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처 피를 생으로 먹는 크리먼이 있는 반면, 다양한 식품으로 만들어서 먹는 크리먼도 있었다. 하지만 유건과 나는 각인 상태이니 그의 피가 들어간 식품을 먹으면 당연히 안 됐다.
앞뒤가 좀 맞지 않지만, 저 모습은 그렇게밖에 해석이 안 돼서 혼란에 빠졌다. 내가 황당해하며 더 이상 가까이 가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는데 돌연 한결이 유건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형?”
그는 단숨에 그들 앞에 섰다. 유건이 한결을 발견하고는 그를 올려다봤다.
나와 눈도 마주쳤다. 무언가 들키면 안 되는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아, 여기 왜….”
“백유건 에스퍼. 여기서 뭐 하는 건지 설명이 필요한 것 같은데.”
한결이 사뭇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떡 벌어진 어깨와 날카로운 눈매는 마치 어두운 숲 속에서 커다란 맹수를 마주한 것 같은 위압감을 주었다.
평소에는 한결이 우리에게 다정하게 굴어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원래 인상만 보면 무서운 축에 속했다. 두 여자는 한결의 고압적인 분위기에 눈치를 보며 움츠러들었다.
“센터 내부에서 대놓고 에스퍼 피를 사고파는 짓을 하는 건 아니어야 할 겁니다.”
한결은 유건이 난감해하며 아무 말을 하지 않자, 그가 이렇게 나오는 행동의 이유를 물으며 대답을 재촉했다.
에스퍼는 재생력이 뛰어나서 간혹 자신들의 피를 크리먼들과 거래하기도 했다. ‘식사’와 치료,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으니 선호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미등록 각성자들, 즉 다양한 이유로 도망자 신세가 되어 돈이 부족한 각성자들이 하는 짓이었다.
객관적으로 유건이 그런 일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한결이 보기엔 이 상황을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희박했다. 한결은 내가 크리먼인 걸 모르기에 유건이 자기 피로 식품을 만들 거란 걸 떠올리지 못할 테니.
만약 그저 다른 크리먼에게 사고파는 게 아니어도 에스퍼 피로 크리먼이 먹을 식품을 만드는 것 또한 불법이었다.
한결은 같은 팀 캡틴으로서 유건을 제지할 의무가 있었다.
“아… 형. 오해야.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돼. 아무튼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미쳤다고 센터 안에서 그런 짓을 해?”
“그럼 이게 뭐 하는 건데.”
“나중에 설명해 줄게. 아무튼 아니야.”
유건은 한결과 대화 중에 나를 곁눈질로 쳐다봤다. 나 또한 그를 의심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자 깊은 한숨을 쉬었다.
우리가 실랑이하는 사이 어느새 유건의 피가 팩 안을 거의 채웠다. 두 여자는 상황을 살피다가 유건의 팔에서 주사를 빼고 동그란 반창고를 붙였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 끼기 싫다는 듯 다급하게 자리를 정리했다.
“어딜 가요.”
나는 내 옆을 지나가는 여자의 팔을 붙잡았다. 여자의 가방에 유건의 피가 담긴 팩이 들어 있었다. 막을 틈도 없이 내가 손을 집어넣어 팩을 들어 올렸다.
“아앗, 잠깐만요!”
여자가 손을 허우적거리며 다시 빼앗으려 했지만, 키가 작아 내게서 뺏을 수 없었다. 방금 뽑은 피는 손바닥을 금세 데울 만큼 따뜻했다.
그리고 유건의 달콤한 향이 미세하게 흘러나왔다. 당장이라도 팩을 찢어발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피를 줬다는 사실만으로 짜증이 솟구쳤다.
동시에 너무 흥분이 고양되어, 혹여 그의 향에 자극받아 크리처화가 개방될까 봐 바로 숨을 참았다. 내가 어이없다는 듯 유건을 노려보자 그제야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내 손에서 팩을 다시 앗아가 그 여자의 가방에 도로 넣었다.
“야. 너 뭐 하는 거야? 미쳤어? 왜 네 피를 팔아?”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이 벌어졌다.
나한테 주면 안 된다고 다른 사람한테 줘도 된대? 누구 마음대로 네 피를 사고파냐고.
아무리 식품을 만든다고 해도 저만큼의 피가 필요하진 않을 텐데, 쟤네들이 저 피로 뭘 할 줄 알고 파냔 말이야!
못다 한 말이 목구멍에서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유건이 진정하라는 듯 내 어깨를 다독였다.
“너도 그만해. 네가 생각하는 거 아니니까.”
“그러니까 뭔데.”
“너한테는 비밀이야.”
한결에게는 나중에 설명해 준다고 해놓고 나한테는 비밀이란다.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질투심이 차올라서 기분이 상했다.
유건은 여자의 팔을 붙들고 있는 내 손가락마저 차례로 떼어 냈다.
“이만 가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예, 알겠습니다.”
마치 나에게서 여자를 비호하는 듯한 말에 더 화가 났다. 여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카페를 빠져나갔다.
‘진짜 이게…. 내 앞에서 뭐 하는 거지?’
“형, 메시지 보냈어. 그거 보면 이해될 거야. 사월이 경호해 줘서 고마워. 우리 갈게.”
유건이 상황을 대충 무마하며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카페를 나가려고 했다.
“놔. 뭔지 말하라고!”
“일단 나가자. 나 밥도 못 먹었어. 배고파.”
내가 팔꿈치로 치며 풀어내려 할수록 유건의 팔이 더욱 죄어 왔다. 말을 돌리는 게 이유를 알려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한결은 정말로 유건이 뭔가 보낸 건지 휴대폰을 심각한 표정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다시 우리 쪽을 바라봤을 땐, 이미 유건의 종용으로 카페를 나선 후였다.
***
센터에서 오후 내내 묵언 시위를 했다. 카페를 나온 후 계속해서 알려 달라고 말했지만, 유건은 끝끝내 알려 주지 않은 탓이다.
시간이 지나자 분노가 잦아들고 생각에 잠기게 됐다. 한결이 유건을 잡거나 따로 부르지 않은 걸 보면 유건이 피를 사고팔 거라는 예측은 오해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왜 안 알려 주지? 그것도 나만?’
그 생각을 하면 다시 알 수 없는 분노가 차올랐다. 머릿속에서 유건이 내가 쥐고 있던 팩을 그 여자의 가방 속에 다시 집어넣던 장면에 계속해서 재생됐다.
내가 생각보다 많이 화난 걸 아는지 모르는지 유건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름대로 티를 내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지만, 미세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숨길 수 없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고민하며 퇴근하고 숙소에 돌아왔을 때였다. 샤워를 하는데 희미한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딱히 올 사람이 없기에 의문이 들었다. 급한 일이라면 문자나 워치로 연락이 오겠지 싶어서 여유 있게 샤워하고 나왔다. 거실로 나가자 테이블에 못 보던 빵이 올려져 있었다.
“이거 뭐야.”
인상을 굳히며 다소 딱딱한 어조로 묻자, 주방에서 유건이 우유를 들고 나왔다.
“너 먹을 거.”
며칠이나 지났다고 이제 요리하기 싫어진 건가? 그래서 빵으로 때우라고?
심기가 불편해서인지 사고가 부정적이고 까칠하게 흘러갔다. 원래라면 샤워하고 나오면 유건이 저녁을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오늘은 겉면이 초콜릿으로 코팅된 빵뿐이었다. 평소에 밥을 잘 챙겨 먹는 편도 아니었고, 둘이서 먹어도 넘칠 정도로 빵의 양이 많아 보였지만 그냥 짜증 났다.
“왜 계속 서 있어. 이리 와 앉아.”
유건이 소파에 앉으며 자신의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너나 먹어.”
나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갈 작정으로 방향을 틀었다. 유건이 다급하게 일어서더니 내 손목을 붙잡았다.
“안 먹는다니까. 입맛 없다고.”
“내가 오전에 말한 대체 식품. 친구 시켜서 C지부 앞까지 가서 사 온 거니까 맛이라도 봐. A지부 앞에 있는 초콜릿 집 2호점이 베이커리래. 거기서 사 온 거야.”
“…….”
듣고 보니 익숙한 냄새가 났다. 유건의 체향과 겹쳐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식품은 오늘 유건의 피로 만들려고 했던 거 아니었나? 그럼 점심에 봤던 사람들은 초콜릿 가게 관계자였나?’
“이거 네 피로 만든 거야?”
“무슨 소리야. 내 피는 단 한 방울도 안 들어갔어.”
“그럼 점심에 왔다 간 사람은 뭔데. 네 피로 뭐 하려고 하는 건데. 식품 만들려고 한 거 아니야?”
“뭐?”
유건은 내가 해괴한 상상을 한다는 듯 황당해했다. 이내 “아, 그래서 그렇게 화낸 거였어?” 하며 소리 내 웃기도 했다.
“아니라면 나한테도 당장 해명해.”
“너한테는 비밀이라니까.”
“왜 나한테는 비밀인데. 너 왜 이렇게 요즘 나한테 뭘 숨겨? 너 뒤에서 구린 짓 하는 거지. 빨리 말해.”
“구린 짓이라니. 또 말 예쁘게 안 하지. 내가 너한테 피해 갈 만한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해?”
“아니면 말하면 되잖아.”
“안 돼. 며칠만 참아. 다음 주에는 알려 줄 테니까.”
유건이 나에게 피해 올 만한 행동을 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그의 행동이 너무 찜찜했다. 왜 지금이 아니라 다음 주에 알려 준다는 건지…. 대체 뭘 꾸미는 거야?
점점 더 미궁 속으로 흘러가는데 유건이 소파로 내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사소한 반항심이 들어 바닥에 앉았다.
그는 개의치 않고 소파에 앉아 빵을 먹기 좋게 칼로 잘라 주었다. 나는 테이블에 놓인 빵을 손으로 찢어 입에 넣었다.
“이거 완전 청개구리네.”
“뭐.”
마음 같아선 2호점이 내 알 바인가 하며 빵도 먹고 싶지 않았지만, 저녁을 먹을 시간이라 허기가 져서 그러진 못했다.
빵의 겉면에는 달콤한 초콜릿이 묻어 있었고 안에는 과일잼이 들어 있었다. A지부 앞에 있는 초콜릿 가게 2호점이라더니 정말 A지부 초콜릿과 비슷한 맛이 났다.
식감도 푹신하니 빵 자체도 고소한 맛이 났다. 유건의 피와 비슷한 향이 나는 걸 먹자 갈증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아 분노가 누그러들었다.
유건이 빵을 찢어 먹는 나를 느긋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맛있어?”
무언가 기대하는 눈빛에 그를 만족시켜 주고 싶지 않았다.
“한 입 먹었는데 어떻게 알아.”
일단 퉁명스럽게 대꾸했는데 빵을 입에 넣을수록 인상이 점점 풀어졌다. 무엇보다 초콜릿은 입에서 녹여 먹거나 부셔서 먹어야 했는데 빵은 깨물어 먹으니 살을 물때와도 유사했다.
쫀득한 식감 사이로 안에 있는 잼이 입으로 흘러나올 땐 묘한 쾌감마저 느껴졌다.
확실히 초콜릿보다 빵이 나았다. 아니, 생각보다 너무 마음에 들어서 만면에 홍조가 깃들었다.
“어때?”
“…….”
어느새 혼자 순식간에 빵 세 개를 해치웠을 때였다. 유건이 다시 한번 물었다.
내가 대답을 않자 그는 고개를 기울여 내 얼굴을 면밀히 살폈다.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더니, 내 입술 주위를 손가락으로 닦아 냈다.
그대로 다시 그의 입술에 넣고 쭙, 하며 빨아들였다. 새빨간 혀까지 내어 제 손가락을 핥는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오늘따라 유건의 입술이 유독 붉게 보였다.