었다. 그 기묘한 위화감 때문에 이안과 지한은 결코 평등한 관계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처럼 약점이라도 잡힌 건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가 크리먼에게 잡혀 공격당할 때도 그는 어딘가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으니.
이안이 시키는 대로 움직일 뿐 지한은 전혀 적극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왜? 문제 있어?”
나와 유건은 캡슐 안이었다. 나는 국현의 가이딩 크리스털을 충전 중이었고 유건은 손바닥 위에 띄운 동전 여러 개를 움직이며 컨트롤 연습을 하고 있었다.
“아니. 이것도 나가면 이제 충전 안 해도 되겠네.”
나는 괜히 딴소리를 하며 말을 돌렸다. 질병 퇴직을 하게 되면 국현의 가이딩 크리스털은 이제 충전하지 않아도 된다.
계약서에 ‘센터에서 복무하는 동안’이라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
“그럼 다시 다 내 거겠네.”
“나가면 이제 크리스털 충전 안 할 건데.”
“하긴, 네 자체가 내 거겠다. 그치.”
“그치는 무슨 그치야. 헛소리하지 마.”
유건은 내가 질병 퇴직으로 센터를 나가는 것을 내심 기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티를 안 내려고 하는 것 같지만 너무 눈에 훤히 보였다.
A 지역에 있는 내 집을 팔고 조금 먼 곳으로 이사하고 싶어 인터넷으로 부동산 정보를 살펴볼 때마다 그는 항상 내 옆에 따라붙었다.
자기는 안방이 넓은 게 좋다느니, 앞에 공원이 있으면 좋겠다느니, 자신의 의견까지 틈틈이 피력했다. 그 모습은 마치 같이 살 신혼집을 찾는다고 착각하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집값은 걱정 말고 마음에 드는 곳으로 고르라는 말을 덧붙이는 걸 보고 확신하게 됐다. ‘얘 정말 진심이구나.’라고.
“너 근데 집에 어떻게 말하려고?”
유건이 나와 같이 센터를 나가려면 A지부 센터장에게 승인을 받아야 한다. A지부 센터장은 바로 유건의 아버지였다.
대대로 명망 높은 에스퍼 가문인 백씨 집안 에스퍼가 가이드를 따라 센터를 나간다고 하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뻔했다.
‘당연히 안 된다고 하겠지.’
그래서 유건이 처음에 나를 따라 나온다고 했을 때도 어차피 안 되겠거니 싶었다.
그러나 유건의 입에서 예상외의 답이 튀어나왔다.
“이미 말했어. 확정된 건 아닌데 그럴 수도 있다고. 나가서 너 잘 챙기라던데?”
“뭐?”
“집도 지역마다 서너 채 있으니까 마음에 드는 곳 가서 살라고 그랬는데 나중에 잠적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그건 안 받는다고 했어.”
“…….”
“봐. 내가 안 되면 되게 한다고 했잖아. 애초에 설득해야 할 일도 없었지만.”
유건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저 집안 사람들을 너무 평범하게 생각한 것 같았다.
백씨 집안 사람들이 내 의견도 묻지 않고 나를 한결과 엮어 결혼 얘기까지 나눈 것이 이제야 떠올랐다. 이제 보니 그들은 한결이 아니라도 그저 백씨 집안 에스퍼와 내가 결혼하길 바라는 것 같았다.
나와 결혼해서 등급 높은 에스퍼를 낳게 하는 게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일 테니까. 이미 백씨 집안 에스퍼의 명망은 한결이 충분히 높여 주고 있으니.
거기까지 생각까지 닿으니 유건과 나가는 것이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당연히 유건과는 그런 관계가 아니고 그들이 김칫국을 퍼마시는 것이지만, 저들끼리 나를 두고 그런 기대를 하는 게 영 불쾌하게 느껴졌다.
“이런 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너희 가문 좀 이상해.”
유건이 미소를 머금고 있다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선배한테 들었어. 무슨 나를 놓고 결혼해서 애를 낳으라는 말까지 했다면서.”
그의 가족을 너무 대놓고 험담한 것 같아 눈치가 보이지만 사실이었다.
‘지금은 유건과 나를 두고 어떤 소설을 쓰고 있는 걸까? 무슨 관계까지 생각하는 거야? 낳을 아이의 성별을 추측하며 이름까지 짓고 있는 거 아니야?’
생각할수록 기분 나쁘고 인상이 찌푸려졌다. 너무 소름 돋았다.
“나도 알아. 근데 우리 부모님은 아니야.”
유건은 가문과 자기 가족 사이에 선을 긋듯 말했다.
“가문 사람들이 너랑 어떻게든 엮어 보려고 헛소리하긴 하는데 아빠랑 엄마는 너 잘 챙기라고만 했어.”
그 말을 들으니 괜히 오해한 것 같아 양심에 찔렸다.
“정들면 사귀는 것도 엄마 아빠는 찬성이라고 덧붙이긴 했지만….”
“…….”
“걱정 마. 너랑 내가 그럴 일은 없잖아.”
멋쩍음에 허공을 보던 시선이 자연히 유건의 얼굴을 향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유건답지 않게 단호한 어투였다.
절대 그런 일은 생기면 안 된다는 듯이 못 박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형이라면 몰라도….”
“뭐라고?”
“아니야. 못 들었으면 됐어.”
희미하게 중얼거린 말이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순간 낯빛이 어두워졌었던 것 같았는데….’
이 주제가 불편해져서 다시 말을 꺼내기도 뭐했다. 유건이 나름대로 대처를 잘했고, 그와 내가 아무 관계도 아닌 게 사실인데 마음이 괜히 술렁거렸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거리를 두겠다는 말은 아직 유효한 것 같았다. 내 옆에 있고 싶은 것과는 별개로 그는 나와 깊게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 사이에는 아직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했다.
“내일 뭐 할까?”
“글쎄.”
나는 괜히 심란해져서 딴생각을 하며 성의 없이 답했다.
“밖에 못 나가니까 케이크라도 사다 파티할까?”
그가 얼굴을 들이밀며 밝은 미소로 물었다. 나는 순간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사고가 멈췄다.
‘뭐지. 얘는 내 생일을 말한 적 없는데 어떻게 아는 거지?’
유건이 내 생일을 알고 있었다. 한결과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둘러대고 나가려고 했는데 그는 생일을 당연히 자기와 보내는 줄 아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