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해. 맛있지.”
“알면서 왜 물어봐.”
이미 입에 묻히고 먹는 모습을 보였으니 시치미를 떼 봤자 조롱만 당할 것이다. 그에게 시선을 떼고 다시 빵을 입에 물었다.
“형이랑 밥 맛있게 먹었어?”
“몰라.”
“나랑 먹을 때보다 맛있었어?”
“어.”
유건은 내가 기분이 풀린 줄 안 건지 센터에서 했던 질문을 재차 물었다. 센터에서 묵언 시위를 했기에 이 단순한 물음의 대답을 유건은 지금에 와서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답은 조금도 성의가 없었다. 아니, 일부러 나는 못되게 말하고 있었다.
“빵은? 나보다 맛있어?”
“짜증 나니까 저리 가.”
점점 다가오며 집요하게 쳐다보는 눈길에 몸을 반대로 돌렸다. 유건은 아예 소파에서 내려와 내 몸을 제 다리 사이에 가두며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게 막았다.
“입맛에 맞나 보네. 다행이다.”
“왜 이렇게 먹고 있는데 치대.”
“어쩌냐. 이제 너 짜증 내는 것도 예뻐 보여.”
“느끼하게 굴지 마.”
등 뒤로 따듯한 체온이 느껴졌다. 유건은 내 짜증에도 되려 더 가깝게 몸을 붙이며 어깨 위로 턱을 기댔다. 허리를 감싼 두 팔은 단단하고 견고했다.
언젠가부터 내 까탈이 그에게 조금의 타격도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뭐라든 저 좋을 대로 듣는 경지에 이른 것처럼 보였다.
실실 웃고 있는 소리에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살짝 틀어 노려보자, 투명하고 맑은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네가 뭘 해도 귀엽게 보일 것 같아. 나한테 무슨 약 먹인 거 아니야?”
능글거리는 모습이 진짜 약 먹은 놈 같았다. 유건은 센터에서는 그나마 거리를 유지하는데 집에만 오면 무장 해제된 것처럼 달라붙었다. 부담을 주지 않겠다더니 순 거짓말쟁이였다.
그렇다고 콕 집어 지적하기엔 애매한 행동들이라서 떠보듯 물었다.
“너 원래 이래?”
“뭐가?”
“그러니까… 원래 친구들한테도 이렇게 치대냐고.”
그가 원래 애교 많은 성격인 건 알았다. 팀원들에게도 한결에게도 곧잘 엉겨 붙는 걸 봤으니까. 그래서 더 뭐라고 하기 모호했다.
“응.”
역시나 그는 싱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도 이건 과하지 않나…. 유건의 머리칼이 귓등을 간지럽혔다.
그의 숨소리가 너무 가까이서 들려서 신경 쓰였다. 조금이라도 조심성 없이 고개를 돌렸다간 입술이 맞닿을 것 같았다.
목이 뻣뻣해지고 그의 손바닥이 닿은 배에 힘이 들어갔다. 그 자그마한 움직임을 눈치챘는지 유건이 웃음기를 머금으며 말했다.
“근데 이렇게 다리 사이에 끼워서 안고 있진 않지. 친구끼리 이러면 오해해.”
“나한테는 왜 하는데.”
그러니까 이렇게 가까운 건 역시 이상했다. 그도 그걸 인지하고 있었다.
“가이딩 때문에?”
“그거 안 하기로 했잖아.”
“네가 금단 현상을 겪고 있어서?”
“네가 옆에 있으면 더 갈증 나거든?”
“안고 있으면 편안하니까? 포옹은 심리적으로 위축감을 상당 부분 완화해 주고 우울증을 감소시키니까?”
“후….”
나는 반박을 포기하고 한숨이 쉬었다. 그의 말을 들을수록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건이 키들키들 웃었다. 진심이라곤 털끝만도 없었으며 물어봤자 의미 없는 대화였다.
“뭐가 듣고 싶은데? 네가 원하는 대로 말해 줄게.”
“됐어. 괜히 물어본 것 같아.”
유건은 다시 내 어깨에 몸을 기댔다. 그의 심장 소리가 등을 타고 전해졌다. 갈증을 제외하면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는 건 맞았다.
그와 가까이 있으면 편안해지다 못해 따뜻한 물 안에 있는 것처럼 노곤해졌다. 종종 하루 종일 안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모든 게 각인으로 하여금 몸이 원하는 것이겠지만.
“너는 너무 나를 경계해.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자. 나도 그럴 거야.”
“너 방금 말… 바람둥이 같았어.”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뭐.”
나를 탓하는 듯한 말투에 감정이 상하려는데 그가 싱긋 웃으며 속삭였다.
“나 때문이지. 네 옆에 오래 붙어 있고 싶으니까.”
유건은 져 주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가 다 받아 주니 내가 더 쌀쌀맞게 말하게 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유건에게도 찝찝한 구석이 있긴 했다. 그동안 가이딩을 빌미로 내 옆에 있으려고 한 건 알겠다. 그건 그 당시에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근데 거리를 두고 싶다고 한 건 앞뒤가 안 맞지 않나? 그건 진심 같아 보였는데….’
의문을 해소하려고 묻다 보면 관계를 정의해야 할 것 같아서 꾹 참아 냈다. 하고 싶었던 말이 입 안에 맴돌다 사라졌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내버려 두면 자연히 사라질 마음일 수도 있다. 내가 더 이상 그를 밀어낼 수 없는 것과 유건이 내 옆에 있고 싶어 하는 마음은 어느 정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가 불쌍해서 모진 말을 못 하게 됐고, 그는 처음부터 나를 불쌍하게 여겼으니까. 이안에게 쫓기고 심한 짓까지 당한 나를 내버려 둘 수 없었겠지.
이전의 나라면 그 마음을 불쾌하게 여겼을 테지만 이제는 싫지 않았다. 유대를 기초한 연민은 참을 만한 편이고, 그의 온기가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우리가 서로를 불쌍히 여겨 이토록 끓는 것이라면 식는 데까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서로 핥아 주며 잠시나마 위로하는 것이라 여기면 이 순간들이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다리 주물러 줄게.”
빵을 우물거리며 상념에 잠기는데 유건이 내 다리를 자기 허벅지에 올려놓고 꾹꾹 눌렀다. 센터에서 높은 힐을 신고 다니느라 뭉친 종아리 근육을 풀어 주는 행위였다.
처음에는 힘 조절을 못 하더니 몇 번 해 보고는 감을 잡았다며 일과처럼 매일 내 몸을 주물렀다.
이런 곰살맞은 행동을 보면 유건은 어머니에게 꽤 사랑받는 아들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자기 얘기도 잘하고 항상 밝은 모습으로 치대니 어머니 입장에서 얼마나 귀여울까 뭐, 그런 생각….
“파장 흘러나온다.”
“…….”
물론 내가 어머니는 아니니 그의 접촉이 단지 귀여움으로 끝나진 않았다. 각인 때문인지 나는 언젠가부터 유건의 접촉에 쉽게 자제력을 잃었다.
파장 컨트롤이 어이없을 정도로 허망하게 무너진다는 말이다.
“참아…. 각인 때문에 그래.”
아카데미에서 가이드 교육을 받은 이후 이렇게까지 컨트롤이 무너진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디 가서 말도 못 한다. 가이드가 종아리 좀 주물러졌다고 파장이 새어 나오다니.
약간 머쓱해하며 말하자, 그가 티브이에 나오는 고대 건축물과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보며 느긋하게 웃었다.
“파장 흘려 주면 나야 좋지.”
그 웃음소리가 등을 타고 이어져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심장 박동이 빨라진 걸 들킬까 몸을 앞으로 슬쩍 빼내려는데, 유건이 어림도 없다는 듯 내 허리를 다시 끌어왔다.
“…….”
“가만히 있어 봐. 너 다리 길어서 멀리 안 닿는단 말이야.”
유건의 질책에도 꼼질거리며 앞으로 이동하자 종아리를 주무르던 손길이 허벅지를 타고 올라왔다. 하필 오늘은 실내용 원피스를 입고 있어서 그의 손이 허벅지에 위치해도 무리가 없었다.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에 연한 살이 쥐어지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유건은 뭉친 근육인 줄 안 건지 살짝 힘을 주어 눌러 왔다.
힐끗 쳐다보자 시선은 여전히 티브이를 향한 채였다. 집중한 탓인지 그의 손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깊게 파고들었다. 특히 기다란 중지가 원피스를 해치고 닿으면 안 될 부위까지 위협적으로 기어 올라왔다.
이걸 이제 그만하라고 말해야 하는데 도무지 말문이 안 틔었다. 근육을 주무르는 손길이 시원하면서도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기분이 녹진해져 나도 모른 척하며 그의 손길을 받아 내고 있었다.
“읏….”
결국 그의 손끝이 닿은 살갗에 옅은 자국이 남았다. 내 앓는 소리에 그가 티브이를 보다가 고개를 내렸다. 붉어진 자국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손을 뗐다.
“아니, 이거 왜 이래. 아팠어?”
“아니.”
아팠다기보다는 자극적이었다. 하얀 허벅지가 마디가 굵은 손아귀에 한 손에 잡히는 게 신기하면서도 이질적이었다. 핏줄이 도드라진 손등이 시선을 끌었다.
누가 약이라도 먹인 것처럼 몸이 평소보다 예민했고 그의 신체가 눈에 들어왔다.
‘파장이 내 의지대로 안되는 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왜 이렇게 싫지 않지?’
이제 빵도 다 먹었으니 떨어지라고 하며 방으로 들어가면 되는데 그럴 마음이 안 드는 게 가장 문제였다. 유건 몰래 열감을 해소하듯 희미한 숨을 내쉬었다. 얼굴이 달아오른 게 스스로도 느껴져 부끄러웠다.
잠잠한 태도에 그가 곁눈질로 내 표정을 살폈다. 시선이 짙어지는가 하더니 이윽고 자국이 남은 부위에 다시 손가락이 닿았다.
“사월아, 그거 알아?”
“…뭐?”
내가 유건의 손을 바라보며 침을 삼키자, 자못 은밀한 어조로 물었다.
“너한테 은은한 비 냄새 난다. 파장 흘릴 땐 이게 더 짙어져.”
유건은 이전보다 힘을 덜어 내며 부드럽게 쥐었다. 안마보다는 이상야릇하게 느껴지는 끈적한 손길이었다.
“처음 만날 때는 안개비처럼 자욱한 느낌이었는데 요새는 부슬거리는 비 생각나.”
“그게… 뭔데.”
손장난을 치는 것도 같은 장난스러운 손놀림인데도 울렁이는 느낌이 들었다. 귓전에 퍼지는 그의 목소리가 뜨거운 숨을 재촉했다.
“축축한 향 난다고. 그게 엄청 야해.”
그의 파장까지 겹쳐 참으려 해 봐도 더운 숨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기분을 조절해서 파장 제어가 가능한 녀석인데, 일부러 내버려 두는 것 같았다.
오금이 저리는 듯한 느낌에 그의 허벅지에서 다리를 끌어와 오므렸다. 그러나 이미 안쪽에 자리한 그의 손가락이 딸려와 의도치 않게 다리 사이에 가두게 됐다.
뜨겁고 단단한 감촉이 좋아서 다리를 움직이며 더욱 마찰시켰다. 그의 엄지가 바깥으로 나오더니 둥그런 과일을 쥐는 것처럼 탐욕스럽게 움켜잡았다.
흠칫거리며 가슴이 부풀었다가 야트막한 숨을 내쉬었다. 유건이 말하고 있는데 좀처럼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웅웅거리는 느낌이었다. 마치 물속에서 바깥의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유건은 한동안 본래의 목적을 잃고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나를 만졌다. 유연하게 어루만지다가도 진득하게 파고드는 손길에 배꼽 아래가 저릿했다.
입술 사이로 비음이 새어 나올 뻔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아 다리 사이가 점점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